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티투어? 아니... 서울시티트레킹!  2편

자신의 두 발로 가는 서울 명소탐방

 

 

 

 



광화문은 경복궁의 남문이자 정문이었다. 경복궁이 조선의 법궁이었던 만큼 광화문은 다른 궐문보다 훨씬 더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다. 광화문은 석축을 쌓고 중앙에 홍예문(무지개문)을 셋이나 내서 격식을 높였다.

궁궐은 '궁'과 '궐'이 합쳐진 말인데 '궐'은 높은 석대 위에 누각을 세운 것을 말한다. 지금은 경복궁 돌담과 떨어져 있는 동십자각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 일반적인 궁궐의 의미에 빗대어 보자면 광화문은 조선시대 궁궐 정문 가운데 유일하게 궐문 형식을 가지고 있다.

경복궁은 조일전쟁(임진왜란) 때 불에 타고 만다. 광화문 앞에 화기를 막으려고 세운 해태상이 있었음에도 불에 전소되었던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자 선조는 궁궐을 버리고 몽진(임금의 피난)을 하게 되고, 이에 격분한 백성들은 궁궐로 몰려간다. 그중 노비 신분에 있던 사람들은 장예원에 불을 놓는다. 장예원에 노비문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장예원에서 일어난 불길은 사방으로 퍼져나가 경복궁 전체가 화마의 피해를 입었던 것이다. 아무리 해태상을 세운다고 한들, 강력한 소방시설을 갖춘다고 한들 성난 민심 앞에서는 그저 무용지물이었던 것이다.


 

 

 

 

 

 
▲ 광화문 수문장 교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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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조선의 정기를 끊기 위해 광화문을 헐어 동쪽으로 옮겨 버렸다. 그 자리에는 한용운 선생이 '돌집'이라고 불렀던 조선총독부가 들어섰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광화문은 2010년 8월에 완공된 것이다. 1968년에 중수를 하게 되는데 그때 제대로 복원을 하지 못했다. 당시 중앙청으로 쓰이던 구 조선총독부 축에 맞춰 중수를 했는데 그 때문에 본래보다 3.5도 가량 틀어졌던 것이다.

그런 오류를 바로잡고 거듭난 광화문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공간이 되었다. 수문장 교대식 때문이다. 바람에 펄럭이는 큰 깃발과 화려한 복식을 한 수문장들의 박력 있는 모습을 보기 위해 국내외 관광객들이 광화문으로 몰려들고 있다.

사직단은 경복궁에서 서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인 서촌에 자리를 잡고 있다. 사직단은 토지의 신인 '사'와 곡식의 신인 '직'에게 제례를 올리기 위해 마련된 장소다. 경복궁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종묘, 서쪽으로는 사직단이 자리 잡은 것이다. 이런 배치는 <주례고공기>에 의한 것이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설계한 사람은 정도전이었다.   

 

 

 

# 인왕산과 서울성곽


사직단이 있는 서촌까지는 요즘 유행하는 동네걷기와 별 차이가 없다. 포장도로를 걷기 때문이다. 서울성곽이 있는 인왕산 코스에 가야 트레킹다운 트레킹을 할 수 있다.

약 18km에 달하는 서울성곽은 조선의 도성이었다. 북쪽의 백악산(북악산)을 기준으로 동쪽에 낙산, 서쪽에 인왕산, 남쪽에 목멱산(남산)을 둘러서 만든 성곽이다. 이 산들을 묶어 내사산이라 부른다. 북악산은 원래 백악산이라 불렸는데 일제 강점기에 '북악'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고 한다. 그런 도성에는 4대문이 있는데 남쪽에는 숭례문(남대문), 동쪽에는 흥인지문(동대문), 북쪽에는 숙정문, 서쪽에는 돈의문(서대문)이 있었다. 하지만 현재 서대문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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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성곽 서울성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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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에 올라서면 성곽과 함께 고층빌딩으로 둘러싸인 서울 시내가 보인다. 내사산이 둘러싸고 있는 서울 중심부다. 이를 두고 필자는 '작은 서울'이라 칭했다. 그럼 '큰 서울'은 어딘가? 서울의 주산인 북한산을 기준으로 남쪽으로는 관악산, 동쪽으로는 아차산(용마산), 서쪽으로는 덕양산(행주산성)을 두고 외사산이라 부르는데 그 외사산의 안쪽 지역을 '큰 서울'이라고 불렀다. 서쪽 지역만 빼놓고는 지금의 서울 행정권역과 얼추 비슷하다. 한양천도 이후, 서울의 확장은 계속됐지만, 지형적인 굴레까지 뛰어넘지는 못했던 것이다.

