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도시 톨레도의 골목길에서 서성이다!

스페인 톨레도 역사트레킹

 

 

이번에는 해외로 눈을 돌려보겠습니다. 해외 역사트레킹을 한 번 해보는 것이죠. 역사트레킹을 굳이 국내에서만 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요.


제가 소개할 곳은 톨레도(Toledo)라는 곳입니다. 톨레도는 스페인의 대표적인 고도(古都)입니다. 로마시대에는 자치 도시가 있었고, 서고트 왕국 시절에는 도읍지가 있던 곳이 바로 톨레도입니다. 8세기경 이베리아 반도를 침공한 이슬람 무어인들도 톨레도를 전략적 거점으로 이용했습니다. 그들은 이 도시를 요새화시켰습니다.


이렇듯 2천년도 넘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톨레도이기에 역사트레킹을 하기에도 제격인 것이죠. 우리나라의 경주나 공주, 혹은 전주를 탐방한다고 생각하시면 이해가 쉽게 될 겁니다.

 

 




* 톨레도 위치






 

마드리드에서 고속버스타고 톨레도로!

 

저는 이 톨레도를 2년 전 쯤에 방문했습니다. 산티아고 순례길(4편에 언급함)을 탐방한 후 마드리드 근교 여행을 행했을 때, 그때 방문한 것입니다.


톨레도는 마드리드에서 남쪽으로 70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논스톱 버스로 5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고 왕복(round trip) 버스비도 약 10유로 정도로 부담 없이 다녀올 수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이곳은 스페인에 오면 꼭 한 번은 들러야 할 도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스페인 중부지역의 드넓은 평원이 차창 밖으로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광경들을 바라보다 잠깐 잠이 들었었는데 벌써 종착지였습니다. 역시 톨레도는 생각보다 가까웠습니다. 터미널에서 내려 구도심 쪽을 바라보는데 예사롭지 않은 풍광이 펼쳐지더군요. 옛 건축물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는데 마치 중세시대로 되돌아간 느낌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톨레도 여행은 언덕길을 올라가 비사그라 문을 통해 톨레도 구 시가지에 진입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 비사그라 문은 카를로스 1세가 1550년에 축조한 문으로 일명 성스러운 문이라고도 불립니다. 합스부르크가 출신인 카를로스 1세는 이 문의 정면에다 자신의 가문의 문장을 새겨놓았습니다.

 





* 세르반테스 상: 톨레도에 있는 세르반테스 상.




 

 

독일 출신 스페인 왕, 카를로스 1

 

합스부르크가 문장에도 보듯 카를로스 1세는 당시 스페인 국왕이기도 했지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기도 했습니다. 독일 지방을 통치하는 황제가 스페인 국왕을 겸임할 수 있었던 건 결혼을 통해 왕실끼리 연결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약간 결이 다른 이야기인데 정복왕윌리엄 1(1028~1087) 같은 경우도 프랑스 노르망디 공이면서 영국의 왕이었습니다. 그는 영국의 왕이면서도 주로 프랑스 지역에 거주했지요. 영어도 못했다고 합니다.


카를로스 1세는 신성로마제국에서는 카를로스 5세로 불렸습니다. 그는 합스부르크 출신답게(?) 스페인보다는 독일 지역을 우선시 했는데 그로 인해 스페인 국내인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습니다. 그의 집권 초기에 발발한 코무네로스(Comuneros) 반란의 원인 중에는 외국 출신 왕에 대한 반감도 한 몫을 했을 정도였습니다.


집권 40년 동안 스페인에 있었던 시기가 고작 16년 밖에 되지 않았던,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였지만 그는 스페인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인물을 아들로 두었습니다. 그가 바로 스페인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펠리페 2세였습니다.

 

 




* 톨레도 성.





 

스페인 내전의 상흔을 간직한 곳, 톨레도 성

 

비사그라 문을 지나 톨레도 성(Alcázar of Toledo)으로 향했습니다. 톨레도가 역사적인 장소라는 것은, 달리 말하면 이곳에서 수많은 분쟁이 일어났다는 뜻일 겁니다. 그런 분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곳이 바로 톨레도 성이었습니다.


톨레도 성은 이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서 있는데 멀리서보면 빈틈이 없는 단단한 하나의 성채처럼 보입니다. 로마시대부터 궁성이 있었던 이곳은 수많은 세월을 거치는 동안 계속해서 증개축이 이루어졌습니다.


현재의 톨레도 성은 카를로스 1세와 펠리페 2세 때 밑그림이 그려진 것입니다. 정확히 말해 지금의 톨레도 성은 스페인 내전 기간 동안 완전히 파괴된 것을 복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멀리서 본 성의 형상은 고풍스러웠지만 실제 외관의 벽돌 하나하나는 비교적 때가 덜 묻어 있었습니다

 

이렇듯 톨레도 성은 스페인 내전의 상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그와 관련된 유명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소개를 해보겠습니다.


1936727. 당시 톨레도 성은 프랑코 휘하의 호세 모스카르도(José Moscardó) 대령이 사관생도들과 함께 방어를 하고 있었고 외곽에서는 인민전선이 진을 치고 성을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인민전선은 모스카르도 대령의 16세 아들을 인질로 잡고 있었는데 톨레도 성을 포기하지 않으면 아들을 죽이겠다고 협박을 했습니다. 그와 관련된 전화 통화 내용입니다.

 

나는 인민전선군 대장 바르델로 소령이오. 항복하지 않으면 당신 아들을 죽일 것이오.”

항복은 없소.”

최후통첩이란 말이오.”

중략...

아버지. 저 루이스에요.”

아들아, 스페인 국민으로, 기독교인으로 만세 두 번을 외쳐라. 한 번은 그리스도를 위해, 다른 한 번은 스페인을 위해...”

