* 오비에도 대성당의 야경

 

 

 

☞ 지난 2023년 12월 14일부터 2024년 1월 26일까지 스페인과 튀르키예를 여행했습니다. 여행은 크게 3단계로 나눠서 했는데 1단계는 산티아고 순례길, 2단계는 스페인 도시여행, 3단계는 튀르키예 여행이었습니다.

여행을 하는 내내 여행일지를 기록했습니다. 이 포스팅들은 그 여행일지 노트를 토대로 작성됐습니다. 여행일지를 중심에 두고 작성된 포스팅이라 그렇게 재미진 포스팅은 아닐 것입니다. 또한 디테일한 정보를 가져다 주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개인의 여행일지를 객관화 하는 작업은 분명히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이렇게 쌓이고 쌓인 것이 개인의 역사가 되고, 더 나아가 모두의 지식으로 발전할 수 있으니까요!

 

 

 

* 오비에도대성당: 크리스마스, 새해 시즌

 

 

 

 

* 2023년 12월 26일 화요일: 13일차 / 안개

- 3일간의 carrion de los condes의 espiritu santo 알베르게 생활을 정리하고 이제 레온으로 가는 버스를 타야 한다. 레온행 버스는 마을 초입에 있는 바르 앞에서 탄다. 16유로인데 바르 사장님이 티켓을 판매하면서 프린트까지 해주셨다.

- 약 1시간 40분을 달려 레온(Leon)에 도착했다. 레온은 스페인어로 사자를 뜻하는 도시다. 영어로 사자가 Lion이니 얼추 비슷해보인다. 레온은 산티아고 순례길 상에서 가장 큰 도시로 도심 한 가운데에 있는 레온 대성당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곳이다.

- 이렇게 멋진 레온이지만 이미 두 번이나 방문을 했던터라 터미널에서 바로 오비에도(Oviedo)행 버스 티켓을 구매했다. 레온에서 오비에도가 가까워서 그런지 버스비가 약 9유로가 나왔다. 카리온과 레온 사이의 버스비보다 훨씬 더 저렴했다.

- 언제나처럼 버스에서 열심히 졸았다. 그렇게 졸다가 눈을 떴는데 눈이 휘둥그래졌다. 주위 풍광이 너무나 이색적이었기 때문이다. 스페인 북부의 산악 구간이 빼어난 절경을 자랑한다는데 그 말이 딱이었다. 우뚝 솟은 봉우리들이 얼핏 강원도를 연상시킬 정도였다. 나중에 기회되면 다시 가볼 생각이다.

- 오비에도 대성당 일대를 둘러보다보니 밤이 되었다. 호스텔을 가려고 했는데 마땅히 갈만한 곳이 없었다. 그래서 알베르게를 찾아갔다. 오비에도에는 오리지널 순례길과 북쪽길을 걸을 수 있다. 오비에도 알베르게는 찾기가 쉽지가 않았다. 길을 돌고돌아 겨우 알베르게를 찾아 체크인을 했다. 가격은 7.5유로였다. 아주 저렴했다. 하지만 냄새가...ㅋ

 

 

 

 

* 수도교 기둥(Acueducto de los Pilares): 물을 공급하는 수도교. 지금은 일부 교각만 남아 있다. 수도교로 가장 유명한 곳은 세고비아 수도교다.

 

 

 

* 알폰소2세: 오비에도 대성당 앞에 동상이 있다.

 

 

 

 

 

 

* 2023년 12월 27일 수요일: 14일차 / 맑음

- 오비에도 알베르게를 빠져나와 오비에도 대성당으로 갔다. 어제는 야경을 찍었으니 이제 밝은 시간의 광경을 담을 생각이었다. 대성당 정식 입장전이었지만 문이 열려있어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그러는 와중에 성당 안에 있는 기념품 가게 직원이 나를 불렀다. 공짜로 성당 박물관 티켓을 끊어준 것이다. 가격이 약 8유로였는데... 값을 지불하고 입장할 생각이었다. 오늘이 내 생일이어서 이렇게 생일 선물을 받는 걸까? 하여간 고마운 일이었다.

- 오비에도 성당박물관은 알폰소 2세때 모은 문화재를 간직한 곳으로 전시물 중에는 예수님의 혈흔이 묻어있는 성의도 있다. 이렇게 귀한 문화재들은 원래 스페인 중부에 있는 톨레도에 있던 것들이다. 북아프리카 무어인들에 의해 이베리아반도가 침략당했을 때 톨레도에서 오비에도로 옮긴 것이다. 무어인들이 이베리아반도를 거의 다 장악했지만 북부 지방만큼은 침략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이베리아인들은 북부 산악지대에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세웠다. 그 아스투이라스 왕국의 수도가 바로 오비에도였던 것이다.

- 오비에도 대성당 앞에는 순례길 표식이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camino del norte(북쪽길)이고, 다른 하나는 camino primitivo(오리지널길)다. 스페인어로 primitivo는 최초, 시작, 원래를 뜻한다.

- 오리지널길인 camino primitivo는 알폰소2세가 최초로 산티아고콤포스텔라로 성지 순례를 떠났을 때 이용한 루트다. 한마디로 알폰소2세는 산티아고 순례길의 첫번째 순례자였다. 스페인인들은 국토회복전쟁을 벌였고, 그에 따라 국경선도 변하게 된다. 순례길도 변화를 겪게 된다.

- 그 두 개의 표식은 오비에도 대성당 앞 알폰소 2세 동상 부근에 자리잡고 있다.

- 이후 영화배우이자 감독이었던 우디 알렌 동상을 보러갔다. 우디알렌 동상 말고도 오비에도에는 동상들이 꽤 많았다. 도시 전체가 큰 외부 조형물 전시관 같았다.

- 탐방을 마치고 버스터미널로 가기 전에 잠깐 오비에도 대학 건물에 들어섰다. 처음에 그곳이 대학 건물인지도 몰랐다. 그저 외형이 근사해서 들어갔던 것이다. 규모있는 옛 건축물이라서 그런지 회랑이 있었는데 그 회랑의 기둥들을 보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기둥에 흉한 자국들이 많이 있었던 것이다.

- 얼핏봤을 때는 석재가 석회석이라 석회석은 흉하게 풍화가 되나, 하는 생각을 해봤다. 하지만 아무리봐도 총탄 자국이었다. 의문을 풀어야겠다는 생각이들어 건물 안내센터에 물어봤다. 안되는 영어로... 하지만 그 안내데스트 언냐도 영어가 안 됐다. 대학 건물을 나와 버스터미널로 가는 길에 관광안내센터가 있어 사진을 보여주며 물어봤다. 대학생처럼 보이는 청년이 이 자국은 스페인 내전 당시의 총격전 때문에 생긴 것들이라고 대답을 해주었다. 그럼 그렇지!

