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레도, 그 골목길마다 숨 쉬는 역사

 

[22일간의 스페인 여행 ⑬] 역사도시 톨레도를 가다

 

15.02.05 12:19   최종 업데이트 15.02.05 12:19

 

 

 

 

 

 

 

 

 

 

 

 

 
▲ 톨레도 대성당 톨레도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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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이 코스는 이 로마시대 다리를 건너서 저기 궁전으로 넘어가면 좋을 것 같군. 그런 후에는 강변길을 걸으면서 트레킹을 마무리 해보는 거야.'

직업병인가? 필자는 스페인 도시여행을 하는 내내 머릿속으로 트레킹 코스를 짜고 있었다. 어느 코스로 가야 역사 유적을 연이어서 만날 수 있을까, 어떤 길이 사람들의 시선을 더 사로잡을 수 있을까, 어느 바르(bar)에 가야 더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을까 등등... 그러면서 실없는 생각도 해보았다.

'나중에 리딩 할 일 있으면 반값에 한 번 해봐야겠다. 해외여행이라고 비싸게 할 필요가 있나? 반값에도 충분하지.'

고도 톨레도(Toledo). 로마시대에는 자치 도시가 있었고, 서고트 왕국 시절에는 도읍지였던 곳. 이슬람 무어인들도 요새로 사용한 곳이다. 이렇듯 2000년도 넘는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톨레도를 탐방하다보니, 서울과 충남 공주에서 행한 역사트레킹이 생각났다.

동선을 잡기 위해 답사를 하면서 애를 먹던 일, 해당 유적지에서 무슨 설명을 해야 하나 하며 답답해했던 일. 그렇게 시작 전에는 전전긍긍했지만 트레킹이 종료됐을 때는 참가자들과 즐겁게 뒤풀이를 했던 일 등등... 그런 것들이 필자의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갔다.

 

 

 



고추장 비벼먹고 톨레도를 향해

 
▲ 세르반테스 톨레도 성 인근에 서 있는 세르반테스 동상. 톨레도는 세르반테스의 주 활동 무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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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19일, 여행 17일째

한인 민박집에서 밥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터미널로 향했다. 안주인께서 특별식으로 닭백숙을 해놔서 고추장에 발라 먹었다. 닭백숙을 고추장에다 비벼서 밥과 함께 먹었더니, 속이 화끈거리기는 했지만 든든했다. 빵이나 치즈, 커피 등을 좋아하지만 필자도 역시 별 수 없는 한국 사람이었던 것이다.

톨레도는 마드리드에서 남쪽으로 약 70km 정도 떨어져 있다. 무정차 버스로 약 50분이면 도착할 수 있고 왕복 버스비도 약 10유로 정도로 부담 없이 다녀올 수 있다. 그래서 이곳은 스페인에 오면 꼭 한 번은 들러야 할 도시로 여겨진다.

 

 



 
▲ 톨레도 톨레도는 예로부터 철제 산업이 발달했다. 그래서인지 중세시대 기사들이 쓰던 칼과 방패들을 파는 기념품 가게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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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차창 밖의 풍광에 매료되다 잠깐 잠이 들었는데 벌써 종착지였다. 역시 톨레도는 생각보다 가까웠다. 터미널에서 내려 구도심 쪽을 바라보는데 예사롭지 않은 풍광이었다. 옛 건축물과 성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는데 마치 중세시대로 되돌아간 느낌이었다. 

일반적으로 톨레도 여행의 시작은 언덕길을 올라가 비사그라 문을 통해 톨레도 구 시가지에 진입하는 것이다. 이 비사그라 문은 카를로스 1세가 1550년에 축조한 문으로 일명 '성스러운 문'이라고도 불린다. 합스부르크가 출신인 카를로스 1세는 이 문의 정면에다 자신의 가문의 문장을 새겨놓았다.

