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촉사 은진미륵

 

 

 

* 관촉사 은진미륵

 

 

 

 

 

* 대조사 석불

 

 

 

* 대조사 석불

 

 

 

 

 

 

* 안동 이천동 석불

 

 

 

* 안동 이천동 석불

 

 

 

 

 

 

 

* 파주 용미리 쌍미륵

 

* 파주 용미리 쌍미륵

 

 

 

▲ 국제탈춤공연장: 안동 시내에 국제탈춤공연장이 있다. 그 입구에 하회탈 석상이 방문객들을 환영해 주고 있었다.

 

 

 

 

▲ 안동 이천동 석불: 망토를 두르고 수풀 속에서 그 앞을 지나는 중생들을 굽어 보시는 것 같다

 

 

 

 

 

안동 이천동 석불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만든 석불이다. 몸통 부분과 머리 부분이 별개의 암석으로 제작된 독특한 형상을 갖고 있는 것이 이 석불의 특징이다. 몸통 부분, 즉 필자가 망토를 둘렀다고 지칭한 큰 바위 상단 중앙에 머리 부분을 조각한 별개의 돌을 얹었다는 것이다. 단지 머리 부분만 조각하여 올렸을 뿐인데도 자연석인 몸통 부분이 서로 어우러져 일체형의 거대한 석불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석불 제작자의 지혜와 구성 감각에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대목이다.

안동 이천동 석불은 고려 전기 작품이다. 파주 용미리마애이불입상(일명 파주 쌍미륵 석불)이나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부여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등이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석상들이다. 이 시기에 세워진 석불들은 하나 같이 다 엄청난 크기들을 자랑하고 있다. 신체비례에 맞춰 정교함을 구현하는 방식이 아닌, 선이 굵은 방식으로 '키다리 아저씨' 같은 큰 석불을 조각했던 것이다. 일례로 대조사 석불은 인체비례로 따지면 4등신에 가깝고, 얼굴은 '얼큰이'다. 정교성보다는 투박함이, 조화미보다는 개성이 넘치는 석불들이 탄생했던 시기가 바로 고려 전기였던 것이다.

그럼 왜 고려 사람들은 선이 굵으면서 개성이 넘치는 큰 석불들을 제작했을까?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의 사람들보다 세공기술이 덜 해서 그런 식으로 석불을 제작했단 말인가? 고려 전기 시대에는 마을의 안녕에서부터 개인적 기복까지 다 받아주는 수호신과 같은 '키다리 아저씨'가 대표적인 석불로 자리 잡게 된다. 이런 대형 석불들은 해당 지역의 민간 신앙이 접목된 형태라고 한다. 마치 큰 장승을 세운 것처럼 거인 같은 수호신이 마을 입구나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으니 해당 지역 사람들은 얼마나 든든했겠는가?

 

 

 

 

 

▲ 안동 이천동 석불: 멀리서 보면 이천동 석불은 망토를 두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천동 석불은 몸통에 따로 제작한 머리를 올린 형상이다.

 

 

 

 

 

▲ 파주 용미리마애이불입상: 일명 파주용미리석불입상 또는 쌍미륵석불이라고도 불린다.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쌍둥 석불 형식을 띄고 있다. 왼쪽에 원립불을 쓰고 있는 상은 손에 연꽃을 들었는데 남성을 뜻한다고 한다. 오른쪽 방립불을 쓰고, 손을 합장한 상은 여성을 뜻한다고 한다. 원립불은 말그대로 둥근 모자 형태이고, 방립모는 그에 비해 각이 진 모자 형태라고 한다. 용미리마애이불입상은 보물 93호로 등록되어 있다.

 

 

 

 

 

# 파주 쌍미륵과 안동 이천동 석불

더불어 파주 쌍미륵은 잉태까지 '책임'져 준다고 하지 않던가? 파주 쌍미륵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든 남녀 쌍미륵 형상이라 잉태와 관련된 기도들이 많이 올려진다는 것이다. 즉 아이를 낳고 싶어 하는 부부들이 많이 와서 기원을 드리고 간다고 한다. 실제로 이 쌍미륵과 관련된 설화도 잉태와 관련이 있었다.

파주 쌍미륵도 안동 이천동 석불처럼 자연석을 몸통으로 이용하였고, 얼굴 부위도 따로 제작하여 올렸다고 한다. 쌍미륵이 있는 용미사를 방문했을 때, 필자는 쌍미륵을 보면서 '깔깔'거리며 웃었다. 경내에서 그것도 석불 앞에서 큰 소리를 내며 웃는다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 짓이다.

"뭐가 그렇게 좋아요?"

스님이었다. 누가 뒤에 있는 줄도 모르고 한참을 웃었던 것이다.