- 이후 산탄데르로 이동했다. 처음에는 빌바오까지 가려다 시간도 늦고, 대서양도 보고 싶은 생각에 산탄데르로 가기로 했다. 오비에도에서 산탄데르까지는 약 200km정도 떨어져있는데 버스로 약 2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 산탄데르 터미널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hostal liebana에 체크인했음. 이렇게 내 생일을 낯선 외국에서 보내게 됐다. 케잌 한조각도 못 먹었지만 무언가 분주하게 잘 보낸 거 같다. 이렇게 생일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가 않네~!^^

 

 

 

* 예수 성의: 예수의 혈흔이 남아있는 옷. 오비에도 대성당 박물관에 있음.

 

 

 

* 두개의 길에 대한 표식: camino primitivo(오리지널길)이냐 camino del norte(북쪽길)이냐. 북쪽길은 camino de la costa라고도 한다.

 

 

 

 

* 오비에도대학교

 

 

 

 

* 총탄자국: 스페인 내전 당시, 오비에도도 전쟁의 참화를 벗어날 수 없었다.

 

 

 

 

* 총탄자국

 

 

 

* 우디알렌: 오비에도를 사랑했던 우디알렌. 우디알렌 동상은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었다.

 

 

 

 

 

 

* 팜플로냐 도시성벽: 4개의 큰 홈은 대포가 거취되는 곳이다. 가운데 종처럼 생긴 공간은 초소다.

 

 

 

 

☞ 지난 2023년 12월 14일부터 2024년 1월 26일까지 스페인과 튀르키예를 여행했습니다. 여행은 크게 3단계로 나눠서 했는데 1단계는 산티아고 순례길, 2단계는 스페인 도시여행, 3단계는 튀르키예 여행이었습니다.

여행을 하는 내내 여행일지를 기록했습니다. 이 포스팅들은 그 여행일지 노트를 토대로 작성됐습니다. 여행일지를 중심에 두고 작성된 포스팅이라 그렇게 재미진 포스팅은 아닐 것입니다. 또한 디테일한 정보를 가져다 주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개인의 여행일지를 객관화 하는 작업은 분명히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이렇게 쌓이고 쌓인 것이 개인의 역사가 되고, 더 나아가 모두의 지식으로 발전할 수 있으니까요!

 

 

* 인천공항

 

 

 

 

* 2023년 12월 14일 목요일: 1일차 / 서울 비

- 비행기가 12시 55분발이라 아침까지 컴퓨터 작업을 하고 집을 나섰다. 미리미리했어야 했는데... 하다보니 일이 많아져 시간에 쫒기는 형편이 됐음. 이러다 비행기를 못 타는 거 아니야,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오전을 분주하게 보냈음.

- 부모님께 인사하고 나오는데 비가 오고 있었음. 마드리드는 비가 안 왔으면 좋겠다.

- 약3년 만에 비행기를 타게 됐음. 정말 오랜만임. 신형 B-787 드림라이너를 탔음.

- 사실 전날 밤을 세우고, 작업까지 해서 몸이 무척 피곤했음. 그래서 나름대로 비행기에서 잘 잤음. 코 골고 잤나? 그렇게 자서 그런지 시차 적응에 어려움이 없었음.

- 인천공항에서 약 20분 정도 연착해서 그런지 마드리드 공항에 예상 시간보다 좀 늦게 도착했음. 서울은 비가 내렸지만 마드리드는 비가 오지 않았음. 4번째 스페인 여행이 시작됐음.

- 새벽 1시 15분발 심야버스를 타려고 마드리드 터미널4(T4)로 이동했음. 근데 이 버스가 팜플로냐(Pamplona)로 직접 가지 않아 중간에 Soria라는 곳에서 환승을 해야함. 한 새벽에 낯선 동네에서 버스를 갈아타야 했음.

-T4 버스터미널에서 식사할 곳이 없어 첫 끼니부터 샌드위치로 떼웠음. 궁시렁대면서도 맛나게 먹었었음.

 

 

* 스페인 마드리드 바라하스 공항: 터미널4에서 심야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 배낭 무게가 대충 17kg 정도였음. 하지만 계속 줄어들었음.

 

 

 

 

 

* 2023년 12월 15일 금요일: 2일차 / 맑음(팜플로냐 비 온 뒤 갬)

- 새벽 1시 15분에 마드리드발 소리아(soria)행 버스에 탑승함. 이후 소리아에서 팜플로냐(pamplona)행 버스로 환승함. 피곤해서 그랬는지 버스에서 꾸벅꾸벅 졸았음. 대신 비행기에서도 버스에서도 계속 앉아 있다보니 허리가 눌리는 느낌이었음.

-팜플로냐 버스터미널에 내리니 오전 7시가 안 되는 시각이었음. 문을 연 바르(bar)가 있어 오랜만에 cafe con leche와 함께 빵을 먹었음. 역시 스페인은 커피와 빵이 맛남. bar를 스페인어에서는 '바'라고 하지 않고, '바르'라고 읽음. animal(동물) 같은 경우도 '애니멀'이 아니라 '아니말'로 읽음. 영어와 스페인어는 좀 다르다. 카페콘레체(cafe con leche)는 카페라떼를 말함. 레체(leche)가 우유를 뜻한다.

- 순례길을 걸으려면 순례자여권이 필요함. 그래서 팜플로냐 대성당 인근에 있는 알베르게 albergue Jesus y Maria에 갔음. 이곳에서는 순례자여권도 발급받고, 1박도 할 것임. 그런데 12시에 문을 연다고 했음. 알베르게는 순례자들의 숙소를 말함.

- 이렇게 된 거 팜플로냐 시내를 둘러보기로 했음. 나름대로 팜플로냐에 대해서 안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그건 나만의 착각이었다.

- 우연히 fortin o medialuna de san bartolome라는 작은 요새를 탐방했다. 이곳은 작은 정원이 딸려있었는데 순례길에서는 살짝 벗어나 있었다. 유명한 팜플로냐 요새(ciuadadela de pamplona)나 팜플로냐 구시가지 성벽하고도 다른 곳이었다.

- fortin o medialuna de san bartolom 옆쪽으로 작은 공원이 있는데 이곳에는 나무조각 같은 조형물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안내판을 봤더니 스페인내전 당시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조형물이었다. 얼핏봤을 때는 낙엽이 떨어져 있고 해서 그 위에 발을 올려놓고 신발끈을 묶으려고 했는데... 그랬으면 큰일날 뻔 했다.

