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량산 청량폭포: 등산로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청량폭포가 있었다.

 

 

 

 

▲ 청량사: 청량사는 신라 문무왕 3년(663)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유서 깊은 사찰이다.

 

 

 

 

# 어제는 물귀신, 오늘은 고기귀신의 유혹에 넘어가다!

즐겁게 청량산 산행을 마치고 난 후, 필자가 다시 베이스캠프로 돌아왔을 때는 저녁 경이었다. 그런데 내 베이스캠프 옆쪽에 승용차와 함께 작은 텐트가 하나 쳐져 있었고, 수염을 기른 어떤 아저씨가 분주하게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삼겹살을 굽는지 고소한 냄새가 솔솔 내 코를 자극시켰다. 어제는 물귀신이 나를 유혹하더니만 오늘은 고기귀신이 나를 유혹하나?

"자전거여행 다니시나 봐요? 여기 와서 같이 식사 하시겠어요?"

서울에서 봉화군으로 귀농을 하셨다는 분이셨다. 자신도 젊었을 때 자전거여행을 많이 다녔던 터라 자전거 여행족들의 마음을 잘 안다고 했다.

"아참, 아까 저 아래에서 쓰레기를 줍던데..."
"그거요. 제가 먹은 건 아니고요. 그냥 보기 흉해서 제가 환경미화 좀 했죠."
"아, 역시 그랬구나! 진짜 자전거여행 하는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르단 말야."

별 뜻 없이 쓰레기를 주었을 뿐인데, 그 덕에 난 푸짐하게 삼겹살과 술을 얻어 마실 수 있었다. 착한 일을 해서 내가 상을 받았던 것일까? 그 귀농아저씨도 그날 같이 캠핑을 했다. 젊은 시절 캠핑을 자주했던 분이라 귀농 이후에도 종종 캠핑을 해오셨다고 한다.

 

 

 

 

 ▲ 청량산 도립공원 주자창: 필자가 청량산을 방문했을 때는 장마철이라 그랬는지 주자창이 텅텅 비어 있었다.

그래서 필자는 최고의 캠핑을 즐길 수가 있었다.

 

 

 

 

 

 

 * 청량사: 청량사는 경사면에 위치해 있어서 그런지 계단이 많은 사찰이었다. 한편 청량사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사찰이었다. 잘 정돈된 사찰이라고 할까?

 

 

 

 

 

# 명당자리였던 청량산 베이스캠프

 

"그 팔각정 명당자리에요. 그 자리 내가 좋아하는 자리인데..."

알고 보니 내가 아저씨의 명당자리를 '선점'하고 있었던 것이다. 청량산 등반에서 오는 피로감에다 푸짐한 저녁 식사까지 대접받았더니 노곤함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날은 자리에 눕자마자 그냥 눈이 감겼던 것 같다.

다음날.
그토록 예쁘게 안개가 낀 산을, 난 난생처음 보았다. 낙동강에서 피어오르는 안개가 청량산 봉우리들을 휘감고 있는 모습은 장관중의 장관이었다. 마치 한 폭의 진경산수화를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 맛에 강변 캠핑을 하는 거구나!

그렇게 진기하고 재밌는 에피소드들을 뒤로 하고 나는 계속 자전거여행을 이어갔다. 외롭고 힘든 길이었지만 아름다운 우리나라를 마음껏 느낄 수 있었으니, 난 행운아였던 셈이다.

 

 

 

 

▲ 차 한 잔: 청량사 같은 고즈넉한 사찰에서 느긋하게 차를 한 잔 마시고 싶다!  

 

 

 

 

 ▲ 청량사 청량사 석탑

 

 

 

 * 청량사 전통 찻 집: 저런 곳에서 풍경 소리를 들으며 차 한 잔 마시면 얼마나 좋을까?

 

 

 

 

 

* 대조사석조관음보살입상과 답사객: 이 사진을 통해서도 대조사 석불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석불 뒤쪽으로 길이 있어 바로 옆에서 석불을 볼 수 있다. 또한 소나무가 석불과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 무척 이채롭다.

 

 

 

 

 

* 장하리 삼층석탑: 석탑 바로 옆이 민가라 그런지 마을아주머니가 탑 주변에서 작업을 하시고 계셨다.

 

 

 

 

---> 전편에서 계속

 

 

 

충청남도 부여는 백제의 3번째 수도였다. 일명 <개로왕 국서>라 불리는 문서로 인하여 고구려 장수왕에 의해 한성이 함락되고 백제왕이 죽는 참극이 일어났는데 그 때가 서기 475년, 개로왕 즉위 21년이었다. 국왕이 죽고, 수도가 함락된 백제는 허둥지둥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천도를 한다. 그때부터 웅진 백제시대라고 하는데, 웅진 시대는 서기 475년부터 538년까지 약 63년간 지속된다.