 

 

 

독일 출신 스페인 왕, 카를로스 1세

 



 
▲ 알칸타라 다리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알칸다라 다리. 다리 끝 부분에는 방어를 위해 성채가 올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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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가 문장에도 보이듯 카를로스 1세는 당시 스페인 국왕이면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다. 독일 지방을 통치하는 황제가 스페인 국왕을 겸임할 수 있었던 건 결혼을 통해 왕실끼리 연결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약간 결이 다른 이야기인데 '정복왕' 윌리엄 1세(1028~1087) 같은 경우도 프랑스 노르망디 공이면서 영국의 왕이었다. 그는 영국의 왕이면서도 주로 프랑스 지역에 거주했다. 영어도 못했다고 한다.

카를로스 1세는 신성로마제국에서는 카를로스 5세로 불렸다. 그는 합스부르크 출신답게(?) 스페인보다는 독일 지역을 우선시 했는데 그로 인해 스페인 국민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그의 집권 초기에 발발한 코무네로스(Comuneros) 반란의 원인 중에는 외국 출신 왕에 대한 반감도 한 몫을 했을 정도였다. 코무네로스 반란과 관련된 이야기는 앞선 여행기(관련 기사 : "<백설공주>에 나오는 세고비아성, 직접 보니...")에 잠깐 언급이 되어 있다.

집권 40년 동안 스페인에 있었던 시기가 고작 16년 밖에 되지 않았던,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였지만 그는 스페인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인물을 아들로 두었다. 그가 바로 스페인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펠리페 2세였다.

 

 

 

스페인 내전의 상흔을 간직한 곳, 톨레도 성

 



 
▲ 톨레도 성 스페인 내전 당시 격전지였던 톨레도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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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사그라 문을 지나 톨레도 성(Alcázar of Toledo)으로 향했다. 톨레도가 역사적인 장소라는 것은, 달리 말하면 이곳에서 수많은 분쟁이 일어났다는 뜻일 게다. 그런 분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곳이 바로 톨레도 성이었다.

톨레도 성은 이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서 있는데 멀리서보면 빈틈이 없는 단단한  하나의 성채처럼 보인다. 로마시대부터 궁성이 있었던 이곳은 수많은 세월을 거치는 동안 계속해서 증개축이 이루어졌다.

현재 톨레도 성의 원형은 카를로스 1세와 펠리페 2세 때 윤곽이 드러나게 된다. 지금의 톨레도 성은 스페인 내전 기간 동안 완전히 파괴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 그래서 멀리서 본 성의 형상은 고풍스럽지만 실제 외관의 벽돌 하나하나는 비교적 때가 덜 묻어 있었다.  

이렇듯 톨레도 성은 스페인 내전의 상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공간이다. 그와 관련된 유명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소개를 해보겠다.

1936년 7월 27일. 당시 톨레도 성은 프랑코 휘하의 호세 모스카르도(José Moscardó) 대령이 사관생도들과 함께 방어를 하고 있었다. 외곽에서는 인민전선이 진을 치고 성을 포위한 상태였다. 인민전선은 모스카르도 대령의 16살 아들을 인질로 잡고, 톨레도 성을 포기하지 않으면 아들을 죽이겠다고 협박을 했다. 그와 관련된 전화 통화 내용이다.

"나는 인민전선군 대장 바르델로 소령이오. 항복하지 않으면 당신 아들을 죽일 것이오."
"항복은 없소."
"최후통첩이란 말이오."

(중략)

"아버지. 저 루이스에요."
"아들아, 스페인 국민으로, 기독교인으로 만세 두 번을 외쳐라. 한 번은 그리스도를 위해, 다른 한 번은 스페인을 위해…."
"예, 아버지. 신이여 만세! 스페인 만세!"


탕탕

어린 소년의 죽음 때문인지 성 안에 있던 프랑코 군은 70일간 지속됐던 인민전선의 포위를 이겨냈다. 이런 일화 때문인지 톨레도 성은 복원과 함께 성역화 작업이 이루어진다. 70일간 계속된 인민전선의 혹독한 포위를 견뎌내고, 성을 지키는 최고 사령관의 어린 아들의 장렬한 죽음까지... 이곳은 이후 '스페인 내셔널리즘(민족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 되어버린다. 독재자 프랑코는 이를 놓치지 않고 톨레도 성을 선전장으로 활용하게 된다. 