, 아버지. 신이여 만세! 스페인 만세!”

탕탕

 

어린 소년의 죽음 때문인지 성 안에 있던 프랑코 군은 70일간 지속됐던 인민전선의 포위를 이겨냈습니다. 이런 일화 때문인지 톨레도 성은 복원과 함께 성역화 작업이 이루어집니다. 70일간 계속된 인민전선의 혹독한 포위를 견뎌내고, 성을 지키는 최고 사령관의 어린 아들의 장렬한 죽음까지... 이 곳은 이후 스페인 내셔널리즘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 되어버립니다. 독재자 프랑코는 이를 놓치지 않고 톨레도 성을 선전장으로 활용했던 것이죠

 




* 톨레도 골목길: 톨레도의 거리는 저렇게 좁은 골목길 투성이었다. 그래도 자동차들은 쌩쌩 잘 달린다.





저는 이 일화를 들었을 때 좀 의아했습니다. 물음표부터 떠오르더군요. 그 엄혹한 순간에 만세를 외치라고 한 모스카르도 대령이나 그 말에 따라서 만세를 외친 아들 루이스나... 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인민전선 측의 대응도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인질로 잡혀 있는 최고 사령관의 아들을 그대로 총살했다는 건 자신이 쥐고 있는 최고의 꽃놀이패를 스스로 버려버렸다는 뜻이니까요. 아무리 당시 인민전선 측이 노련하지 못하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히든카드를 버릴 정도로 멍청했을까요

 

그래서인지 그 에피소드와 관련하여 몇 가지 다른 이야기들이 존재합니다. 먼저 대령의 아들이 전화 통화 중에 죽지 않고 한 달 후에 벌어진 인민전선에 대한 보복공습 때 총격을 당해 사망을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하나는 어린 아들의 죽음을 통해 인민전선의 잔악성을 고발함으로써 프랑코 측의 만행을 덮어버렸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옵니다. 당시 ‘Guardia Civil’이란 공안조직이 다수의 인민전선 측 남성 인질들을 죽였는데 그 만행을 덮기 위해 어린 아들의 죽음을 더 부각시켰다는 것입니다.


루이스의 이야기가 사실이든 아니든 중요한 것은 스페인 내전을 기억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것을 과거의 일로 돌리지 않고, 또한 서양 사람들의 일로 치부하지 않고 기억하는 일이 톨레도 성을 방문하는 우리들의 책무일 겁니다.

 


 


* 톨레도 성당.






 

스페인 내전과 마드리드 시민들

 

스페인 내전과 관련해서 한 가지 더! 우리는 스페인 내전과 관련하여 바르셀로나를 위시한 까탈루니아, 빌바오를 위시한 바스크 지방이 프랑코 측에 의해 혹독하게 탄압받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마드리드 지역은 프랑코 측에 우호적이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꼭 그렇지가 않습니다. 실제로 스페인 내전 당시 많은 수의 마드리드 시민들이 프랑코에 맞서다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또한 1970년대 중반, 프랑코 사망에 의한 혼란기 때 많은 마드리드 시민들이 앞장서서 민주화를 외쳤습니다.


스페인 내전을 마드리드 VS 바르셀로나프레임으로만 바라본다면, 프랑코 독재에 맞섰던 수많은 마드리드 시민들의 희생은 말 그대로 헛된 희생이 될 것입니다.

 






* 톨레도 성당.





 

 

정신없었던 톨레도 성당

 

다음 탐방지는 톨레도 성당입니다. 톨레도 성당으로 가는 길은 좁았습니다. 아주 좁은 골목길이었습니다.

 

? 8유로요?”

 

멈칫했습니다. 무슨 성당 입장료가 그렇게 비싸단 말입니까? 8유로면 우리나라 돈으로 만 원이 넘는 돈이었습니다. 그래도 발걸음을 돌릴 수 없어 표를 끊었습니다. 속으로 궁시렁궁시렁거리며...


톨레도 대성당은 페르난도 3세 재위시절인 1226년부터 짓기 시작했습니다. 후기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이 성당은 완공 때까지 무려 187년이나 소요됐습니다. 오랜 연륜을 가지고 있고 큰 규모를 자랑하는 곳인 만큼 이 성당은 톨레도 여행의 필수코스로 자리매김 하고 있습니다.


핵심 코스라서 그런지 성당 안에는 사람들로 넘쳐났습니다. 관광객들이 너무 많아서 정신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8유로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톨레도 대성당은 훌륭했지만 인파에 떠밀리는 것이 싫어서 서둘러 다음 탐방지로 향했습니다.

 

 



* 알칸타라.





 

천혜의 요새 톨레도

 

마지막 탐방지는 톨레도 구시가지를 감싸고 있는 타호강과 알칸타라(Alcantara) 다리였습니다. 톨레도가 오래전부터 전략적 요충지가 된 건 타호강 때문이었습니다. 톨레도의 구도심은 말발굽처럼 생겼는데 그 주위 3면을 타호강이 휘돌아 나갑니다. 3면은 협곡 형태를 띠고 있는 터라 톨레도는 천혜의 방어요충지가 되는 셈입니다.


그런 타호강에 로마시대에 축조된 다리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알칸타라 다리입니다. ‘알칸타라는 아랍어로 다리라는 뜻이죠. 알칸타라는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만큼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입니다.


톨레도가 수많은 분쟁을 겪은 도시인만큼 알칸타라도 부침이 많았습니다. 또한 협곡에 위치해 있는 터라 홍수가 나서 교각이 떠내려가기도 했습니다. 톨레도만큼이나 알칸타라의 역사도 파란만장했던 셈입니다.