"쌍석불을 보니까 좋네요. 그냥 보기만 해도 복이 오는 것 같아서 좋습니다."

 

불경한 짓을 했지만 웃음소리가 나쁘지 않게 들렸는지, 스님은 필자를 꾸짖지 않고 그냥 거처로 돌아가셨다. 필자는 그런 큰 웃음을 안동 이천동 석불 앞에서도 터뜨리고 만 것이다. 망토를 두른 듯한 모습이 재밌었고, 수풀 사이로 몸을 쑤욱 내민 듯한 모습도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을 하느라 심신이 다 지쳐있었지만 석불을 보고 있을 때만큼은 근심 걱정을 다 내려놓고 크게 웃었다.

그런 '불경'한 모습을 보고 어떤 불심이 깊은 분이 손가락질을 해댔지만 필자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지나가는 나그네가 마을의 수호신에게 안녕을 기원하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물론 석불 앞에서 경망스럽게 '깔깔'거리며 웃었던 것은 예의에 어긋난 일이었지만 말이다.

그런 안동 이천동 석불이 준 큰 기쁨 덕택에 나는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을 계속 해서 이어나갈 수 있었다. 이천동 석불을 보기 위해 거의 20Km 이상을 돌아갔지만 200Km 이상을 갈 수 있는 에너지를 자연스럽게 충전시킨 느낌이었다.

 

 

 

 

# 인공적인 4대강 VS 자연적인 석불

 


글을 마치기 전에 4대강과 관련된 이야기를 잠깐 언급해 보겠다. 이미 실패한 정책임이 만천하에 드러난 4대강에 대해서, 필자까지 나서서 왈가불가 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필자가 스스로 느낀 감상 정도만 언급해 보겠다.

필자는 경북 안동에서부터 구미까지 낙동강 자전거도로를 타고 이동을 했다. 필자는 예전부터 국토를 종단하는 자전거 도로가 하나 개설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자전거도로든 도보여행길이든 무동력 여행을 하는 여행자들이 안전하게 이동을 할 수 있는 길이 개설됐으면 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4대강의 부속시설로 만들어진 현재의 4대강 자전거도로 방식은 반대한다. 필자가 직접 주행을 한 결과 4대강 자전거도로는 안전성이 결여된 구간이 상당히 많았다. 4대강을 중심축에 두고 억지로 설계를 해서 그랬는지 급경사가 다반사였다. 기존의 산길과 농로길을 끌어 와서 4대강 자전거도로 탈바꿈을 시키느라 그런 무리수가 나왔던 것으로 판단된다. 급경사가 진 농로길은 굴곡이 심한 일반국도 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도로폭이 좁을뿐더러 안전시설물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자를 가장 당혹시켰던 것은 강 중간에 떡하니 버티고 서있는 보였다. 그런 보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아름다운 이곳에 이런 시설물이 있어야 하지? 굳이 이런 시설물이 여기 있을 필요가 있을까?'

자연석을 이용하여 석불을 제작함으로써 주위사물들과 혼연일체가 된 안동 이천동 석불을 보다 '쌩뚱맞게' 낙동강 한가운데 떡하니 버티고 서있는 보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입맛이 무척 씁쓸했다.

 

 ▲ 낙단보 경북 군위군에 위치한 낙단보다.

 

 

 

 

▲ 낙단보 경북 군위군에 위치한 낙단보다.

 

 

 

▲ 낙동강 낙동강 상류의 사진이다. 자연은 있는 그대로 두었을 때 가장 아름다운 법이다.

보를 쌓고, 콘크리트를 바르면서 4대강이 친환경적이라고 하면 그걸 누가 믿겠는가?

 

 

 

 

 

▲ 안동 이천동 석불

 

 

 

 

 * 안동 이천동 석불: 마치 수풀 속에서 세상을 굽어 보시는 듯한 형상이다.

 

 

 

 

 

2012년 7월 14일: 여행 31일차

# 안동 이천동 석불 앞에서 크게 웃어댔다!


누구는 여행을 직접 할 때보다 여행 계획을 꾸릴 때가 더 흥분된다고 한다. 지도를 보며 동선을 그리고 검색을 통해 탐방지에 대한 사전 정보를 습득하는 행위 자체가 즐겁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행 계획을 꾸리는 건 만만치 않은 일이다. 한정된 시간과 뻔한 예산을 가진 가난뱅이 여행자들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다녀보고 싶고, 조금이라도 더 느껴보고 싶으나 시간과 경비 제약 때문에 가보고 싶은 탐방지를 뺄 수밖에 없었던 아픔을 누구나 다 가지고 있을 것이다. 가난뱅이 여행자들이라면 더 많은 뺄셈을 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많은 여행자들이 그렇듯, 필자도 절경과 유적지를 양대 축으로 삼아 여행 계획을 수립한다. 한편에서는 아름다운 풍광에 매혹되고, 또 한편에서는 찬란한 우리 문화유산에 감탄사를 내뱉는다는 말이다. 양대 축을 동시에 누리면 금상첨화겠지만 따로 따로 체험한다고 해도 큰 불만은 없다. 이번 여행기에 소개할 안동 이천동 석불은 후자 쪽에 속할 것이다. 이천동 석불은 감탄사를 유발시키는 훌륭한 우리의 문화유산이었던 것이다.