 
▲ 비사그라 문 일명 '성스러운 문'이라고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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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에피소드와 관련하여 몇 가지 다른 이야기들이 존재한다. 먼저 대령의 아들이 전화 통화 중에 죽지 않고 한 달 후에 벌어진 인민전선에 대한 보복공습 때 총격을 당했다는 이야기다. 또 하나는 어린 아들의 죽음을 통해 인민전선의 잔악성을 고발함으로써 프랑코 측의 만행을 덮어버렸다는 이야기다. 당시 '가디아 시빌(Guardia Civil)'이란 공안조직이 다수의 남성 인질들을 죽였는데 그 만행을 덮기 위해 어린 아들의 죽음을 더 부각시켰다는 것이다.

루이스의 이야기가 사실이든 아니든 중요한 것은 스페인 내전을 기억하는 일일 것이다. 그것을 과거의 일로 돌리지 않고, 또한 서양 사람들의 일로 치부하지 않고 기억하는 일이 톨레도 성을 방문하는 우리들의 책무일 것이다.

 

 

 



정신 없었던 톨레도 성당

 


 
▲ 톨레도 성당 톨레도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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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근현대사의 아픔까지도 품고 있는 성을 지나, 필자는 톨레도 성당을 향해갔다. 아주 좁은 골목길을 따라서 갔다.


"예? 8유로요?"

멈칫했다. 무슨 성당 입장료가 그렇게 비싸단 말인가. 8유로면 우리나라 돈으로 만 원이 넘는 돈이었다. 그래도 발걸음을 돌릴 수 없어 표를 끊었다. 속으로 욕에 욕을 해대며 말이다.

톨레도 대성당은 페르난도 3세 재위시절인 1226년에 짓기 시작했다. 후기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이 성당은 완공 때까지 무려 187년이나 소요됐다. 오랜 연륜을 가지고 있고 큰 규모를 자랑하는 곳인 만큼 이곳은 톨레도 여행의 필수코스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핵심 코스라서 그런지 성당 안에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관광객들이 너무 많아서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같은 규모의 세고비아 성당은 한산했지만 톨레도 성당은 자칫하면 줄서서 관람해야 할 정도로 관광객들로 넘쳐났다. 8유로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톨레도 대성당은 훌륭했지만 인파에 떠밀리는 것이 싫어서 서둘러 다음 탐방지로 향했다.

 

 



천혜의 요새 톨레도

 
▲ 좁은 골목길 톨레도의 골목길은 무척 좁다. 그런데 저 좁은 곳으로도 자동차가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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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탐방지는 톨레도 구시가지를 감싸고 있는 타호강과 알칸타라(Alcantara) 다리다. 톨레도가 오래전부터 전략적 요충지가 된 건 타호강 덕분이다. 톨레도의 구도심은 말발굽처럼 생겼는데 그 주위 3면을 타호강이 휘돌아 나간다. 그 3면은 협곡 형태를 띠고 있는 터라 톨레도는 천혜의 방어요충지가 되는 셈이다.

그런 타호강에 로마시대에 축조된 다리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알칸타라 다리다. '알칸타라'는 아랍어로 '다리'라는 뜻이다. 알칸타라는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만큼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다. 톨레도가 수많은 분쟁을 겪은 도시인만큼 알칸타라도 부침이 많았다. 또한 협곡에 위치해 있는 터라 홍수가 나서 교각이 떠내려가기도 했다. 톨레도만큼이나 알칸타라의 역사도 파란만장했던 셈이다.

톨레도를 탐방을 하니 중세시대로 되돌아 간 느낌이었다. 물론 스페인 내전 같은 현대사도 떠올리기도 했다. 덕분에 유익한 해외 역사트레킹을 행했던 것이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꼭 한 번 톨레도에서 지인들과 함께 역사트레킹을 해보고 싶다. 대신 그때는 인원파악을 하느라 애를 좀 먹을 것 같다. 작은 골목길을 헤집고 다니느라 정신이 없을 테니까.

 

 

 

 

 * 타호강: 타호강에 있는 또 하나의 오래된 다리. 산 마르틴 다리.