톨레도를 탐방을 하니 중세시대로 되돌아 간 느낌이었습니다. 물론 스페인 내전 같은 현대사도 떠올리기도 했지요. 덕분에 유익한 해외 역사트레킹을 행했던 것입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꼭 한 번 톨레도에서 지인들과 함께 역사트레킹을 해보고 싶네요. 대신 그때는 인원파악을 하느라 애를 좀 먹을 것 같습니다. 작은 골목길을 헤집고 다니느라 정신이 없을 테니까요.

 

 

 


* 산 마르틴 다리: 이 다리는 알칸타라가 아니다. 산 마르틴(San Martin) 다리다. 이 다리는 14세기 경에 만들어졌는데 이 곳에서 바라보는 석양이 일품이라고 한다. 산 마르틴에서 알칸타라까지는 약 3km 정도 떨어져 있는데 샌책로로 연결되어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 밥도둑들에게 도시락을 빼앗기다!

 

[22일간의 스페인 여행 ③] 버렸더니 채워졌다

 

14.12.22 10:14 최종 업데이트 14.12.22 10:14

 

 

 

 

 

 

 

 
▲ 포르토마린(Portomarin) 포르토마린을 흐르고 있는 미뉴(Minho)강. 강 한가운데 로마시대에 지어진 다리의 잔해가 있다. 서기 2세기에 지어진 다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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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5일, 여행 3일째


순례팀은 전날 기차를 타고 갈리시아 지방에 있는 사리아(Sarria)에 도착했다. 사리아는 순례길의 종료점인 산티아고 시에서 동쪽으로 약 11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굳이 사리아에서 순례여행을 시작한 이유는 '완주증' 때문이었다. 100km만 걸어도 정식으로 발급되는 완주증을 받을 수 있다.

원칙적으로 하면 순례길의 메인이라고 불리는 프랑스길(Camino Francés)의 전 구간, 즉 800km를 다 걸은 이에게만 완주증이 발급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100km 이상 걸은 이에게도 발급한다는 건 그만큼 더 순례길을 대중화시키겠다는 이야기다. 여건상 전 구간을 종주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도 일정 부분에 도달하면 '완주'를 인정해주겠다는 뜻이다.

 

 



 
▲ 사리아 사리아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동쪽으로 약 110km 정도 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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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도한 짐은 고행의 지름길


아침부터 계속 비가 오락가락했다. 우비를 부실한 걸 챙겨와서 그런지 입어도 변변찮았다. 트레킹 첫날 오전부터 '삐끄덕'거리는 느낌이다. 비도 그랬지만 가장 문제였던 건 짐이었다. 줄인다고 줄였는데도 배낭에 한 가득이었다. 배낭을 제대로 못 닫을 정도로 짐이 넘쳤다. 인천공항 수하물 코너에서 무게를 체크 할 때는 12㎏이었다. 그때는 그럭저럭 버틸 만 했는데 오전에 배낭을 매어보니 몸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전날 마트에서 과소비(?)를 해서 그랬던 것이다.

스페인의 물가는 다른 유럽국들보다 더 저렴했다. 그래서 손에 잡히는 대로 식료품을 구매한 것이다. 우유, 치즈, 버터, 요거트, 빵 등은 한국보다 더 저렴해서 그런지, 한가득 집었는데도 8유로(1유로: 약 1400원)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필자는 자칭 빵돌이, 치즈돌이인 터라 매우 흐뭇하게 마트에서 나올 수 있었다.

숙소에 돌아와 콧노래를 부르며 그것들로 저녁을 먹었고, 다음 날 점심에 먹을 도시락도 준비했다. 버터를 바르고 치즈도 넣고, 딸기잼으로 마무리 한 특선 도시락을 넉넉히 준비하였다. 또 남는 건 하나도 남기지 않고 배낭 속에 넣었다.

'무겁더라도 다 가져가야지. 어떻게 먹을 것을 버리고 가나!'

 

 


 
▲ 산티아고 순례길 산티아고 카미노를 걷고 있는 순례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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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배낭이 무겁지! 배낭 무게는 자신의 몸무게의 10%를 넘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배낭이 30리터든 60리터든 빈 공간을 다 채우려고 드는 것이 장거리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의 심리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이것저것 다 챙겨 넣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필자는 원래 짐에다 부식까지 잔뜩 더 짊어졌기에 어깨를 늘어뜨리며 걸어야 했다.


과도한 짐들은 어깨를 내리 누르고, 허리와 무릎에 부담을 가중시킨다. 즐거워야 할 도보여행길은 고행길로 바뀌게 된다. 물론 순례자라면 일정 정도 고행을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과도한 고행은 도보여행 자체를 망칠 수도 있다. 경건한 마음으로 순례길을 여행하려고 스페인에 왔지, 골병들려고 이곳에 온 게 아니니까. 

 

 

 



어깨는 짓눌리고, 뱃속은 부글부글...

어쨌든 필자는 첫날, 고행과 더불어 고역을 겪어야 했다. 과도한 짐무게로 어깨는 내려앉을 것 같은 데다 설상가상으로 배까지 아파왔기 때문이다. 유제품이 저렴하다는 이유로 엄청 배불리 먹었다가 탈이 난 듯싶었다. 과유불급이라고 적당히 사고, 적당히 먹었어야 했는데...

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뱃속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배낭은 어깨를 짓누르고... 그러다보니 주위 풍광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분명 무척 아름다운 풍광이 연이어 이어졌지만 필자의 눈은 그저 화장실을 찾는 데 혈안이 됐을 뿐이다. 오죽했으면 노상방변(?)까지 심각하게 고려를 했을까.