서울성곽은 자연적 지형을 이용하여 방어요새를 구축했다. 산사면의 급경사를 이용하여 적의 침략을 대비한 것이다. 한마디로 매우 급한 경사면에 성곽이 구축됐다는 뜻이다. 이를 달리 해석하면 서울성곽길은 걷기가 만만치 않다는 결론이 나온다. 걷다 보면 발바닥에 불이 난다는 뜻이다.

하지만 간혹 서울성곽길을 좀 만만하게 보는 분들이 있다. 우리 역사트레킹팀에도 그런 분이 있었다. 사전에 미리 공지를 올렸는데도 어떤 분께서 하이힐을 신고 오셨던 것이다. 트레킹 인도자로서 참 난감했다.

"읔! 제가 분명히 편한 복장에 편한 신발을 신고 오라고 당부드렸는데요."
"앞에는 그냥 평지고, 서울성곽길 걷는다면서요…."

 

 

 

 

 
▲ 서울성곽 '시간 퇴적층'이 새겨진 서울성곽 돌덩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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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힐을 신고 오신 분도 끝까지 완주를 했다. 정말 다행이었다. 물론 필자는 무척 조마조마했지만….

서울성곽은 여러 번에 걸쳐 개축됐다. 조선 초기에는 토성이었고, 이후에는 주위에 있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축성됐다. 그러다 조선 후기 숙종시대에는 두부 모양의 장대석이 쌓아올려지게 된다. 이후 박정희 정권 시대에 또 한 번 개축된다.

이렇듯 서울성곽은 시간의 흐름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마치 600년이란 시간이 퇴적층처럼 돌들에 새겨져 있는 것 같다. 아랫돌은 옛날에 쌓여 '누릿누릿'한데 그 이후에 축성된 돌들은 하얀색이다. 윗돌과 아랫돌이 시각적으로 '시간 퇴적층'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 서대문형무소와 독립문


역사트레킹팀은 마지막 탐방지인 독립문과 서대문 형무소로 이동했다. 독립문은 잘 아시다시피 독립협회에서 자주 국권을 상징하기 위해 세운 문이다. 독립문은 영은문을 헐고 지은 문이다. 영은문은 청나라 사신을 접견하기 위해 만든 문이었다.

독립협회가 주장한 '자주독립'은 분명 한계가 있었다. 러시아에 대한 독립의지는 확고했으나 일본이나 미국에 대해서 무척 관대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이권침탈에는 목소리를 높이며 반대했으나 일본의 이권 침탈에는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던 것이다.

 

 


 

 
▲ 독립문 독립문을 탐방하는 서울시티트레킹 참가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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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형무소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해 드리지는 않겠다. 너무나 잘 아시는 곳이겠기에 굳이 필자가 따로 언급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대신 이 말은 하고 싶다.

"그들이 꿈꾸는 세상, 조국 독립을 위해 온몸을 바쳤던 그들이 꿈꾸던 세상을, 현재 우리는 살고 있는가? 아베 총리의 우경화에 핏대 높여 반대를 하면서 식민지근대화론 같은 얼토당토않은 이야기가 끊임없는 나오는 나라를 그들은 꿈꾸었을까? '친일청산은 소련의 지령'이라고 공개적으로 언급한, 친일 매국노의 후손이 KBS 이사장을 맡는 현실을 그들은 꿈꾸었을까?"

 

 

 


 

 
▲ 서대문형무소 서대문형무소에 걸려 있는 대형태극기! 저곳에서 피를 흘리고 목숨을 잃었던 분들이 꿈꾸었던 세상을, 지금 우리는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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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움말

1. 서울시티트레킹 코스: 조계사(우정국) ▶ 위안부 소녀상(일본대사관 앞)▶ 광화문(경복궁) ▶사직단(북촌)

▶ 인왕산(서울성곽) ▶ 서대문 형무소 ▶ 독립문

2. 약 6km 정도 밖에 되지 않지만 탐방할 것들이 많아 3시간 이상 소요될 것으로 보임.