- 이번에 처음 알게된 명소가 하나 더 있다. monument to the fueros라는 기념비이다. 이 길쭉한 조형물은 1893년 나바로의 푸에로법을 수호하기 위한 걸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monument to the fueros는 유명한 카스티요 광장(plaza del castillo)에서 불과 200여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카스티요 광장은 예전에도 몇 번 둘러봐서 익숙한 장소다. 이곳에는 헤밍웨이가 맛집 탐방하듯 자주 들르던 식당도 있다. 익숙한 곳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 인근에 중요한 기념탑이 있는 줄은 정말 몰랐다. 이걸 두고 등잔밑이 어둡다라고 말하는 것이겠지.

- 이미 두 번이나 팜플로냐에 왔으면서 이런 조형물의 존재자체도 몰랐다니! 아무래도 순례길만 허겁지겁 걷느라 그랬던 거 같다. 오늘은 몇 킬로를 걸어야 하나, 오늘은 어느 알베르게에서 자야 하나... 뭐 이런 고민들 때문에 다른 곳에 눈길을 주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솔직히 예전에는 이런 기념물들을 둘러볼 여유조차 없었다. 무슨 속도 경쟁하듯 너무 열심히 걸었던 거 같다.

-전에 제대로 보지 못했던 팜플로냐 도시성벽(city wall)도 자세히 둘러봤다. 도시성벽(city wall)은 앞서 언급한 팜플로냐 요새(ciuadadela de pamplona)와는 좀 다르다. 성벽 사진을 찍다가 보니 귀엽게(?) 생긴 초소가 눈에 들어온다. 초소를 영어로는 sentry box, 스페인어로는 garita라고 부른다. 스페인은 워낙 성이 많은 곳이라 다양한 모습의 초소(garita)의 모습이 존재한다. 그중 팜플로냐 시티월의 초소 모습은 꽤 잘 생긴(?) 편에 속한다.

- albergue Jesus y Maria에 도착해 크레덴셜과 1박 숙박비를 지불했다. 크레덴셜 2유로, 1박 숙박 11유로. 숙박비가 좀 오른 거 같다. 3년 전에는 8유로였던 거 같은데...

- 샤워를 하고 누가 남기고간 즉석 해물스파게티를 데워 먹었다. 침대에 누우니 딱 좋다. 3년 전에 왔을 때는 1층에서 묵었는데... 이제는 침대를 다 제거해서 1층은 빈 공간으로 남겨놨다. 왜지?

- 그런데 강력한 발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누구야? 너야? 도대체 누구 발냄새야! 내 발냄새였다. 알베르게에 나 혼자밖에 없었으니까...ㅋ 아무래도 신발에 물이 들어와서 그런거 같다. 하긴 오래신긴 했지. 고민 끝에 새 신발을 구매하기로 했다. 마침 데카트론 매장이 가까이에 있었다. 카스티요 광장에서 5분 정도의 거리였다. 어차피 바꿀 신발이었으니 과감히 바꾸기로 했다. 약 70유로.

- 이 선택 때문에 이 여행은 아주 큰 격변을 겪게 된다. 순간의 선택이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도보여행 중에 신발을 바꾸는게 아닌데... 그런 기본중의 기본을 무시한 댓가가 아주 혹독했다!

- 성탄절 주간이라 그런지 팜플로냐 대성당에서 행사가 있었다. 무슨 아이들을 보호한다는 의식이었는데 거리행진도 하고 그랬다. 하루 사이에 팜플로냐에서 다양한 경험을 한 거 같다. 팜플로냐의 속살을 봤다고 해야 하나?

 

 

* 스페인내전 조형물: memorial de los centros de detención이 공식 명칭이다. 직역하면 '시내 구금자들의 추모' 로 읽힐 수 있다. detención은 스페인어로 구금, 체포를 뜻한다. 이 조형물은 구글 지도에서도 검색이 안 된다.

 

 

 

* fortin o medialuna de san bartolome

 

 

 

* 팜플로냐 도시성벽: 방어력을 증강시키기 위해 겹겹이 쌓은, 겹성 형태를 띄고 있다.

 

 

 

* 소몰이축제 조형물: 팜플로냐는 바스크 지역에 속한다. 이곳에서는 투우가 아닌 소몰이 축제가 열린다. 왜 그 순한 소를 화나게 하는지...

 

 

* monument to the fueros: 좀 어둡게 나왔다.

 

 

* 초소: 귀엽게 생겼다. 선물 가게 같기도 하다. 내가 군대 있을 때 들락거렸던 초소는 못 생겼었다.

 





역사도시 톨레도의 골목길에서 서성이다!

스페인 톨레도 역사트레킹

 

 

이번에는 해외로 눈을 돌려보겠습니다. 해외 역사트레킹을 한 번 해보는 것이죠. 역사트레킹을 굳이 국내에서만 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요.


제가 소개할 곳은 톨레도(Toledo)라는 곳입니다. 톨레도는 스페인의 대표적인 고도(古都)입니다. 로마시대에는 자치 도시가 있었고, 서고트 왕국 시절에는 도읍지가 있던 곳이 바로 톨레도입니다. 8세기경 이베리아 반도를 침공한 이슬람 무어인들도 톨레도를 전략적 거점으로 이용했습니다. 그들은 이 도시를 요새화시켰습니다.


이렇듯 2천년도 넘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톨레도이기에 역사트레킹을 하기에도 제격인 것이죠. 우리나라의 경주나 공주, 혹은 전주를 탐방한다고 생각하시면 이해가 쉽게 될 겁니다.

 

 




* 톨레도 위치






 

마드리드에서 고속버스타고 톨레도로!

 

저는 이 톨레도를 2년 전 쯤에 방문했습니다. 산티아고 순례길(4편에 언급함)을 탐방한 후 마드리드 근교 여행을 행했을 때, 그때 방문한 것입니다.


톨레도는 마드리드에서 남쪽으로 70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논스톱 버스로 5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고 왕복(round trip) 버스비도 약 10유로 정도로 부담 없이 다녀올 수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이곳은 스페인에 오면 꼭 한 번은 들러야 할 도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스페인 중부지역의 드넓은 평원이 차창 밖으로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광경들을 바라보다 잠깐 잠이 들었었는데 벌써 종착지였습니다. 역시 톨레도는 생각보다 가까웠습니다. 터미널에서 내려 구도심 쪽을 바라보는데 예사롭지 않은 풍광이 펼쳐지더군요. 옛 건축물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는데 마치 중세시대로 되돌아간 느낌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톨레도 여행은 언덕길을 올라가 비사그라 문을 통해 톨레도 구 시가지에 진입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 비사그라 문은 카를로스 1세가 1550년에 축조한 문으로 일명 성스러운 문이라고도 불립니다. 합스부르크가 출신인 카를로스 1세는 이 문의 정면에다 자신의 가문의 문장을 새겨놓았습니다.