 

 



 
▲ 바르(bar) 사장 바르(bar) 사장과 '밥도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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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료점까지 100km가 남았다는 표지석을 뒤로 하고 바르로 내달렸다. 'bar'를 영어로는 '바'라고 하지만, 스페인어는 발음 기호가 없이 로마자 그대로 읽어 '바르'라고 한다. 스페인도 다른 유럽국가들처럼 공공화장실 개념이 희박하다. 마드리드 지하철역에도 화장실이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여행 중에 화장실을 이용하려면 바르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아주 시원하게 일을 처리했다. 10년 묵은 체증이 밀려나가듯 무척 후련했다. 박재동 화백이 저술한 <박재동의 실크로드 스케치 기행>에서는 아침 인사말이 '화장실을 잘 갔냐?'였다. 해외여행을 하면 긴장감 때문에 일을 시원하게 못 보기에 그런 인사말이 오갔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순례길을 걷는 첫날부터 아주 유쾌하게 처리했다. 역시 도보여행은 화장실 '도우미'다.

 

 



'밥도둑'들에게 도시락을 빼앗겼다

비웠으니 다시 속을 채울 때였다. 전날 준비했던 특선 도시락이 빛을 발했다. 1유로 짜리 커피 한 잔과 함께 도시락을 펼쳐놓았다. 이제 맛있게 점심을 즐길 시간이었다. 그런데 도시락 뚜껑을 열자마자 '밥도둑'들이 몰려들었다. 그 녀석들은 순식간에 주위를 감쌌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당혹스러웠다.

'길 닦아놓으니 뭐가 먼저 지나간다고, 도시락 뚜껑을 여니까 누렁이랑 야옹이가 먼저 달려드네!'

 

 


 
▲ 밥도둑 누렁이 표정이 참 거시기해서 빵조각을 안 줄래야 안 줄 수가 없었다. 앉은 자세도 참 거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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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터, 치즈, 잼을 골고루 넣은 빵맛이 좋았나 보다. 한두 점 떼어주면 그것만 먹고 돌아설 줄 알았더니만 그게 아니었다. '밥도둑'들은 오히려 더 열성적으로 도시락 통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녀석들 빵맛을 아는구먼!'

그런 녀석들을 보고 있자니 안양 삼막사에 있는 토종개 삼총사가 생각났다. 밥 때에 맞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공양간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그 토종개들...

그렇게 버릴 건 버리고, 채울 건 채웠더니 그제야 주위 풍광들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됐다. 순례팀이 도보여행을 시작했던 사리아와 대성당이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모두 갈리시아(Galicia) 지방에 속해 있다. 갈리시아는 이베리아반도 북서쪽에 위치해 있는데 왼쪽 면에는 대서양과 맞닿아 있고, 기후는 다른 스페인 지역과 달리 대체로 습하다. 또한 비도 많이 내리는 지역이다.

 

 



 
▲ 소몰이 한 지역 주민이 소떼를 몰고 있다. 소들도 이런 산책(?)이 익숙한 듯 나름대로 진영을 갖춰 이동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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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제주 올레길을 떠올리다


필자도 나름대로 도보여행가라 이 곳의 지형을 자세히 살펴봤다. 갈리시아 지역은 대체적으로 산악지형이었다. 여행기 2편에서 이슬람 무어인들에 의해 서고트 왕국이 멸망당했고, 옛 귀족들이 규합하여 반도 북부에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설립했다고 언급했다(관련 기사 : 산티아고에 '산티아고'가 없다고?). 자료를 찾아보니 당시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산악지형을 이용하여 이슬람 세력의 침공을 가까스로 막아냈다고 기술되어 있었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이 곳의 지형은 경사도가 가파르지 않고 무척 순했기 때문이다. 산악지형이긴 했지만 산들은 완만한 언덕배기 형태를 나타내고 있었다. 급격한 경사도를 나타내는 지형은 거의 없어 보였다. 방어력을 높여줄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천혜의 요새를 제공할 수 있을 정도로 험준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그래서인지 당시 코르도바 왕국은 반도 북부지역을 점령할 의지가 없었다고 기술한 역사책도 있었다. 아스투리아스 왕국이 지형을 방패삼아 방어를 잘 한 것이 아니라 애초 이슬람인들에게 북부지역은 관심권 밖이었다는 이야기다.

 

 


 
▲ 돌담 너머 보이는 목초지 넓은 평원에서 풀을 뜯고 있는 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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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완만한 지형과 풍부한 강수량 때문인지 갈리시아 지역은 오래전부터 목축업이 잘 발달되었다. 드넓게 펼쳐진 목초지에서 소와 말들이 느긋하게 풀을 뜯고 있는 풍광은 갈리시아 지역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모습일 것이다. 그런 모습들은 그저 보고만 있어도 아름답고, 시원스러웠다.


순례팀은 약 25km를 걸어 포르토마린(Portomarin)에 도착했다. 미뉴(minho river)강을 넘어 다다른 포르토마린은 그 자체로 절경이었다. 미뉴강의 흐름으로 생성된 완만한 협곡 지형이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고 있었다.

지금이야 현대식 교량으로 미뉴강을 넘지만 중세시대의 순례자들은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교량을 넘어 도시로 진입했다. 그 교량은 서기 2세기 경에 만들어졌는데 아직도 강 한복판에는 그 흔적들이 남아 있다.

정겨움이 가득한 돌담들 너머 소와 말들이 한가롭게 초원을 누비는 모습, 미뉴강이 시원하게 물줄기를 뿜고 있는 포르토마린까지 보고 있자니 제주도가 생각났다. 또한 자연스럽게 올레길도 연상됐다. 필자가 산티아고에서 제주 올레를 떠올리듯, 유럽 출신 순례자들이 제주 올레를 걷는다면 산티아고 카미노를 떠올릴지 모른다. 필자는 평소에 지론이 하나 있다.