 

 

 

 

* 기러기 떼: 톨레도에서 본 기러기 떼. 흔히 볼 수 없는 모습이라서 한 컷.

 

 

 

 

 

 

 

* Monastery of San Juan de Los Reyes: 산 후안 수도원. 외벽에는 이슬람

왕국에 사로잡힌 기독교 포로들을 결박하기 위해 사용된 체인들이 걸려있다.

 

 

 

 

 

 

 

 

* Monastery of San Juan de Los Reyes: 외벽에 걸린 포로 결박용 체인.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스페인의 옛 도시에 남겨 놓은 물음표들

 

[22일간의 스페인 여행 ⑩] 바야돌리드 2부

 

15.01.26 17:02  최종 업데이트 15.01.26 17:04

 

곽동운(artpunk)

 

 

 

 

 

 

이전 여행기에서 'Valladolid'를 '발라돌리드'라고 표기를 했으나 어떤 독자분이 그 표기가 합당하지 않다는 고견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번 여행기부터는 '바야돌리드'로 표기를 수정했습니다. 더 정확하게 사실관계를 확인한 후 기사작성에 임하겠습니다. 고견을 주신 독자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 기자말

 


전편에도 언급했듯이 바야돌리드는 유서가 깊은 도시다. 그래서 이 도시와 관련된 역사 인물들도 많다. 먼저 펠리페 2세가 있다. 그는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투르쿠를 물리쳐, 유럽에서 이슬람 세력을 완전히 몰아냈다. 그 레판토 해전에서 승리한 스페인 함대를 두고 무적함대라는 별명이 붙었다. 스페인 축구대표팀을 두고 '무적함대'라고 칭하는 데 그 명칭의 기원은 펠리페 2세 치하의 스페인 함대였던 것이다.

이 도시에서는 전 유럽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지켜봤던 결혼식도 거행됐었다. 카스티야 왕국의 왕위 계승자 이사벨라 1세와 아라곤 왕위 계승자 페르난도 2세가 그 결혼식의 주인공들이었다. 촉각을 곤두세웠다는 것은 방해자들이 많았다는 뜻이다. 왕실의 결혼식이었지만 그들은 추격자들을 따돌리며 예식을 올렸어야 했다. 그만큼 이 결혼식은 '세기'의 웨딩마치였다.

이런 정치인들 이외에도 대문호인 세르반테스와 탐험가 콜럼버스가 바야돌리드와 인연을 맺고 있다.

 

 

 

산타크루즈 궁과 '황금' 도서관

 


 
▲ 산타 크루즈 궁 산타 크루즈 궁(Santa Cruz Place). 수도원의 회랑식으로 지어진 궁. 사진 사진 아래에는 해시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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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산타크루즈 궁(Santa Cruz Place)로 향했다. 1486년 멘도사 추기경에 의해 건립이 된 산타크루즈 궁은 4년여의 기간 동안 지어진 건물이다. 산티아고 대성당이 완공되는 데 150년 이상 걸렸던 것에 비하면 무척 빨리 시공된 셈이다.


공사기간이 짧았음에도 이 궁전은 건축 중에 드라마틱한 변화를 겪게 된다. 처음에는 고딕 양식으로 지어지다가 이후에는 르네상스 양식으로 전환됐다. 그러다 18세기에는 벤츄라 로드리게스가 신 고전양식을 가미하여 궁을 손보게 된다.

산타크루즈 궁은 반원형의 아치가 인상적인 3층 건물이다. 각층은 수도원 형식의 회랑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왕이 거주했던 궁치고는 상당히 소박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런 소박함 중에서도 사치스러운 공간은 있었다.

2층에 예배당과 함께 도서관이 있었는데 고 장서들이 번쩍번쩍 빛을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금테를 두른 황금 도서관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 장서들은 그레고리 페르난데즈가 모은 것들이란다. 책값만 해도 엄청나다고 한다.

 

 

 

 

 

▲ 황금 도서관 산타크루즈 궁에 있는 도서관.

유리 너머로 찍어서 좀 깨지게 나왔다.  