 

 

 

 

 ▲ 안동 이천동 석불: 이천동 석불이 있는 곳은 제비원이라는 하여, 조선시대 국영여관이 있었던 곳이다.

 즉 석불이 세워진 제비원 일대는 조선시대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교통의 요지였던 것이다.

 

 

 

 

* 안동 화회마을 보건진료소: 하회마을에서는 보건소도 한옥집이다.

 

 

 

 

한편 필자는 이천동 석불 앞에서 '깔깔깔'하고 연신 웃음보를 터뜨렸다. 석불 앞에서 경망스럽게 웃었더니, 주위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필자를 보고 손가락질을 하기도 했다. 그럼 필자는 왜 그렇게 부처님 앞에서 망동된 행동을 했던 것일까? 혹시 필자는 불교에 대한 존중심이 없던 것이 아닐까?


#거인 같은 고려 전기시대 석불들

전편인 경북 봉화 여행기에서 필자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부처님을 만나 뵙고 왔다고 했다. 청량산에 있는 청량사에서 세상을 시원스럽게 굽어보시는 석불 좌상을 두고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 말에 빗대보자면 안동 이천동 석불은 세상을 즐겁게 해주시는 부처님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멀리서 보았을 때 이천동 석불은 망토를 두른 모습이었다. 큰 망토를 두르고 얼굴을 불쑥 내민 형상이었다. 그런 독특한 형상의 석불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런 엉뚱한 생각이 스쳐지나 갔다.


'부처님이 누더기 같은 도포를 두르고 불쌍한 중생들을 위해 고행의 길을 가시다 안동 이천동에서 석상이 되신 것이 아닐까?'


 

 

 

▲ 안동 이천동 석불: 멀리서 보면 이천동 석불은 망토를 두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천동 석불은 몸통에 따로 제작한 머리를 올린 형상이다.

 

 

 

 

* 도산서원: 안동을 방문하면 꼭 가봐야 할 곳이다.

 

 

 

 

 

▲ 청량산 청량폭포: 등산로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청량폭포가 있었다.

 

 

 

 

▲ 청량사: 청량사는 신라 문무왕 3년(663)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유서 깊은 사찰이다.

 

 

 

 

# 어제는 물귀신, 오늘은 고기귀신의 유혹에 넘어가다!

즐겁게 청량산 산행을 마치고 난 후, 필자가 다시 베이스캠프로 돌아왔을 때는 저녁 경이었다. 그런데 내 베이스캠프 옆쪽에 승용차와 함께 작은 텐트가 하나 쳐져 있었고, 수염을 기른 어떤 아저씨가 분주하게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삼겹살을 굽는지 고소한 냄새가 솔솔 내 코를 자극시켰다. 어제는 물귀신이 나를 유혹하더니만 오늘은 고기귀신이 나를 유혹하나?

"자전거여행 다니시나 봐요? 여기 와서 같이 식사 하시겠어요?"

서울에서 봉화군으로 귀농을 하셨다는 분이셨다. 자신도 젊었을 때 자전거여행을 많이 다녔던 터라 자전거 여행족들의 마음을 잘 안다고 했다.

"아참, 아까 저 아래에서 쓰레기를 줍던데..."
"그거요. 제가 먹은 건 아니고요. 그냥 보기 흉해서 제가 환경미화 좀 했죠."
"아, 역시 그랬구나! 진짜 자전거여행 하는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르단 말야."

별 뜻 없이 쓰레기를 주었을 뿐인데, 그 덕에 난 푸짐하게 삼겹살과 술을 얻어 마실 수 있었다. 착한 일을 해서 내가 상을 받았던 것일까? 그 귀농아저씨도 그날 같이 캠핑을 했다. 젊은 시절 캠핑을 자주했던 분이라 귀농 이후에도 종종 캠핑을 해오셨다고 한다.

 

 

 

 

 ▲ 청량산 도립공원 주자창: 필자가 청량산을 방문했을 때는 장마철이라 그랬는지 주자창이 텅텅 비어 있었다.