'아무리 지역이 다르더라도 아름다움은 서로서로 통하는 무언가가 있다!'

 

 

 

 



 
▲ 포르토마린 포르토마린에는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다리가 있었다. 중세시대 순례자들은 그 다리를 넘어 산티아고 대성당으로 향했다. 사진에서 보는 잔해물들이 그 다리의 일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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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움말


1. 필자는 짐을 꾸릴 때 3-3-3 원칙을 썼다. 속옷 3, 양말 3, 상의 3. 이런 식으로 짐을 꾸렸다. 순례자들의 숙소인 알베르게에는 세탁기와 건조기가 있어서 그런지 일부 순례자들 중에는 '단벌신사'들도 있었다. 하여간 세탁기를 사용할 수 있으니 옷을 너무 많이 휴대하지는 말자. 가벼운 짐은 순례여행을 더 알차게 만들 것이다.

2. 배낭이 커지면 꾸역꾸역 채워 넣으려고 하는 게 사람의 심리다. 그러니 배낭은 40리터가 넘지 않는 것을 구매하는 게 좋다. 여성순례자들이라면 30리터짜리 배낭을 메는 것도 좋을 듯싶다. 

3. 스페인의 11~12월은 우기라고 한다. 하루에도 비가 계속 오락가락한다. 그러니 꼭 우비를 준비해야 한다. 또한 침낭도 필수다. 침구류가 없는 알베르게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4. 도시락용 플라스틱 용기를 준비하자. 의외로 많은 순례자들이 자신이 만든 도시락으로 점심 식사를 대신했다. 바르에서 따뜻한 커피 한 잔과 함께 먹는 도시락도 그럭저럭 괜찮다.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산티아고에 '산티아고'가 없다고? 

 

[22일간의 스페인 여행기 ②] 산티아고 순례길과 성인 야고보 2부

 

 

 

 

 

 

---> 전편에 이어서

 

 

 

 

 

 

 

 

 

산티아고에 산티아고가 없다?

 

 
▲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 이 스페인 가족은 포르투갈과 인접한 지역인 비고(Vigo)에서 왔는데 순례길을 걷는 내내 자주 마주치게 됐다. 동선을 함께한 것이다. 야고보 성인을 캐릭터화한 음수대에서 물을 마시고 있을 때 촬영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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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물음대로라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그 수많은 순례자들은 '사기'를 당한 셈이 된다. 있지도 않은 야고보 무덤을 보기 위해 무려 800km에 달하는 길을 걷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을 자신의 버킷리스트로 넣는 사람들은 어떤가? 미래에 행할 '바보들의 행진'을 준비하기 위해, 현재의 소중한 시간과 돈을 아낌없이 투자하고 있는 멍청이들인가?

시간이 지날수록 필자의 의문은 더욱 짙어졌다. 그러다 책 <새 유럽의 역사>159쪽에 기술된 부분을 읽게 됐다.



사도 성 요한의 형제이자 에스파냐의 수호 성인인 야곱(기자 주. 야고보)이 에스파냐에서 복음을 전도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 프레데리크 들루슈 편, 윤승준 역, <새 유럽의 역사>(까치)


이 서술에 의하면 산티아고에 '산티아고(야고보)'가 없을 확률이 농후해진다. 이외에도 서양의 중세사를 다룬 유명한 저서, <서양중세사>에도 야고보와 스페인에 대한 관계를 그저 '전설' 수준으로 서술했다.

애초 야고보가 에스파냐에 복음을 전달했을 가능성이 없었다면, 그의 유언도 성립될 수 없다. 가보지도 않은 땅에 자신의 주검을 묻어달라고 간청할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사기를 당한 것일까? 존재하지도 않은 야고보의 행적을 좇아,  돈과 시간을 낭비하는 어리석은 짓을 한 것인가?

 

 

 

 


국토 회복 운동에 구심점이 되어 준 야고보

 

 
▲ 무어인을 무찌르는 야고보 17세기 작품이다.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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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의 무덤이 발견됐다는 9세기 초, 당시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은 이슬람 세력이 차지하고 있었다. 611년, 무함마드가 이슬람교를 창시한 이래, 무슬림들은 포교를 위한 전쟁을 수행해나갔다. 북아프리카 일대를 점령한 그들은 711년,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 반도까지 물밀 듯 쳐들어갔다.

당시 이베리아반도에 있던 서고트 왕국은 이들의 침략을 막지 못하고 713년에 멸망한다. 이후 서고트 왕국의 옛 귀족들은 이베리아 반도 북서쪽 산악 지대로 도주했다가, 718년에 아스투리아스(Asturias) 왕국을 창건하게 된다.

스페인은 유럽 주요국 중 유일하게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나라였다. 그도 그럴 것이 1차 십자군 전쟁(1096년 발발)이 일어났을 때도 국토의 절반 이상이 이슬람 세력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당장 자국 영토를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였던 것이다.

 

 

 

 

* 12세기 경의 스페인: 북부 지방을 제외하면, 이베리아반도 전체가

코르도바 왕국의 영역이다. 코르도바 왕국은 이슬람 무어인들이 세운 나라다.

 

 

 

 

 


이런 국토 회복 운동을 레콘키스타(reconquista)라고 부른다. 국토 회복 운동은 이슬람 세력이 침공했던 711년부터 1492년까지, 무려 800년이나 지속됐는데 그런 국토 회복 운동의 중심에 야고보가 서게 된다. 국토 회복이라는 엄청난 과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큰 구심점이 필요했는데 스페인 사람들은 그 역할을 야고보에게 맡긴 것이다. 열두 제자 중 처음으로 순교했던 야고보였기에 그런 큰 역할을 부여했을 것이다.