 





* 세르반테스 상: 톨레도에 있는 세르반테스 상.




 

 

독일 출신 스페인 왕, 카를로스 1

 

합스부르크가 문장에도 보듯 카를로스 1세는 당시 스페인 국왕이기도 했지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기도 했습니다. 독일 지방을 통치하는 황제가 스페인 국왕을 겸임할 수 있었던 건 결혼을 통해 왕실끼리 연결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약간 결이 다른 이야기인데 정복왕윌리엄 1(1028~1087) 같은 경우도 프랑스 노르망디 공이면서 영국의 왕이었습니다. 그는 영국의 왕이면서도 주로 프랑스 지역에 거주했지요. 영어도 못했다고 합니다.


카를로스 1세는 신성로마제국에서는 카를로스 5세로 불렸습니다. 그는 합스부르크 출신답게(?) 스페인보다는 독일 지역을 우선시 했는데 그로 인해 스페인 국내인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습니다. 그의 집권 초기에 발발한 코무네로스(Comuneros) 반란의 원인 중에는 외국 출신 왕에 대한 반감도 한 몫을 했을 정도였습니다.


집권 40년 동안 스페인에 있었던 시기가 고작 16년 밖에 되지 않았던,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였지만 그는 스페인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인물을 아들로 두었습니다. 그가 바로 스페인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펠리페 2세였습니다.

 

 




* 톨레도 성.





 

스페인 내전의 상흔을 간직한 곳, 톨레도 성

 

비사그라 문을 지나 톨레도 성(Alcázar of Toledo)으로 향했습니다. 톨레도가 역사적인 장소라는 것은, 달리 말하면 이곳에서 수많은 분쟁이 일어났다는 뜻일 겁니다. 그런 분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곳이 바로 톨레도 성이었습니다.


톨레도 성은 이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서 있는데 멀리서보면 빈틈이 없는 단단한 하나의 성채처럼 보입니다. 로마시대부터 궁성이 있었던 이곳은 수많은 세월을 거치는 동안 계속해서 증개축이 이루어졌습니다.


현재의 톨레도 성은 카를로스 1세와 펠리페 2세 때 밑그림이 그려진 것입니다. 정확히 말해 지금의 톨레도 성은 스페인 내전 기간 동안 완전히 파괴된 것을 복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멀리서 본 성의 형상은 고풍스러웠지만 실제 외관의 벽돌 하나하나는 비교적 때가 덜 묻어 있었습니다

 

이렇듯 톨레도 성은 스페인 내전의 상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그와 관련된 유명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소개를 해보겠습니다.


1936727. 당시 톨레도 성은 프랑코 휘하의 호세 모스카르도(José Moscardó) 대령이 사관생도들과 함께 방어를 하고 있었고 외곽에서는 인민전선이 진을 치고 성을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인민전선은 모스카르도 대령의 16세 아들을 인질로 잡고 있었는데 톨레도 성을 포기하지 않으면 아들을 죽이겠다고 협박을 했습니다. 그와 관련된 전화 통화 내용입니다.

 

나는 인민전선군 대장 바르델로 소령이오. 항복하지 않으면 당신 아들을 죽일 것이오.”

항복은 없소.”

최후통첩이란 말이오.”

중략...

아버지. 저 루이스에요.”

아들아, 스페인 국민으로, 기독교인으로 만세 두 번을 외쳐라. 한 번은 그리스도를 위해, 다른 한 번은 스페인을 위해...”

, 아버지. 신이여 만세! 스페인 만세!”

탕탕

 

어린 소년의 죽음 때문인지 성 안에 있던 프랑코 군은 70일간 지속됐던 인민전선의 포위를 이겨냈습니다. 이런 일화 때문인지 톨레도 성은 복원과 함께 성역화 작업이 이루어집니다. 70일간 계속된 인민전선의 혹독한 포위를 견뎌내고, 성을 지키는 최고 사령관의 어린 아들의 장렬한 죽음까지... 이 곳은 이후 스페인 내셔널리즘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 되어버립니다. 독재자 프랑코는 이를 놓치지 않고 톨레도 성을 선전장으로 활용했던 것이죠

 




* 톨레도 골목길: 톨레도의 거리는 저렇게 좁은 골목길 투성이었다. 그래도 자동차들은 쌩쌩 잘 달린다.





저는 이 일화를 들었을 때 좀 의아했습니다. 물음표부터 떠오르더군요. 그 엄혹한 순간에 만세를 외치라고 한 모스카르도 대령이나 그 말에 따라서 만세를 외친 아들 루이스나... 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인민전선 측의 대응도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인질로 잡혀 있는 최고 사령관의 아들을 그대로 총살했다는 건 자신이 쥐고 있는 최고의 꽃놀이패를 스스로 버려버렸다는 뜻이니까요. 아무리 당시 인민전선 측이 노련하지 못하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히든카드를 버릴 정도로 멍청했을까요

 

그래서인지 그 에피소드와 관련하여 몇 가지 다른 이야기들이 존재합니다. 먼저 대령의 아들이 전화 통화 중에 죽지 않고 한 달 후에 벌어진 인민전선에 대한 보복공습 때 총격을 당해 사망을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하나는 어린 아들의 죽음을 통해 인민전선의 잔악성을 고발함으로써 프랑코 측의 만행을 덮어버렸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옵니다. 당시 ‘Guardia Civil’이란 공안조직이 다수의 인민전선 측 남성 인질들을 죽였는데 그 만행을 덮기 위해 어린 아들의 죽음을 더 부각시켰다는 것입니다.


루이스의 이야기가 사실이든 아니든 중요한 것은 스페인 내전을 기억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것을 과거의 일로 돌리지 않고, 또한 서양 사람들의 일로 치부하지 않고 기억하는 일이 톨레도 성을 방문하는 우리들의 책무일 겁니다.

 


 


* 톨레도 성당.






 

스페인 내전과 마드리드 시민들

 

스페인 내전과 관련해서 한 가지 더! 우리는 스페인 내전과 관련하여 바르셀로나를 위시한 까탈루니아, 빌바오를 위시한 바스크 지방이 프랑코 측에 의해 혹독하게 탄압받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마드리드 지역은 프랑코 측에 우호적이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꼭 그렇지가 않습니다. 실제로 스페인 내전 당시 많은 수의 마드리드 시민들이 프랑코에 맞서다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또한 1970년대 중반, 프랑코 사망에 의한 혼란기 때 많은 마드리드 시민들이 앞장서서 민주화를 외쳤습니다.