그래서 필자는 최고의 캠핑을 즐길 수가 있었다.

 

 

 

 

 

 

 * 청량사: 청량사는 경사면에 위치해 있어서 그런지 계단이 많은 사찰이었다. 한편 청량사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사찰이었다. 잘 정돈된 사찰이라고 할까?

 

 

 

 

 

# 명당자리였던 청량산 베이스캠프

 

"그 팔각정 명당자리에요. 그 자리 내가 좋아하는 자리인데..."

알고 보니 내가 아저씨의 명당자리를 '선점'하고 있었던 것이다. 청량산 등반에서 오는 피로감에다 푸짐한 저녁 식사까지 대접받았더니 노곤함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날은 자리에 눕자마자 그냥 눈이 감겼던 것 같다.

다음날.
그토록 예쁘게 안개가 낀 산을, 난 난생처음 보았다. 낙동강에서 피어오르는 안개가 청량산 봉우리들을 휘감고 있는 모습은 장관중의 장관이었다. 마치 한 폭의 진경산수화를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 맛에 강변 캠핑을 하는 거구나!

그렇게 진기하고 재밌는 에피소드들을 뒤로 하고 나는 계속 자전거여행을 이어갔다. 외롭고 힘든 길이었지만 아름다운 우리나라를 마음껏 느낄 수 있었으니, 난 행운아였던 셈이다.

 

 

 

 

▲ 차 한 잔: 청량사 같은 고즈넉한 사찰에서 느긋하게 차를 한 잔 마시고 싶다!  

 

 

 

 

 ▲ 청량사 청량사 석탑

 

 

 

 * 청량사 전통 찻 집: 저런 곳에서 풍경 소리를 들으며 차 한 잔 마시면 얼마나 좋을까?

 

 

 

 

 

 

▲ 청량사: 청량산 중턱에 있는 청량사. 사찰 한 가운데에는 석탑과 함께 부처님이 계셨다.

 

 

 

 

 

* 청량사: 보기만 해도 시원한 곳에 부처님이 계셨다!

 

 

 

 

 

# 청량산 베이스 캠프 완성

 

 

그러면서 손수 커피 한 잔을 타서 내게 건네주었다. 역시 아웃도어를 하는 사람이라서 그런지 다르긴 다른 듯싶었다.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 자칫하면 숙소도 못 잡고 노숙을 할 판이었는데 말이다. 시골 인심에 아웃도어 인심까지 더해진 행운이었다.

가로등 불빛에 의존하여 그 직원이 알려준 곳을 찾아갔다. 그 곳은 팔각정 같은 곳으로 나무 의자와 테이블을 설치해두고 있었다. 좋은 풍광을 바라보면서 도시락을 먹으면 딱 좋을 것 같은 장소인 듯싶었지만 내 시야는 가로등 불빛 너머를 넘지 못했다. 그래서 어둠 속에서 주위 풍광만 지레짐작 할 수밖에 없었다. 난 서둘러 의자와 테이블을 한 쪽으로 몰아 텐트 칠 공간을 마련했다. 그것들이 돌처럼 무거워서 힘을 좀 쓴 후에야 그럭저럭 비가 들치지 않을 정도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런 우여곡절을 겪은 후에야 드디어 나의 '청량산 베이스캠프'가 완성될 수 있었다.

 

 

▲ 청량산 하늘다리: 저 하늘다리를 건너는 것만으로도 스릴이 넘친다.

다리를 건널때 강력한 횡풍이 불면 그 스릴감은 공포감으로 바뀔 수도 있으니 조심하시길!

 

 

 

▲ 청량산 하늘다리: 선학봉과 자란봉을 연결하는 청량산 하늘다리는 해발 800m 고도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바람이 세차게 분다. '바람의 계곡'에 하늘다리를 걸어놓은 셈이다

 

 

 

 

청량산 하늘다리에서 스릴을 즐기다!

다음날. 시계를 보니 오전 10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정신없이 잠에 빠져 있었는지 늦잠을 잔 것이다. 세면을 하고 난 후에 어제 내가 '물아일체'를 했던 곳을 찾아보았다. 기억을 더듬어 그 곳을 찾았는데, 자세히 보니 거기는 좀 움푹 파인 곳처럼 보였다. 선녀탕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대충의 틀은 나왔다. 그래서 난 내식대로 이름을 지어보았다. 신선탕으로.