그와 관련해 전설이 하나있다. 844년의 클라비호 전투에서 백마를 탄 야고보가 나타나 이슬람 무어인들을 무찔렀다는 것이다. 이후 야고보는 '무어인을 죽이는 산티아고(Santiago Matamoros)'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이렇듯 야고보는 스페인 사람들을 정신적, 종교적으로 하나로 묶어 이슬람 세력에 대한 항전 의지를 고취시키는 역할을 했다.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서 야고보는 큰 구심점이 돼주었던 것이다.

 

 

 

 

의심도 순례자들의 덕목일지 모른다

 

 
▲ 산티아고 대성당 산티아고 대성당에 선 필자. 대성당은 당시 공사중이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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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대성당에 산티아고(야고보)가 있냐, 없냐 하는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명확하게 내려줄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 같다. 한편 고생 고생하며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도 필자와 같은 의문을 한 번쯤 다 품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우리 순례길 팀에도 '어떻게 그 당시 항해 기술로 예루살렘 땅에서 스페인까지 원거리 항해가 가능하겠냐'고 말씀한 분도 계셨다.

필자는 그런 의심(?)들도 순례자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 중 하나로 판단했다. 덮어놓고 무조건 '믿어라, 믿어라'하면 맹목적인 신앙으로 도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진짜 순례자들이라면 몸은 고달프더라도 정신적으로는 '예수천국 불신지옥' 같은 그릇된 배타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영혼이 돼야 할 것이다.

성경에는 '의심하지 말라'라고 적혀 있지만, 그 의심이 합리적이라면 계속해서 되새겨야 할 것이다. '왜'라는 물음 없이 교조적으로 종교를 받아들인다면 그건 종교가 아니라 세뇌일 뿐이다. 그 세뇌가 통한다면 그로 인해, 누군가가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기사를 마치기 전에 한 가지. '산티아고에 야고보가 묻힌 것이 맞냐'라는 필자의 의구심은 해소가 됐는가? 그걸 궁금하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필자의 결론은 이렇다.

 

 



물음표는 그저 물음표로 남겨 두겠습니다. 어쩌면 느낌표가 대신 답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관촉사 은진미륵에서 선한 감흥을 받았을 때도, 56억 7천만 년 후에 부처님이 도래한다는 미륵불 신앙을 기계적으로 믿어서 얻은 불심이 아니었거든요. 산티아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곳에 야고보가 묻혀 있든 아니든 저는 대성당에서 성소를 체험했기에 그 감흥을 느낌표로 간직하고 싶네요!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산티아고에 '산티아고'가 없다고? 

 

[22일간의 스페인 여행기 ②] 산티아고 순례길과 성인 야고보 1부

 

14.12.19 10:47 최종 업데이트 14.12.19 14:03
 


 

 

 


 
▲ 산티아고 카미노 순례자 스페인어로 산티아고는 야고보를, 카미노는 길을 뜻한다. 즉, 산티아고 카미노는 '야고보 길'이라는 뜻이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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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Santiago)는 스페인어로 야고보를 뜻한다. 야고보는 사도 요한의 형으로, 야고보와 요한은 둘 다 예수의 열두 제자였다. 야고보는 현재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위치한 이베리아 반도에 복음을 전파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야고보는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돌아왔다. 고된 사역 길 이후 다시 돌아온 고향이었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금의환향'이 아닌 죽음의 그림자였다.

유대왕인 헤롯 아그리파 1세의 무시무시한 칼날이 그의 목을 내리쳤기 때문이다. 아그리파는 예수가 태어날 때, 베들레헴의 신생 아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했던 그 헤롯왕의 손자였다. 대대로 헤롯왕가들은 유대 땅에 그리스도교가 기반을 잡는 것을 싫어했던 모양이다. 결국 야고보는 기원후 44년 7월 25일에 참수를 당하고 만다. 열두 제자 중 처음으로 순교자가 된 것이다.

 

 



민중 속에서 '부활'한 야고보

 

 
▲ 성인 야고보 산티아고 대성당 벽면에 새겨진 야고보상.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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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야고보의 시신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 배에 실려 에스파냐 북서부 지역으로 이동하게 됐다고 한다. 에스파냐에서 복음을 전한 만큼 그곳에 뼈를 묻겠다는 유언이 있었고, 제자들이 이를 실행에 옮겼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에서 그 먼, 당시는 로마 지배하에 있던 이베리아 반도까지 장거리 항해를 마다하지 않고 제자들은 돛을 올렸을 것이다.

당시 로마는 그리스도교를 공인하지 않았다. 공인은커녕 탄압에 앞장섰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야고보와 관련된 드라마틱한 이야기들은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잊혀 갔다. 이후 야고보의 존재가 민중 속에서 '부활'한 것은 8세기경이었다. '별들의 들판'이라고 불리는 캄푸스 스텔라(Campus Stellae)에 있는 무덤 중 하나가 별의 계시를 받을 것이라는 이야기들이 민중 속에서 널리 퍼져 나갔던 것이다.

그 계시가 실현이 된 것인지, 서기 813년경 성인 야고보의 무덤이 발견됐다고 한다. 이 소식을 접한 당시 스페인 북서부를 지배하고 있던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알폰소 2세는 그 무덤이 발견된 곳에 성당을 짓게 한다. 그렇게 해서 건립된 것이 산티아고 대성당이다. 이후 대성당이 있는 곳에 도시가 들어서니, 그곳이 바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다.

여기까지가 산티아고 카미노(camino : 스페인어로 '길')에 녹아 있는 역사적 스토리텔링이다. 이 내용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소개하는 언론들뿐 아니라 스페인 관광청의 소개 책자에도 기술돼 있다.

 

 

 

 

 



정말 산티아고 대성당에 성인 야고보가 잠들어 있을까? 