스페인 내전을 마드리드 VS 바르셀로나프레임으로만 바라본다면, 프랑코 독재에 맞섰던 수많은 마드리드 시민들의 희생은 말 그대로 헛된 희생이 될 것입니다.

 






* 톨레도 성당.





 

 

정신없었던 톨레도 성당

 

다음 탐방지는 톨레도 성당입니다. 톨레도 성당으로 가는 길은 좁았습니다. 아주 좁은 골목길이었습니다.

 

? 8유로요?”

 

멈칫했습니다. 무슨 성당 입장료가 그렇게 비싸단 말입니까? 8유로면 우리나라 돈으로 만 원이 넘는 돈이었습니다. 그래도 발걸음을 돌릴 수 없어 표를 끊었습니다. 속으로 궁시렁궁시렁거리며...


톨레도 대성당은 페르난도 3세 재위시절인 1226년부터 짓기 시작했습니다. 후기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이 성당은 완공 때까지 무려 187년이나 소요됐습니다. 오랜 연륜을 가지고 있고 큰 규모를 자랑하는 곳인 만큼 이 성당은 톨레도 여행의 필수코스로 자리매김 하고 있습니다.


핵심 코스라서 그런지 성당 안에는 사람들로 넘쳐났습니다. 관광객들이 너무 많아서 정신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8유로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톨레도 대성당은 훌륭했지만 인파에 떠밀리는 것이 싫어서 서둘러 다음 탐방지로 향했습니다.

 

 



* 알칸타라.





 

천혜의 요새 톨레도

 

마지막 탐방지는 톨레도 구시가지를 감싸고 있는 타호강과 알칸타라(Alcantara) 다리였습니다. 톨레도가 오래전부터 전략적 요충지가 된 건 타호강 때문이었습니다. 톨레도의 구도심은 말발굽처럼 생겼는데 그 주위 3면을 타호강이 휘돌아 나갑니다. 3면은 협곡 형태를 띠고 있는 터라 톨레도는 천혜의 방어요충지가 되는 셈입니다.


그런 타호강에 로마시대에 축조된 다리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알칸타라 다리입니다. ‘알칸타라는 아랍어로 다리라는 뜻이죠. 알칸타라는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만큼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입니다.


톨레도가 수많은 분쟁을 겪은 도시인만큼 알칸타라도 부침이 많았습니다. 또한 협곡에 위치해 있는 터라 홍수가 나서 교각이 떠내려가기도 했습니다. 톨레도만큼이나 알칸타라의 역사도 파란만장했던 셈입니다.


톨레도를 탐방을 하니 중세시대로 되돌아 간 느낌이었습니다. 물론 스페인 내전 같은 현대사도 떠올리기도 했지요. 덕분에 유익한 해외 역사트레킹을 행했던 것입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꼭 한 번 톨레도에서 지인들과 함께 역사트레킹을 해보고 싶네요. 대신 그때는 인원파악을 하느라 애를 좀 먹을 것 같습니다. 작은 골목길을 헤집고 다니느라 정신이 없을 테니까요.

 

 

 


* 산 마르틴 다리: 이 다리는 알칸타라가 아니다. 산 마르틴(San Martin) 다리다. 이 다리는 14세기 경에 만들어졌는데 이 곳에서 바라보는 석양이 일품이라고 한다. 산 마르틴에서 알칸타라까지는 약 3km 정도 떨어져 있는데 샌책로로 연결되어 있다.









  



 

톨레도, 그 골목길마다 숨 쉬는 역사

 

[22일간의 스페인 여행 ⑬] 역사도시 톨레도를 가다

 

15.02.05 12:19   최종 업데이트 15.02.05 12:19

 

 

 

 

 

 

 

 

 

 

 

 

 
▲ 톨레도 대성당 톨레도 대성당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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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이 코스는 이 로마시대 다리를 건너서 저기 궁전으로 넘어가면 좋을 것 같군. 그런 후에는 강변길을 걸으면서 트레킹을 마무리 해보는 거야.'

직업병인가? 필자는 스페인 도시여행을 하는 내내 머릿속으로 트레킹 코스를 짜고 있었다. 어느 코스로 가야 역사 유적을 연이어서 만날 수 있을까, 어떤 길이 사람들의 시선을 더 사로잡을 수 있을까, 어느 바르(bar)에 가야 더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을까 등등... 그러면서 실없는 생각도 해보았다.

'나중에 리딩 할 일 있으면 반값에 한 번 해봐야겠다. 해외여행이라고 비싸게 할 필요가 있나? 반값에도 충분하지.'

고도 톨레도(Toledo). 로마시대에는 자치 도시가 있었고, 서고트 왕국 시절에는 도읍지였던 곳. 이슬람 무어인들도 요새로 사용한 곳이다. 이렇듯 2000년도 넘는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톨레도를 탐방하다보니, 서울과 충남 공주에서 행한 역사트레킹이 생각났다.

동선을 잡기 위해 답사를 하면서 애를 먹던 일, 해당 유적지에서 무슨 설명을 해야 하나 하며 답답해했던 일. 그렇게 시작 전에는 전전긍긍했지만 트레킹이 종료됐을 때는 참가자들과 즐겁게 뒤풀이를 했던 일 등등... 그런 것들이 필자의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갔다.

 

 

 



고추장 비벼먹고 톨레도를 향해

 
▲ 세르반테스 톨레도 성 인근에 서 있는 세르반테스 동상. 톨레도는 세르반테스의 주 활동 무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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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19일, 여행 17일째

한인 민박집에서 밥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터미널로 향했다. 안주인께서 특별식으로 닭백숙을 해놔서 고추장에 발라 먹었다. 닭백숙을 고추장에다 비벼서 밥과 함께 먹었더니, 속이 화끈거리기는 했지만 든든했다. 빵이나 치즈, 커피 등을 좋아하지만 필자도 역시 별 수 없는 한국 사람이었던 것이다.

톨레도는 마드리드에서 남쪽으로 약 70km 정도 떨어져 있다. 무정차 버스로 약 50분이면 도착할 수 있고 왕복 버스비도 약 10유로 정도로 부담 없이 다녀올 수 있다. 그래서 이곳은 스페인에 오면 꼭 한 번은 들러야 할 도시로 여겨진다.