 

부여로의 천도는 26대 성왕 시기에 이루어진다. 성왕은 국호를 백제에서 남부여로 바꾸고 국가의 부흥을 도모하게 된다. 급기야 웅진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의 천도가 이루어지기까지 했다. 그 시기를 일컬어 사비시대라고 한다. 서기 538년부터 백제가 멸망한 660년까지를 말하는데 약 122년에 걸쳐 사비시대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부흥을 위해 천도된 곳에서 백제는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을 당해야 하는 비운을 겪게 된다.

 

역사의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백제가 멸망하고 난 후 부여는 그저 중앙권력에서 벗어난 변방에 불과했다. 그건 공주도 마찬가지였다. 경주 -> 개경 -> 한양으로 중앙권력이 이동을 했지만 부여와 공주는 옛 백제 땅으로만 기억될 뿐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런 중앙에서 비켜난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에 현재의 부여와 공주는 문화유산 답사를 하기에 상당히 호조건에 있다. 호젓하게 문화유적 답사를 하고, 느긋하게 트래킹도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데 역사의 현장도 ‘새옹지마’가 될 수 있는 것일까?

 

 

 

 

*부여의 단풍

 

 

 

* 유홍준: 무량사 경내에서 무량사의 연혁과 김시습에 대한 설명을 답사객들에게 하고 있다.

 

 

 

 

 

 

 

 

여행의 일정은 다음과 같았다.

 

국립부여박물관(정림사터) 집합 -> 장암면 장하리 삼층석탑 -> 임천면 대조사 -> 외산면 무량사 -> 반교마을 -> 홍산관아 -> 국립부여박물관 입구

 

오전 9시부터 진행된 답사는 오후 5시가 되서야 끝이 났다. 일명 '유구라'라고 불리는 유홍준 선생의 입담은 직설적이면서도 구수했다. 막힘이 없는 달변을 구사했고, 주제 전달력도 상당히 뛰어났다. 자연스럽게 청중의 집중을 이끌어 냈다면 그거 여행가이드로서 최고의 능력 아닌가? 이런 분이라면 여행의 주도권을 내놓아도 상관이 없지.

 

첫 도착지인 장하리 삼층석탑은 장하리 마을 언덕에 세워진 고려시대 석탑이다. 그 유명한 정림사지 오층 석탑의 '3층석탑' 버전으로 보이는 이 석탑의 축조 시기는 고려 전기라고 한다. 장하리 삼층석탑은 ‘늘씬함’을 드러내지만 정교함을 잊지 않은 모습이었다. 사비 백제시대 축조된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롤모델로 삼은 탑이지만 그냥 무턱대고 베끼지는 않은 듯싶었다. 백제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 초기의 탑 축조 기술이 서로 어우러져 장하리 삼층석탑을 만들었던 것이다.

 

한편 옛날에는 삼층석탑 자리 옆에 한산사라는 사찰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 한산사는 사라지고 삼층석탑만이 홀로 남아 웅장했을 옛 사찰의 기억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것은 정림사 오층석탑도 마찬가지다. 현재 정림사도 절터만 남아 있고 오층석탑만이 웅장했을 정림사의 옛 모습을 유추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고보면 사찰은 사라져도 석탑은 남아 있게 되는 것 같다. 돌은 그냥 남아 있는 것 같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이스턴 섬의 이스턴 석상이나 영국의 스톤 헤지가 항상 그 자리에 그렇게 서있는 것처럼 말이다.

 

 

 

 

 

* 반교마을: 유홍준 선생의 반교마을 집의 이름은 '휴휴당'이다. 그 대문을 지키고 있는 백소나무가 눈길을 끈다. 얼핏보면 저 백소나무가 비실비실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런 나무들이 꿋꿋하게 오래간다고 한다. 자신의 응축된 에너지를 잘 간직하고 있다가 제때에 방출한다는 것이다. 오버하지도 않고, 건방을 떨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에너지를 발산할 때는 발산을 하여 한뼘 한뼘 자신의 가지를 키운다고 한다. 괜히 자기 잘난 맛에 취해 자신의 에너지를 한꺼번에 쏟아 놓고 사멸해 가는 인간들에게 좋은 교훈을 주는 나무인 것 같다. 인생은 한 방 인가? 그건 모르겠고. 최소한 나무의 인생에서 한 방은 무척 위험한 것이다.

 

 

 

* 부여의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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