그런데 신선탕 주변에 쓰레기가 눈에 띄는 게 아닌가! 누군가가 먹다 남은 술병과 안주거리들을 그대로 놓고 간 것이다. 어제밤에는 어두워서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었다. 난 좀 짜증이 났다. 자연은 가만히 있는데 사람들이 와서 '유명관광지 티'를 내고 갔기 때문이었다. 어떤이들이 '유명관광지 티'를 내던 곳에서 난 좋다고 물아일체를 했던 것이다. 화가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청량산까지 와서 등산을 하지 않고 그냥 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자전거와 텐트를 잘 놓아두고 등산 버전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등산을 하기 전에 신선탕 근처에 있는 쓰레기들을 수거하고 갔다. 내가 전날 물아일체를 했지만, 한편으로는 풍기문란도 했기에 그 벌로 환경미화를 자청했던 것이다. 내가 재미있게 즐겼던 만큼 남들도 재밌게 놀 수 있게 뒷정리를 깨끗이 하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는가!

청량산도 국립공원 클럽의 물망에 오를 정도로 절경을 뽐내는 산이다. 낙동강 상류와 어우러진 청량산의 모습은 수려한 경관을 자랑한다. 또한 산 중턱에 있는 청량사에 가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부처님도 만나 뵐 수 있다.

한편 청량산에는 하늘다리가 있다. 그 곳에 서면 자신의 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산바람이 세게 분다. 스릴을 느끼고 싶지만 번지점프를 할 용기가 나지 않는 분들은 청량산 하늘다리를 걸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필자가 구름다리를 통과할 때, 갑작스럽게 돌풍이 불었는데 '삐그덕' 소리를 내면서 다리가 요동을 쳤다. 스릴 만점이었다.

 

 

▲ 래프팅: 낙동강 상류는 물살이 급해 래프팅을 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실제로 청량산 도립공원 인근에는 래프팅 업체들이 산재해 있었다.

 

▲ 청량사 산들이 병풍처럼 주위를 둘러싸고 있지만 부처님이 계신 곳은 주위가 확 트여 있어, 풍광이 시원스럽다.

 

 

 

* 무량사 극락적, 오층석탑, 석등: 귀중한 유물 세 개가 동시에 일렬로 서 있는 모습이 무척 이채롭다.

 

 

 

*부여의 단풍

 

 

 

 

---> 전편에 이어

 

 

# 대조사의 석조관음보살입상

 

 

장하리를 떠난 답사단은 임천면 대조사로 향했다.

대조사는 부여 천도를 위한 밑돌 역할을 해주는 중요한 사찰이었다. 백제 성왕이 천도를 앞두고 직접 대조사의 창건을 명했다고 하는데, 사찰터를 지목한 사람은 유명한 백제의 고승 겸익이라고 한다. 겸익은 성왕의 명을 받고 인도로 직접 가서 범어를 배우고 돌아온 최초의 백제 승려였다. 성왕이 직접 창건을 명하고, 겸익이 그 사찰의 터를 지목하였던 만큼 사비시대의 대조사는 의리의리 했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하지만 현재의 대조사는 어마어마한 사찰이 아니다. 대조사가 있는 임천면 성흥산에 올랐을 때의 첫 느낌은 ‘뭐야 왜 이렇게 작아’였다. 우리동네 관악산에 있는 사찰보다도 더 작은 대조사였다. 물론 사찰을, 물리적인 공간의 크고 작음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성왕과 겸익이 창건에 힘을 썼다면서? 공주에서 부여로 천도하는데 신호탄과 같은 역할을 했다면서...

 

 

 

# 고려 초기 석불: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하지만 그런 ‘외소 콤플렉스’를 일거에 날려버릴 석불이 있었다. 바로 석조미륵보살입상이다. 석조관음보살입상은 무려 10미터가 넘는 큰 키를 자랑하는 ‘거인’과도 같은 풍모였다. 얼핏 보면 우스꽝스러운 외모를 가지고 있는데 인체비례로 따지면 4등신에 가깝다고 한다. 또한 얼굴은 어찌나 큰지 ‘얼큰이’ 같았다. 머리에 쓴 네모난 관도 매우 특이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정교성보다는 투박함이, 조화미보다는 개성이 넘치는 석상이었다.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고려 초기의 작품이다. 옆 동네 논산 관촉사에 있는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도 고려 초기의 작품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그럼 왜 고려 사람들은 선이 굵으면서, 개성이 넘치는 이런 큰 석불을 제작했을까? 이전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의 사람들보다 정교성이나 세공 기술이 떨어져서 이런 식으로 석불을 제작을 했단 말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고려시대 사람들의 기술력이 떨어져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대조사 석조관음보살입상은 당시 그 지역, 중부지방 일원의 민간신앙이 접목된 석불이었다. 마치 큰 장승을 세운 것처럼 석불을 조각했던 것이다. 마을의 수호와 안녕부터 개인적 기복까지 다 받아주는 수호신과 같은 ‘키다리 아저씨’를 제작했던 것이다. 삼국시대 귀족불교에서 출발한 불교문화가 통일신라를 거친 후 고려 초기 시대에 각 지역의 민간신앙과 어떤 식으로 접목이 되었는지 탐구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한편, 재미있는 것은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약 18미터)보다 키가 작을지 모르지만 보물로 재정된 순번은 더 빠르다는 것이다. 대조사 석불이 보물 제217호이고, 관촉사 석불이 보물 제218호다.