 

 

 

 



대학도시 바야돌리드와 세르반테스

 


산타크루즈 궁의 화원을 가로 질러가면 바야돌리드 대학의 입구가 나온다. 바야돌리드 대학은 1241년에 건립됐는데 1254년에 등장한, 그 유명한 살라망카 대학보다 더 오래된 대학이다. 사실 바야돌리드 대학의 모태는 팔렌시아(Palencia : 동부에 있는 '발렌시아'와 다른 도시) 대학이었다. 팔렌시아 대학은 1212년에 건립됐다. 이후 바야돌리드로 이전하여 더 큰 발전을 이루게 된 것이다.

시가지에는 바야돌리드 단과대들이 분산되어 있다. 또한 2002년에는 대문호인 세르반테스 이름을 딴 미구엘 세르반테스 대학(Miguel de Cervantes European University)이라는 사립대학도 세워졌다. 그래서 이 도시 자체는 커다란  캠퍼스 같다는 느낌이 든다.

 



 
▲ 세르반테스 생가 바야돌리드에 있는 세르반테스의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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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시에는 세르반테스의 생가도 있다. 세르반테스의 아버지는 귀족 출신이었지만 무능했다. 그 여파로 고향을 등지고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했다고 한다. 바야돌리드도 그 중 하나였다.


세르반테스도 앞서 언급한 레판토 해전에 참전했다. 전투 중에 그는 왼쪽 팔에 큰 부상을 당한다. 그 때문에 평생 왼쪽 팔을 쓰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레판토 외팔이'라는 별명까지 얻게 될 정도였다.

하지만 설상가상이라고 그의 불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타고 있던 배가 납치되어 5년 동안 포로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돈키호테>도 세비야에 있는 감옥에서 구상을 했다고 하니, 세르반테스의 삶도 그 자체로 한 편의 소설인 셈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필자가 생가를 방문했을 때는 휴관을 하고 있었다. 안타까웠지만 발길을 돌려야 했다.

한편 이 도시에는 학교만 많은 게 아니다. 궁전도 많다. 앞서 언급한 산타크루즈 궁외에도 피멘텔 궁(Palace Pimetel)이나 비베로 궁(Palace Vivero) 등 여러 궁전 건물이 있다. 특히 비베로 궁은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라 1세와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2세가 결혼식을 올린 곳이기도 하다.

 

 

 


 
▲ 콜럼버스 동상 거대한 콜럼버스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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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9년 행한 두 사람의 결혼으로 인해 스페인의 국토회복운동은 더욱더 활기를 띠게 된다. 이후 마침내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 세력들이 축출되기에 이르는데 그때가 1492년이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찾아 떠난 그 해였다.


바야돌리드는 콜럼버스가 숨을 거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기차역 앞에 있는 콜론 광장이라는 곳에는 그의 동상이 크게 세워져 있었다. 워낙 동상이 커서 그런지, 철없는 동네 아이들은 그 동상에 올라가서 놀기도 했다.

 

 

 



미완성으로 남아 있는 바야돌리드 대성당

 

 


 
▲ 바야돌리드 대성당 바야돌리드 대성당(Valladolid Cathedral). 뒤쪽으로는 산타마리아 안티구아 교회가 보인다. 대성당은 바로크 양식의 건물이고, 안티구아 교회는 로마네스크 양식이다. 두 건물이 잘 보이는 카페가 있는데 그곳에 앉으면 서양미술사 공부가 저절로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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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야돌리드 대성당 재정난에 휩싸여 아직까지도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정돈되지 않은 성당의 뒤편을 담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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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소개할 곳은 바야돌리드 대성당(Valladolid Cathedral)이다. 이 대성당은 우여곡절이 많은 건물로 아직까지도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1595년 9월, 교황 클레멘스 8세의 승인에 의해 바야돌리드에 새롭게 주교 관할구가 설치된다. 이에 시 위원회는 에스파냐 땅에서 가장 큰 성당을 짓기로 결의 한다.