 

 



 
▲ 톨레도 톨레도는 예로부터 철제 산업이 발달했다. 그래서인지 중세시대 기사들이 쓰던 칼과 방패들을 파는 기념품 가게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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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차창 밖의 풍광에 매료되다 잠깐 잠이 들었는데 벌써 종착지였다. 역시 톨레도는 생각보다 가까웠다. 터미널에서 내려 구도심 쪽을 바라보는데 예사롭지 않은 풍광이었다. 옛 건축물과 성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는데 마치 중세시대로 되돌아간 느낌이었다. 

일반적으로 톨레도 여행의 시작은 언덕길을 올라가 비사그라 문을 통해 톨레도 구 시가지에 진입하는 것이다. 이 비사그라 문은 카를로스 1세가 1550년에 축조한 문으로 일명 '성스러운 문'이라고도 불린다. 합스부르크가 출신인 카를로스 1세는 이 문의 정면에다 자신의 가문의 문장을 새겨놓았다.

 

 

 

독일 출신 스페인 왕, 카를로스 1세

 



 
▲ 알칸타라 다리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알칸다라 다리. 다리 끝 부분에는 방어를 위해 성채가 올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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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가 문장에도 보이듯 카를로스 1세는 당시 스페인 국왕이면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다. 독일 지방을 통치하는 황제가 스페인 국왕을 겸임할 수 있었던 건 결혼을 통해 왕실끼리 연결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약간 결이 다른 이야기인데 '정복왕' 윌리엄 1세(1028~1087) 같은 경우도 프랑스 노르망디 공이면서 영국의 왕이었다. 그는 영국의 왕이면서도 주로 프랑스 지역에 거주했다. 영어도 못했다고 한다.

카를로스 1세는 신성로마제국에서는 카를로스 5세로 불렸다. 그는 합스부르크 출신답게(?) 스페인보다는 독일 지역을 우선시 했는데 그로 인해 스페인 국민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그의 집권 초기에 발발한 코무네로스(Comuneros) 반란의 원인 중에는 외국 출신 왕에 대한 반감도 한 몫을 했을 정도였다. 코무네로스 반란과 관련된 이야기는 앞선 여행기(관련 기사 : "<백설공주>에 나오는 세고비아성, 직접 보니...")에 잠깐 언급이 되어 있다.

집권 40년 동안 스페인에 있었던 시기가 고작 16년 밖에 되지 않았던,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였지만 그는 스페인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인물을 아들로 두었다. 그가 바로 스페인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펠리페 2세였다.

 

 

 

스페인 내전의 상흔을 간직한 곳, 톨레도 성

 



 
▲ 톨레도 성 스페인 내전 당시 격전지였던 톨레도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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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사그라 문을 지나 톨레도 성(Alcázar of Toledo)으로 향했다. 톨레도가 역사적인 장소라는 것은, 달리 말하면 이곳에서 수많은 분쟁이 일어났다는 뜻일 게다. 그런 분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곳이 바로 톨레도 성이었다.

톨레도 성은 이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서 있는데 멀리서보면 빈틈이 없는 단단한  하나의 성채처럼 보인다. 로마시대부터 궁성이 있었던 이곳은 수많은 세월을 거치는 동안 계속해서 증개축이 이루어졌다.

현재 톨레도 성의 원형은 카를로스 1세와 펠리페 2세 때 윤곽이 드러나게 된다. 지금의 톨레도 성은 스페인 내전 기간 동안 완전히 파괴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 그래서 멀리서 본 성의 형상은 고풍스럽지만 실제 외관의 벽돌 하나하나는 비교적 때가 덜 묻어 있었다.  

이렇듯 톨레도 성은 스페인 내전의 상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공간이다. 그와 관련된 유명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소개를 해보겠다.

1936년 7월 27일. 당시 톨레도 성은 프랑코 휘하의 호세 모스카르도(José Moscardó) 대령이 사관생도들과 함께 방어를 하고 있었다. 외곽에서는 인민전선이 진을 치고 성을 포위한 상태였다. 인민전선은 모스카르도 대령의 16살 아들을 인질로 잡고, 톨레도 성을 포기하지 않으면 아들을 죽이겠다고 협박을 했다. 그와 관련된 전화 통화 내용이다.

"나는 인민전선군 대장 바르델로 소령이오. 항복하지 않으면 당신 아들을 죽일 것이오."
"항복은 없소."
"최후통첩이란 말이오."

(중략)

"아버지. 저 루이스에요."
"아들아, 스페인 국민으로, 기독교인으로 만세 두 번을 외쳐라. 한 번은 그리스도를 위해, 다른 한 번은 스페인을 위해…."
"예, 아버지. 신이여 만세! 스페인 만세!"


탕탕

어린 소년의 죽음 때문인지 성 안에 있던 프랑코 군은 70일간 지속됐던 인민전선의 포위를 이겨냈다. 이런 일화 때문인지 톨레도 성은 복원과 함께 성역화 작업이 이루어진다. 70일간 계속된 인민전선의 혹독한 포위를 견뎌내고, 성을 지키는 최고 사령관의 어린 아들의 장렬한 죽음까지... 이곳은 이후 '스페인 내셔널리즘(민족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 되어버린다. 독재자 프랑코는 이를 놓치지 않고 톨레도 성을 선전장으로 활용하게 된다. 

 
▲ 비사그라 문 일명 '성스러운 문'이라고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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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에피소드와 관련하여 몇 가지 다른 이야기들이 존재한다. 먼저 대령의 아들이 전화 통화 중에 죽지 않고 한 달 후에 벌어진 인민전선에 대한 보복공습 때 총격을 당했다는 이야기다. 또 하나는 어린 아들의 죽음을 통해 인민전선의 잔악성을 고발함으로써 프랑코 측의 만행을 덮어버렸다는 이야기다. 당시 '가디아 시빌(Guardia Civil)'이란 공안조직이 다수의 남성 인질들을 죽였는데 그 만행을 덮기 위해 어린 아들의 죽음을 더 부각시켰다는 것이다.

루이스의 이야기가 사실이든 아니든 중요한 것은 스페인 내전을 기억하는 일일 것이다. 그것을 과거의 일로 돌리지 않고, 또한 서양 사람들의 일로 치부하지 않고 기억하는 일이 톨레도 성을 방문하는 우리들의 책무일 것이다.

 

 

 



정신 없었던 톨레도 성당

 


 
▲ 톨레도 성당 톨레도 성당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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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근현대사의 아픔까지도 품고 있는 성을 지나, 필자는 톨레도 성당을 향해갔다. 아주 좁은 골목길을 따라서 갔다.


"예? 8유로요?"