 

 
▲ 산티아고 순례길 지도상에 표기된 길은 순례길의 메인이라고 불리는 프랑스길이다. 프랑스 길 이외에도 북부길, 포르투갈길 등 다양한 지선들이 있다. 산티아고 정보를 담은 현지 홈페이지 자료이다.
ⓒ 산티아고홈페이지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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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티아고 순례길

 

 

 

 

산티아고 카미노를 걷는 사람들은 필그림(Pilgrim)이라고 불린다. 말 그대로 순례자라는 뜻이다. 종교다원론자(?)인 필자도 200km 남짓 되는 순례길을 걸으며 짧게나마 필그림이 됐다.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야고보 성인을 기리며 미사에도 참석했다. 대성당에서 드린 미사는 필자에게 무언가 모를 강한 영감을 심어주었다. 그 영감은 예전에 논산 관촉사에서 은진미륵을 처음 봤던 때의 감흥과 비슷했다. 그러한 '신성한 느낌'에 이끌려서 그랬는지, 필자는 이후 계속된 스페인 여행에서 일부러 각 지역에 있는 성당들을 골라 탐방하기도 했다. 

순례자의 마음으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고 또한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선한 감흥을 얻었지만, 여행을 하기 전부터 품었던 근본적인 물음은 계속 풀리지 않았다. 그림자처럼 그 물음은 계속 필자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진짜 산티아고 대성당에 사도 야고보가 묻혀 있는 게 맞는 거야? 야고보의 제자들은 스페인 땅을 한 번도 가보지 못했을 텐데 어떻게 거기까지 간 거지. 내비게이션이라도 있었던 건가?'

 

 

 

 

 

노숙하고 경찰서 가고... 그렇게 스페인에 왔다

 

[22일간의 스페인 여행기①] 산티아고 순례길, 확 질러버렸다

 

14.12.13 20:46  
최종 업데이트 14.12.13 20:46
곽동운(artpunk)

 

 

 

 

 

 

 

 

지난 11월 3일~25일까지, 22일 동안 스페인과 핀란드를 여행했습니다. 스페인에서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수도 마드리드와 그 인근에 있는 도시들을 방문했습니다. 스톱오버로 방문한 핀란드에서는 헬싱키를 탐방했습니다. 그 이야기들을 약 10회에 걸쳐 담아보려고 합니다.... 기자말

 

 

 

 


 
▲ 산티아고 순례길 산티아고 순례길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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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점에서 그 곳을... 그 돈이면 국내를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는 돈인데...'


처음 산티아고 순례길 도보여행을 제안 받았을 때 필자는 좀 멈칫했다. 도보여행가라면 누구나 한 번쯤 가고 싶어 하는 곳을 제안 받았는데 흔쾌히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트레킹 '바닥'에서 먹고 살려면 분명히 한 번 이상은 가야 할 곳이고, 버킷리스트에도 상위에 링크돼 있는 그 산티아고 순례길 트레킹을 확 낚아채지 못했던 것이다.

 

 

인생사 타이밍, 갈 수 있을 때 가자!


왜? 일단 돈이 없어서 그랬다. 달마다 꼬박꼬박 찾아오는 '카드 귀신'을 물리치기도 역부족인데 해외여행이라니! 또한 아직 국내도 가본 곳보다 가보지 못한 곳이 더 많은 터라, 국내에서 내공을 많이 쌓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국내와 서로 비교대조를 하면서 길을 걸어야 할 테니 더 많은 내공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갈 수 있을 때 가! 나중에는 여건이 돼도 못 갈 수도 있어!"   

주저하는 필자에게 여행 제안을 했던, 아름다운 도보여행의 손성일 대장이 일침을 가했다.

그 말이 맞다. '인생사 타이밍'이라고, 이거다 싶으면 확 낚아채야 한다. 질질 끌다가는 손에 남는 건 그저 허송세월뿐이다. '카드 귀신'이야 허리띠 졸라매면서 틀어막으면 되는 것이고, 국내와의 비교대조는 그간 역사트레킹 리딩을 하며 익힌 지식을 써먹으면 될 테니까! 

 

 



 
▲ 산티아고 순례길 산티아고 순례길에 선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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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3일.


필자는 스페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핀란드 헬싱키에서 비행기를 갈아타는 여정이라 비행기에서만 약 15시간 정도 머물러야 했다. 좀이 쑤시고, 발이 저려오는 것을 참으며 마드리드 공항에 도착했다. 수하물을 찾고, 화장실을 가고 했더니 시계는 밤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스페인이 남부유럽이라고 하지만, 11월 마드리드의 밤공기는 무척 차가웠다. 필자의 마음속에도 찬바람이 쌩쌩 불어왔다. 공항에서 노숙을 해야 될 판이었기 때문이다. 손성일 대장을 위시한 본진들은 그 다음날 오전 비행기로 도착할 예정이었고, 필자는 머나먼 이역만리에서 홀로 선발대(?)가 되어 공항 벤치에 자리를 깔아야 했다. 픽업을 해주는 한인민박집에서 1박을 하면 만사 '오케이'가 되겠지만 첫날부터 과소비(?)를 할 수는 없었다. 

 

 

 

세계적인 건축가가 설계한 마드리드 공항에서 노숙을


공항보안 요원들이 필자의 앞을 지나다니며 '쑥떡쿵' 거리기는 했지만 못 본 척하고 그냥 자리를 깔았다. 공항 내부는 춥지가 않아 그럭저럭 버틸 만했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벤치에 있는 손잡이가 바로 그것이었다. 벤치를 침대처럼 쓸 생각이었는데 칸칸이 있는 손잡이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몸을 옆쪽으로 꾸부정하게 만들어 배낭을 앉고 잠을 청했다. 

11월 4일.