당시는 국왕 펠리페 2세가 바야돌리드에 거주하며 에스파냐를 통치하던 시기였다. 펠리페 2세의 고향은 이곳 바야돌리드였다. 왕이 거주하니 이 도시는 사실상의 도읍지였던 셈이다. 도시에 주교 관할구가 생성됐고, 도읍지 역할까지 하고 있으니 에스파냐 땅에서 가장 큰 성당을 짓겠다는 시 위원회의 결의가 결코 허망한 것은 아니었다.

 

 

 


 
▲ 산타마리아 안티구아 산타마리아 안티구아 교회(Santa Maria Antigua).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이다. 언뜻보면 예배당이 아니라 성처럼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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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세상 일이 생각만큼 쉬운 일이겠는가? 1606년, 펠리페 3세는 수도를 마드리드로 이전한다. 이에 도시의 정치적 위상도 추락하게 된다. 중심권에서 벗어나니 시 재정도 그만큼 타격을 입게 됐고, 대성당의 건립에도 악영향을 끼치게 됐다. 결국 대성당 건립은 미완으로 남은 채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편 바야돌리드 대성당 뒤편에는 산타마리아 안티구아(Santa María Antigua) 교회도 있다. 필자는 그 두 건물이 잘 보이는 바르에 앉아 느긋하게 커피 한 잔을 마셨다. 대성당은 에레라(Herrerian)라는 스페인식의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반면, 안티구아 교회는 길쭉한 종탑이 인상적인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져 있었다. 그 둘을 비교하면서 바라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었다. 참고로 안티구아 교회는 마요르 광장에 서 있는 콘데 안스레스에 의해 12세기에 첫 삽을 떴다.

 

 

 

 



정교한 석조 양식으로 유명한 산 파블로 교회


 
▲ 산 파블로 교회 산 파블로 교회(San Pablo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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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탐방지는 도미니크 수도회 소속 건물인 산 파블로 교회(San Pablo Church)다. 섬세한 조각상들이 여행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이 건물은 1270년 경에 처음으로 짓기 시작했다. 이후 1550년 경에는 건물 정면을 섬세한 조각들로 새겨 넣게 된다.


이렇게 건물 정면을 정교하게 꾸미는 기법을 두고 파사드(facade)라고 한다. 파사드는 건물을 돋보이게 할뿐더러 자체의 위엄을 높이는 형식으로 작동된다. 이렇듯 파사드가 적용된 산 파블로 교회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딕 양식 건물로 손꼽히고 있다.

사진을 찍으려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몇몇 석조상들은 훼손이 된 상태였다. 인물을 형상한 조각들이었는데 어떤 것은 팔다리가 잘려나가기도 했고, 어떤 것들은 목이 없기도 했다. '시간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이 석조상들에도 적용됐다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 산 파블로 교회 떨어져 나간 장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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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 파블로 교회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쇠락한 제국의 한 귀퉁이를 돌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저런 화려한 장식들 이면에 드러나지 않은 당시 스페인 백성들의 노고를 떠올리기도 했다.


'저런 화려한 건축물이 나타나기까지 얼마나 많은 백성들의 피와 땀이 필요했을까? 또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수탈은 어떻고?'

솔직히 필자는 바야돌리드 대해서 잘 몰랐다. 하지만 그곳에 가지 않았으면 무척 후회했을 것 같다. 생각지도 못한 보물 상자를 얻은 느낌이 들 정도로 흥미로운 여행이었으니까. 그렇다고 화려한 유물들을 탐방하며 감탄사만 연발하지는 않았다. 많은 물음표도 남기고 왔다. 그런 물음표들은 다음 여행을 위한 밑거름으로 삼을 생각이다. 단순히 사진을 찍기 위해 옛 도시를 가는 것은 아니니까….

 

 



도움말

 

1. 바야돌리드는 마드리드에서 버스로 약 2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마드리드 국제 공항에서 출발하는 공항버스도 있다. 그 버스는 약 3시간 정도 소요된다.

2. 마요르 광장을 중심으로 반 시계 방향으로 돌면서 시티투어를 할 수 있다. 소요 시간은 3~4시간 정도. 단 길이 좀 복잡하니 주의해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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