멈칫했다. 무슨 성당 입장료가 그렇게 비싸단 말인가. 8유로면 우리나라 돈으로 만 원이 넘는 돈이었다. 그래도 발걸음을 돌릴 수 없어 표를 끊었다. 속으로 욕에 욕을 해대며 말이다.

톨레도 대성당은 페르난도 3세 재위시절인 1226년에 짓기 시작했다. 후기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이 성당은 완공 때까지 무려 187년이나 소요됐다. 오랜 연륜을 가지고 있고 큰 규모를 자랑하는 곳인 만큼 이곳은 톨레도 여행의 필수코스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핵심 코스라서 그런지 성당 안에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관광객들이 너무 많아서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같은 규모의 세고비아 성당은 한산했지만 톨레도 성당은 자칫하면 줄서서 관람해야 할 정도로 관광객들로 넘쳐났다. 8유로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톨레도 대성당은 훌륭했지만 인파에 떠밀리는 것이 싫어서 서둘러 다음 탐방지로 향했다.

 

 



천혜의 요새 톨레도

 
▲ 좁은 골목길 톨레도의 골목길은 무척 좁다. 그런데 저 좁은 곳으로도 자동차가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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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탐방지는 톨레도 구시가지를 감싸고 있는 타호강과 알칸타라(Alcantara) 다리다. 톨레도가 오래전부터 전략적 요충지가 된 건 타호강 덕분이다. 톨레도의 구도심은 말발굽처럼 생겼는데 그 주위 3면을 타호강이 휘돌아 나간다. 그 3면은 협곡 형태를 띠고 있는 터라 톨레도는 천혜의 방어요충지가 되는 셈이다.

그런 타호강에 로마시대에 축조된 다리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알칸타라 다리다. '알칸타라'는 아랍어로 '다리'라는 뜻이다. 알칸타라는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만큼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다. 톨레도가 수많은 분쟁을 겪은 도시인만큼 알칸타라도 부침이 많았다. 또한 협곡에 위치해 있는 터라 홍수가 나서 교각이 떠내려가기도 했다. 톨레도만큼이나 알칸타라의 역사도 파란만장했던 셈이다.

톨레도를 탐방을 하니 중세시대로 되돌아 간 느낌이었다. 물론 스페인 내전 같은 현대사도 떠올리기도 했다. 덕분에 유익한 해외 역사트레킹을 행했던 것이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꼭 한 번 톨레도에서 지인들과 함께 역사트레킹을 해보고 싶다. 대신 그때는 인원파악을 하느라 애를 좀 먹을 것 같다. 작은 골목길을 헤집고 다니느라 정신이 없을 테니까.

 

 

 

 

 * 타호강: 타호강에 있는 또 하나의 오래된 다리. 산 마르틴 다리.

 

 

 

 

* 기러기 떼: 톨레도에서 본 기러기 떼. 흔히 볼 수 없는 모습이라서 한 컷.

 

 

 

 

 

 

 

* Monastery of San Juan de Los Reyes: 산 후안 수도원. 외벽에는 이슬람

왕국에 사로잡힌 기독교 포로들을 결박하기 위해 사용된 체인들이 걸려있다.

 

 

 

 

 

 

 

 

* Monastery of San Juan de Los Reyes: 외벽에 걸린 포로 결박용 체인.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독재자 프랑코가 우리에게 유신을 알려줬다고?

 

[22일간의 스페인 여행 4편] 산티아고를 걷는 유럽인들

 

14.12.27 15:51l최종 업데이트 14.12.27 15:51

 

 

 

 

 

 

 
▲ 순례자 산티아고 대성당을 향해 가는 순례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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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들의 동료의식

산티아고 순례길에서의 또다른 볼거리는 바로 '사람'이다. 길을 걷다보면 전 세계에서 온 순례자들과 만나고 헤어지고를 수없이 반복한다. 순례자들의 일일 이동거리가 뻔하기 때문에 계속 동선이 겹쳐지고, 그러다보니 보는 얼굴이 계속 보이게 된다. 아침에 같은 알베르게(albergue: 순례자 전용 숙소)에서 출발한 사람과 점심 때 같은 바르(bar)에서 만나고, 그러다 저녁에 또 같은 알베르게에서 1박을 하고.

그래서인지 순례자들끼리는 자연스럽게 동료의식이 생긴다. 아예 팀처럼 움직이는 무리들도 있었다. 그들은 같은 알베르게에 묵으며 일정 자체를 공유했다. 심지어 그들은 빨래도 같이 했다. 알베르게에 있는 세탁기와 건조기의 요금은 보통 3유로 정도인데 개별적으로 하는 것보다 모아서하면 훨씬 저렴하기에 그들은 세탁물을 한 통에 넣어 세탁을 했다.

순례길을 걷기 전까지는 전혀 인연이 없던, 순례길을 통해 인연을 맺은 사람들의 옷들이 한 통에서 돌아가고 있었다. 남자 속옷, 여자 속옷 가릴 것 없이 세탁기에서 원심 운동을 하고 있었다.

 

 

 

 



 
▲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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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은 피레네에서 끝났다!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은 다국적이었지만 역시 자국민인 스페인 사람들이 가장 많았다. 스페인을 제외하고는 프랑스를 위시한 유럽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비유럽권에서는 한국인들이 가장 많은 듯했다.

유럽권 순례자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특히 히피처럼 보이는 순례자들을 보니 그 의문이 더욱 짙어졌다.

'중세는 그렇다 치고, 현대에 와서는 언제부터 유럽 사람들이 이렇게 산티아고 순례길로 몰려들었지? 프랑코 독재에 진절머리 쳤던 유럽 사람들인데 말야. 아직까지 스페인에 프랑코의 어두운 그림자가 남아 있다면 그들이 피레네 산맥을 넘었을까?'

<1984> <동물농장> <카탈로니아 찬가>로 유명한 소설가 조지 오웰은 스페인의 역사를 두고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스페인의 역사는 1936년에 멈추고 말았다."

조지 오웰은 1950년, 46세의 나이로 요절을 했고 그때까지도 스페인은 프랑코가 통치를 했다. 국제여단의 일원으로 스페인내전(1936~1939)에 참여해 목에 관통상을 당하는 등 엄청난 고생을 했던 조지 오웰이었기에 절대로 프랑코를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저런 말들을 쏟아냈을 것이다.

조지 오웰처럼 서구 사람들은 스페인에 대해서 고운 시선을 보낼 수가 없었다.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끌어들여 선거로 들어선 인민전선 정부를 전복시켰던, 파시스트 프랑코 정권이 계속 존속했던 한 서구인들에게 스페인은 논외의 국가였을지 모른다. 그래서 이런 말도 있었다.

"유럽은 피레네(산맥)에서 끝났다."