필자는 터미널 4(T4)에서 노숙을 했는데, 이 T4는 건축가인 리처드 로저스(Richard George Rogers)의 작품이다. 리처드 로저스는 프랑스 파리 퐁피두센터(1977), 영국 그리니치 밀레니엄 돔(1999)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물들을 많이 설계했다.

 

 


 
▲ 마드리드 공항 마드리드 공항에서 자리를 깔고 노숙을 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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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에 완공된 T4는 매우 독특한 형상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건물 전체를 '통유리'로 감싼 듯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자연광을 듬뿍 받을 수 있을 뿐더러 유리 너머로 이착륙하는 항공기들도 감상할 수 있게 설계됐다. 로저스의 건축 철학은 '첫째도 사람, 둘째도 사람'이라고 하는데 그런 생각들이 반영되어 T4는 시야가 확 트인 공항청사로 태어난 것이다. 


'사람'을 우선시한 로저스의 건축 철학 때문인지 단잠을 잘 수 있었다. 너무 맛있게 잠을 자서 예정시간보다도 더 늦게 일어날 정도였다. 그래서 서둘러 본진이 도착하는 터미널 2(T2)로 이동해야 했다.

EU 지역은 하나의 존(zone)으로 묶여, 나라가 다르더라도 국내선 개념으로 비행기를 이용할 수 있다. T4는 국내선 청사로 분류되었는데 그래서 필자는 별다른 절차 없이 공항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보안검색대를 거치지 않고 너무 쉽게 게이트를 빠져나와 어리둥절할 정도였다.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핀란드 헬싱키에서 스페인 입국심사를 받았던 것이다. 핀란드 출입국 직원이 차가운 음성으로 '왜 스페인과 핀란드를 방문하냐'는 질문을 했기 때문이다.

"핀란드는 그렇다 쳐도 스페인은 지가 무슨 상관이야? 지가 핀란드 사람이지, 스페인 사람이야?"

그때는 이렇게 투덜댔는데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본진이 도착할 T2는 비유럽권에서 출발하는 비행기가 도착하는 터라 따로 입국수속을 밟아야 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의 인천공항은 단일청사라 항공편에 따라 터미널을 이동하는 불편이 없어서 좋다. 공항 벤치에 개별손잡이가 없어 노숙하기도 편하고.

 

 


 
▲ 마드리드 지하철 전동차 내에 광고가 거의 없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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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의 미가 있는 마드리드 지하철

 


늦잠을 자서 그랬는지 본진과 합류하여 지하철을 탔을 때는 한창 출퇴근 시간에 걸리고 말았다. 우리 일행이 가야 할 곳은 마드리드 북쪽에 위치해 있는 차마르틴(Chamartin)이었다. 그곳에는 차마르틴 역이 있는데 거기서 기차를 타고 사리아(Sarria)로 가야했다.

우리나라 지하철과 달리 마드리드 지하철은 광고를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덕지덕지 붙어 있는 성형광고들로 점령(?)된 우리나라 전동차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짭짤한 광고 수익을 낼 수 있는 공간을 그냥 여백으로 남겨 놓은 것이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매일같이 출퇴근을 하며 성형수술을 '권장'받는 한국인의 얼굴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혼자 속삭였다.

'자연스러운 게 좋은 거지... 외모가 전부냐!'

드디어 차마르틴 역에 도착했다. 마드리드에서 우리의 서울역에 해당되는 곳은 중앙역이라 불리는 아토차(Atocha)역이고, 차마르틴 역은 청량리역 정도에 해당되는 곳이다. 이 역은 주로 스페인의 북부지역과 연결된다.

 

 


 
▲ 스페인 경찰서 스페인에서는 경찰을 폴리시아(policia)로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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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시작부터 스토리를 만들었다!


"어, 내 스마트폰?"

시차적응이 안 된 건지, 아니면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생각을 너무 깊게 한 것인지...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을 분실했다. 배낭까지 다 들어내서 찾아봤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스스로를 자책했다. 이 곳이 좀 도둑이 들 끊는 마드리드라는 사실을, 더군다나 혼잡한 출퇴근 시간에 지하철을 탔다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허둥지둥 대는 필자에게 손성일 대장이 이런 말을 했다.

"첫날부터 스토리 만들려고 그러는 거야? 빨리 잘 찾아봐!"

그 말대로 스토리를 만들고 말았다. 그냥 소매치기들한테 스마트폰을 헌납할 수가 없어 경찰서를 찾아갔다. 스페인어도 못하면서 그냥 찾아갔다. 그냥 분실신고서 하나 작성하고 나오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찾아들어간 것이다.

사무실에 있던 현지 경찰관은 자신은 영어를 못한다면서 어디론가 전화를 돌려, 필자에게 건네주었다. 순간 긴장했다.

'나도 영어 못하는데!'

전화를 받는 내내 식은땀이 흘렀다.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느낌이었다.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가 되어 전화상으로 심문을 받는 듯했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스페인 경찰의 한숨 소리가 이렇게 들리는 듯했다.

'어이 동양친구, 왜 이리 영어를 못 해. 너 영어실력 다 바닥났어!'

결국 스마트폰은 찾지 못했다. 그래서 여행 내내 필자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무척 어색하고 답답했지만 나중에는 그것조차도 적응이 되었다. 그냥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순례길을 걷는 동안만큼은 문명의 이기에서 벗어나보는 것이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첫날부터 스토리가 작성됐다. 하지만 그건 서막에 불과했다. 이후에도 많은 이야기들이 필자 앞에 펼쳐졌으니까.

 

 


 
▲ 스페인의 땅끝 스페인의 대서양쪽 땅끝이라 불리는 피스테라(Fister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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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교 로마시대에 건립된 수도교. 마드리드 인근인, 세고비아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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