 

대조사는 경내가 작지만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 있어 큰 사찰이 됐다. 10미터가 넘는, 그것도 천년의 세월을 이겨내며 꿋꿋이 성흥산 일대를 굽어보는 석불이 있는 사찰이 작다고 표현을 하면, 그거 큰 실례일 것이다. ‘대조사는 아담하기에 차분하게 경내를 둘러 볼 수 있어 좋았다. 큰 대조사 석불이 있어 작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렇게 바꿔서 표현할 수 있겠다.

 

 

 

 

* 대조사 석조관음보살입상: 멀리 아래쪽에서 찍어봤다.

 

 

 

* 대조사의 건물들과 석조관음보살입상: 대조사는 경내가 작은 사찰이었다. 하지만 석조관음보살입상이 있어 결코 작은 사찰이 아니었다.

 

 

 

 

 

 

이제 일행은 무량사로 향했다. 무량사는 외산면 만수산에 위치해 있다. 무량(無量)사의 뜻은 셀 수 없다는 뜻이다. 세월도, 돈도, 삶조차도 셀 수 없다는 것이다. 그 곳 무량사에 들어서면 셀 수 없단다. 무량사를 탐방했을 때가 11월 3일이라 세상은 이미 늦가을에 접어들었다. 그래서 저 강원도 지역은 이미 단풍철이 지났다고 했다. 하지만 무량사는 늦가을의 정취가 남아 있었다. 올 가을은 단풍놀이다운 단풍놀이를 못하고 넘어가나 했더니 무량사에서 단풍을 제대로 구경했던 것이다. 문화재 관람과 단풍놀이를 동시에 즐겼던 셈이다. 이래서 사람들이 우리문화답사 여행을 떠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문화 유적을 탐방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대자연의 정취에 녹아들기 때문이다. 그만큼 우리 선조들이 만든 유물과 유적은 자연의 조화를 중시해 제작을 했다는 뜻이다.

 

 

 

# 방랑시인 김시습의 흔적이 곳곳에 베어든 천년 고찰 무량사

 

무량사는 생육신 매월당 김시습이 말년을 보낸 곳으로 유명하다. 세조에 의해 단종이 폐위된 사건을 보고 천재 시인 김시습은 세상을 등지고 정처 없이 유랑길에 나선다. 그렇게 유랑생활을 계속하다 말년에는 이곳 무량사에 머무르게 되고, 결국에는 병환으로 서거하게 된다. 그때가 그의 나이 59세였다.

 

이렇듯 무량사는 김시습과 관련된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다. 그 유명한 무량사 극락전의 편액을 김시습이 직접 썼다고 한다. 당시 극락전은 수리를 하고 있었는데, 마땅히 시주할 것이 없었던 김시습은 글씨로서 시주를 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편액 글씨로서 재능 나눔을 했던 셈이다.

 

김시습의 유려한 서체가 빛나는 극락전은 외형도 참 웅장하다. 외부에서 보면 2층 기와집인데 안으로 들어가면 1층이다. 위아래를 터버려서 하나의 층으로 만든 것이다. 그래서 극락전 내부에 모셔진 소조아미타여래삼존상도 키가 크다. 본존인 아미타불상이 무려 5.4미터라고 하는데 동양 최대 규모라고 한다. 극락전 외부가 크고 웅장한 만큼 내부의 삼존불상도 크고 화려했던 것이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무량사는 2층 전각 구조를 가졌다. 극락전은 조선 중기 시대에 재건축되었는데 다층 구조를 가진 건축물은 충북 보은의 법주사 팔상전이 유명하다. 억불 정책에 의해 불교를 탄압했던 조선에서 크고 웅장한 다층 구조의 사찰 건축물이 들어섰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고 한다. 임진왜란에 참전한 승병장들의 활약으로 인해 천대받던 불교가 다시 주목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곡창지대에 있는 사찰들을 중심으로 큰 건축물들이 들어서게 됐다고 한다. 전북 김제 금산사 미륵전, 전남 구례 화엄사 각황전, 충북 보은 팔상전 등이 대표적이다.