이렇듯 피레네 산맥은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유럽인들에게 가상 경계선으로 인식됐다. 뻔히 피레네 산맥 아래에 스페인이 존재함에도 그들은 애써 이베리아반도를 유럽 대륙에서 떼어내려고 했던 것이다.

 

 

 



피레네를 들었다 놨다 했던 프랑코

그렇게 가상의 경계선이었던 피레네 산맥은 이제 산티아고 순례길의 시작점이 돼 전세계 순례자들이 모이는 집합소 역할을 해주고 있다. 그러고 보면 피레네는 20세기 들어 유럽과 스페인을 이어주는 가교가 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큰 장벽처럼 경계선이 되기도 하는 등 그 역할이 빈번했다.

그렇듯 피레네가 가교가 되던 장벽이 되던 그 중심에는 항상 프란시스 프랑코가 있었다. 프랑코의 파시즘을 막기 위해 유럽인들은 피레네를 넘었고, 프랑코가 스페인 내전에서 승리하게 되니 피레네를 경계선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다 1975년 프랑코가 사망하자 피레네를 통해 이베리아반도를 방문했다.

 

 



 
▲ 프란시스 프랑코 프란시스 프랑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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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코가 사망을 했다고 군부중심의 독재체제가 일거에 해소되지는 않았다. 당연한 이야기다. 프랑코 체제가 하루아침에 민주체제로 변환된다고 생각하는 건 그저 판타지적인 상상일 뿐이다. 그래서 서구 국가들은 스페인의 민주주의 이행 과정을 근심어린 시각으로 바라봤다.


살얼음판 같았지만 '스페인의 봄'은 민주주의 체제로 착실히 이행되어 갔다. 정치개혁법 제정, 공산당을 포함한 모든 정당의 합법화, 신헌법 제정 등, 39년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프랑코 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법안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어디나 구체제를 신봉하는 수구세력들이 있는 법! 역사의 수레바퀴가 언제나 순탄하게 돌아가지는 않는 법이다. 1981년 2월 23일, 민주화 이행에 불만을 가진 군부세력들이 국회의사당에 진입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군부 쿠데타가 일어난 것이다. 프랑코 사후에 진행된 민주주의 개혁 덕택에 희미해졌던 피레네의 경계가 다시 'DMZ'처럼 선명하게 되돌려 질 판이었다.

 

 

 

쿠데타에 단호히 반대한 후안 카를로스 국왕


프랑코 체제에 향수를 갖고 있던 일부 군부 세력들은 공산당 합법화에 대해서 상당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스페인 내전에서부터 40년간 반공을 국시로 삼고 스스로의 정당성을 부여했던 군부였다. 그래서 공산당까지 합법의 테두리로 끌어들이는 정당 개혁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행위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렇게 '스페인의 봄'은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놓이게 됐다. 또다시 프랑코 시대와 같은 독재시대로 돌아갈 수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스페인의 민주화는 그렇게 쉽게 꺾이지 않았다. 아니다. 오히려 좀 싱거웠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왜? 6시간 만에 쿠데타 상황이 '종결'됐기 때문이다.

"조국의 단합과 영원함의 상징인 왕실은... 민주적인 정치 과정을 무력에 의해 파괴하려고 하는 어떠한 행동도 결코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 후안 카를로스 후안 카를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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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이자 군 최고사령관인 후안 카를로스는 단호하게 쿠데타를 반대했고, 그들 세력의 그릇된 야망을 좌절시켰다. 후안 카를로스는 프랑코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됐지만 아돌포 수아레스를 총리로 내세워 개혁을 이끌게 했고, 쿠데타라는 긴박한 상황에서 결단력을 발휘하여 스페인이 구체체로 복귀하는 것을 막아냈다.


한편 후안 카를로스는 우리하고도 인연이 있다. 왕세자시절 한국인 사범으로부터 태권도를 배웠기 때문이다. 

 

 

 

<게르니카>와 산티아고 순례길


<게르니카>는 스페인 내전 중에 공화정부의 요청으로 그려진 작품이다. 피카소는 프랑코가 집권하는 한 조국으로 <게르니카>를 보낼 수 없다며, 미국에 그것을 맡겼다. 자유의 상징인 <게르니카>를 파시스트 독재자 손에 건넬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었다. 조국 스페인에 자유와 민주주의가 회복되면 돌려보낸다는 조건이었다.

40년 넘게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타향살이'를 했던 <게르니카>는 드디어 1982년,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림의 반환에 스페인 국민들은 크게 환호했다. 전세계 사람들도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 스페인이 오랜 독재체제에서 벗어나 민주주의 사회로 거듭났음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만약 1981년 2월에 있은 군부 쿠데타가 성공을 했다면 <게르니카>가 고향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을까? 산티아고 순례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스페인이 프랑코 체제를 극복하지 못했다면 순례길도 북적거리지 못했을 것이다. 

<게르니카>가 환대를 받으며 귀향했듯, 산티아고 순례길에도 봄바람이 불어왔다. 1982년 교황 바오르 2세의 방문, 1987년 소설가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 출간, 199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등으로 산티아고 순례길은 더욱더 북적북적 해진 것이다. 또다른 중흥기를 맞이한 것이다.

 

 

* 게르니카

 

 

 

 


대원군, 십상시, 문고리... 사극 찍어도 되겠네!

 


후안 카를로스 국왕이 태권도로 우리와 인연이 있듯 프란시스 프랑코도 우리와 관련이 있다. 유신 헌법이 바로 그 '인연의 끈'이다. 1972년 박정희가 유신헌법을 제정하며 영구집권을 획책했을 때, 관련 학자들을 스페인과 대만으로 파견했다고 한다. 당시 두 나라는 총통이 최고 권력기관으로 군림했었고, 유신헌법은 총통제를 목표로 했기에 '적절한' 파견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알다가도 모르는 게 세상일인 것 같다. 약 40여년 전, 총통제를 가르쳐줬던 스페인은 입헌군주국으로서 착실히 민주주의를 실천해 갔고,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의 기소에 앞장을 서기도 했다. 하지만 총통제를 배워갔던 우리나라는 그 유신헌법을 기초한 사람이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자리에 임하고 있다. '기춘대원군'이라는 매우 봉건 왕조적인 별명을 가지고 말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십상시'와 '문고리 3인방'도 있다. 대원군, 십상시, 문고리... 이 정도 캐릭터면 사극 영화 하나 찍어도 될 듯하다. 누가 아는가? <광해>나 <왕의 남자> 빰칠 정도의 흥행몰이를 할지!

 


 
▲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 가운데 서 있는 사람이 필자임.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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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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