 

 

 

# 무량사의 자랑: 무량사 오층 석탑

 

무량사에서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무량사 오층석탑이다. 오층석탑은 차곡차곡 쌓아 올려진 모습이 인상적이다. 한층 한층 올라가지만 안정감을 잃지 않은 모습이 인상적이다. 7미터 이상으로 쌓여 올린 탑은 고려 전기의 작품이라고 한다. 같은 시기에 제작된, 앞서 본 장하리 삼층석탑과는 좀 다른 인상이 느껴진다. 이런 장중하면서 안정감을 강조한 오층석탑이 무량사 극락전 앞에 서있다.

 

또 오층석탑 앞에서는 석등이 하나 서있다. 일명 무량사 석등이다. 이 역시 고려 초기의 작품이라고 한다. 석등을 맨 앞으로 하여, 오층석탑과 극락전이 연이어 서있는 모습은 무척 인상적이다. 귀중한 우리의 문화유산들이 조밀한 공간에 세 개나 있다는 건, 보는 이에게 새 배 이상의 기쁨을 선사할 것이다.

 

답사는 외산면 반교마을과 홍산면 홍산관아 탐방으로 이어졌다. 반교마을은 돌담길이 잘 정비된 곳인데 현재 유홍준이 ‘휴휴당’이라는 집을 짓고 실제로 살고 있는 곳이다. 유홍준은 자신이 반교마을 청년회 회원이라고 힘주어 말해 답사객들의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홍산관아는 옛 관아의 원형이 비교적 잘 남아 있는 곳이다. 관아는 고을의 수령이 직무를 보던 곳으로 지금의 군청이나 읍사무소의 역할을 했다. 대신 조선시대 수령들은 사법권도 행사하고 있었기에 관아에는 자체적으로 감옥도 갖추고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전국에 330여 곳에 관아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친 후 관아들은 다 파괴되거나 원형을 잃게 된다. 그나마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한 관아가 바로 홍산현 관아라는 것이다.

 

홍산관아 탐방을 끝으로 하루 동안의 짧은 부여 답사여행이 끝이 났다. 좀 더 둘러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다음 기회를 기약해야 했다. 하긴 한 번 오고 다시 부여에 안 올 텐가?

 

이렇게 좋은 답사여행을 준비해주신 유홍준 선생님과 눌화출판사에 감사를 드린다. 유홍준 선생님은 우리나라 문화 답사의 붐을 일으킨 주범(?)으로서 앞으로도 더 많이 답사여행 가이드에 나서주셔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책에 기술된 유적 앞에서 독자들을 위해 마이크를 든 저자 유홍준의 모습은 참 행복해보였으니까!

 

 

 

 

 

* 무량사 극락적, 오층석탑, 석등: 차례로 위치해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무량사 극락전: 조선 중기에 다시 지어졌다고 한다. 외부에서는 2층으로 보이나 사실은 천장이 높은 1층이다. 층간을 터버려서 내부는 1층으로 만든 것이다.

 

 

 

*무량사 오층석탑: 한 층, 한 층 올려진 모습이 안정감 드러낸다. 고려 초기 작품으로 백제와 통일신라 기법이 어우러진 석탑이라고 한다.

 왼쪽 하단에 있는 꼬맹이 녀석은 오층석탑이 좋은지 탑돌이를 하는 것 같다.

 

 

 

 

 

*홍산 관아 객사: 조선시대에는 전국 팔도에 330여 고을이 있었고, 그 고을마다 관아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관아들은

거의 다 사라져 갔다. 홍산현 관아는 비교적 원형복원이 잘 된 곳이라고 한다.

 

 

 

 

 

* 홍산현 관아 객사: 조선시대 객사에는 임금과 궁궐을 상징하는 궐패가 안치되었다고 한다. 수령은 임금을 대신하여 고을을 다스리기에 그에 걸맞은 징표를 객사에 두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객사는 수령이 근무하는 동헌보다 더 격이 높은 곳이라고 한다. 한편 동헌은 객사의 동쪽에 있다고 해서 동헌이라고 불린다.

 

 

 

 

 

 

 

 

 

 

 

 

* 대조사석조관음보살입상과 답사객: 이 사진을 통해서도 대조사 석불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석불 뒤쪽으로 길이 있어 바로 옆에서 석불을 볼 수 있다. 또한 소나무가 석불과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 무척 이채롭다.

 

 

 

 

 

* 장하리 삼층석탑: 석탑 바로 옆이 민가라 그런지 마을아주머니가 탑 주변에서 작업을 하시고 계셨다.

 

 

 

 

---> 전편에서 계속

 

 

 

충청남도 부여는 백제의 3번째 수도였다. 일명 <개로왕 국서>라 불리는 문서로 인하여 고구려 장수왕에 의해 한성이 함락되고 백제왕이 죽는 참극이 일어났는데 그 때가 서기 475년, 개로왕 즉위 21년이었다. 국왕이 죽고, 수도가 함락된 백제는 허둥지둥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천도를 한다. 그때부터 웅진 백제시대라고 하는데, 웅진 시대는 서기 475년부터 538년까지 약 63년간 지속된다.

 

부여로의 천도는 26대 성왕 시기에 이루어진다. 성왕은 국호를 백제에서 남부여로 바꾸고 국가의 부흥을 도모하게 된다. 급기야 웅진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의 천도가 이루어지기까지 했다. 그 시기를 일컬어 사비시대라고 한다. 서기 538년부터 백제가 멸망한 660년까지를 말하는데 약 122년에 걸쳐 사비시대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부흥을 위해 천도된 곳에서 백제는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을 당해야 하는 비운을 겪게 된다.

 

역사의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백제가 멸망하고 난 후 부여는 그저 중앙권력에서 벗어난 변방에 불과했다. 그건 공주도 마찬가지였다. 경주 -> 개경 -> 한양으로 중앙권력이 이동을 했지만 부여와 공주는 옛 백제 땅으로만 기억될 뿐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런 중앙에서 비켜난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에 현재의 부여와 공주는 문화유산 답사를 하기에 상당히 호조건에 있다. 호젓하게 문화유적 답사를 하고, 느긋하게 트래킹도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데 역사의 현장도 ‘새옹지마’가 될 수 있는 것일까?

 

 

 

 

*부여의 단풍

 

 

 

* 유홍준: 무량사 경내에서 무량사의 연혁과 김시습에 대한 설명을 답사객들에게 하고 있다.

 

 

 

 

 

 

 

 

여행의 일정은 다음과 같았다.

 

국립부여박물관(정림사터) 집합 -> 장암면 장하리 삼층석탑 -> 임천면 대조사 -> 외산면 무량사 -> 반교마을 -> 홍산관아 -> 국립부여박물관 입구

 

오전 9시부터 진행된 답사는 오후 5시가 되서야 끝이 났다. 일명 '유구라'라고 불리는 유홍준 선생의 입담은 직설적이면서도 구수했다. 막힘이 없는 달변을 구사했고, 주제 전달력도 상당히 뛰어났다. 자연스럽게 청중의 집중을 이끌어 냈다면 그거 여행가이드로서 최고의 능력 아닌가? 이런 분이라면 여행의 주도권을 내놓아도 상관이 없지.

 

첫 도착지인 장하리 삼층석탑은 장하리 마을 언덕에 세워진 고려시대 석탑이다. 그 유명한 정림사지 오층 석탑의 '3층석탑' 버전으로 보이는 이 석탑의 축조 시기는 고려 전기라고 한다. 장하리 삼층석탑은 ‘늘씬함’을 드러내지만 정교함을 잊지 않은 모습이었다. 사비 백제시대 축조된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롤모델로 삼은 탑이지만 그냥 무턱대고 베끼지는 않은 듯싶었다. 백제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 초기의 탑 축조 기술이 서로 어우러져 장하리 삼층석탑을 만들었던 것이다.

 

한편 옛날에는 삼층석탑 자리 옆에 한산사라는 사찰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 한산사는 사라지고 삼층석탑만이 홀로 남아 웅장했을 옛 사찰의 기억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것은 정림사 오층석탑도 마찬가지다. 현재 정림사도 절터만 남아 있고 오층석탑만이 웅장했을 정림사의 옛 모습을 유추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고보면 사찰은 사라져도 석탑은 남아 있게 되는 것 같다. 돌은 그냥 남아 있는 것 같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이스턴 섬의 이스턴 석상이나 영국의 스톤 헤지가 항상 그 자리에 그렇게 서있는 것처럼 말이다.

 

 

 

 

 

* 반교마을: 유홍준 선생의 반교마을 집의 이름은 '휴휴당'이다. 그 대문을 지키고 있는 백소나무가 눈길을 끈다. 얼핏보면 저 백소나무가 비실비실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런 나무들이 꿋꿋하게 오래간다고 한다. 자신의 응축된 에너지를 잘 간직하고 있다가 제때에 방출한다는 것이다. 오버하지도 않고, 건방을 떨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에너지를 발산할 때는 발산을 하여 한뼘 한뼘 자신의 가지를 키운다고 한다. 괜히 자기 잘난 맛에 취해 자신의 에너지를 한꺼번에 쏟아 놓고 사멸해 가는 인간들에게 좋은 교훈을 주는 나무인 것 같다. 인생은 한 방 인가? 그건 모르겠고. 최소한 나무의 인생에서 한 방은 무척 위험한 것이다.

 

 

 

* 부여의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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