3. 시작점: 지하철 1호선 종각역에서 하차 한 후 조계사로 이동. / 종료점: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이용.

4. 이 코스는 지도상으로만 존재하는 곳이다. 따로 표식작업이 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길 찾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스마트폰을 가지고 계신다면 지도검색을 통해 해당 탐방지들을 찾아갈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서울시티투어? 아니... 서울시티트레킹!  1편

 

자신의 두 발로 가는 서울 명소탐방

 

 

14.10.12 17:56   최종 업데이트 14.10.12 17:56

 

 

 

 

 

 

 

 

 

 
▲ 광화문 취라척. 장악원(궁중에서 음악과 무용을 담당하는 관청) 소속의 취라척. 수문장 교대식에서. 뒤에 보이는 산은 인왕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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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천도한 지 620년이 되는 해다. 그때가 1394년이었으니, 조선을 개창한 지 겨우 2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기였다. 당시는 궁(경복궁)도 완성되기 전이었다. 그만큼 천도는 다급하게 이루어졌다. 개경에 남아 있는 친(親) 고려 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해 도성의 틀도 갖춰지기 전에 남행을 한 것이다.


2대 왕 정종 때 다시 개경으로 천도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지만 이후 한양은 조선의 도읍으로 굳건하게 자리를 잡는다. 그만큼 서울은 유서 깊은 도시다. 그런 서울을 알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지도 한 장을 들고 서울 구석구석을 누비는 외국인들. 당장 광화문이나 시청 쪽으로 나가보시라. 수많은 외국인들이 카메라에 서울 곳곳을 담고 있으니….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 한국 사람인 우리는 서울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는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서울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필자는 역사트레킹을 실시하기로 했다. 서울 한복판에서 행하는 일명 서울시티트레킹.

서울시티트레킹은 '서울시티투어'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 가면 서울시티투어 버스를 탈 수 있는데 이 버스를 타면 서울을 편안하게 돌아볼 수 있다. 또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2층 버스도 있다. 물론 서울시티투어 버스를 타고 이동을 하면 좋겠지만 서울 구석구석을 돌아보려면 역시 자신의 두 발로 걸어야 한다. 그래야 진짜 제대로 볼 수 있다. 서울성곽이 있는 인왕산 정상에 버스를 타고 올라갈 수는 없지 않은가!

 

 

 

 
▲ 서울시티투어버스 서울시티투어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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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대사관 앞을 당당히 지키고 서 있는 위안부소녀상

 


지난 9월 28일. 서울시티트레킹은 조계사와 그 옆쪽에 자리 잡고 있는 우정국 탐방에서부터 시작된다. 우정국은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개화파가 갑신정변(1884년)을 일으킨 곳이다. 일명 '3일 천하'로 불린 갑신정변은 임오군란(1882년)과 함께 개화기에 발생한 중요한 사건이다.

정변 주동자들의 의견과 너무나 큰 간극을 보였던 당시의 조선 상황, 정변 당사자들의 과도한 일본 의존 등으로 갑신정변은 '그들만의 리그'로 막을 내렸고, 주동자였던 김옥균은 중국 상해에서 암살을 당하고 만다. 정변 주동자들은 일본을 맹주로 한 '대동합방론'과 아시아에서 벗어나자는'탈아입구(脫亞入歐)'를 외친 후쿠자와 유키치의 충실한 모범생들이었다. 그들은 조선에 메이지유신을 '이식' 시키려고 했지만 실패를 하고 만 것이다.

갑신정변이 발생한 곳인 우정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일본대사관이 있고, 그 앞에는 위안부소녀상이 꿋꿋하게 자리 잡고 있다. 1992년부터 개최된 수요집회는 2012년에 1000회를 맞이하게 됐고, 그 기념으로 본 위안부소녀상이 건립되었다.

일본발 외신기사에서 보듯 일본 아베 정권의 우경화는 급속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지난 7월 1일 자위대 창설 60주년 기념에 맞춰, 헌법해석결정으로 집단적자위권이 승인됐다. 현실적으로 전쟁을 금지한 평화헌법 9조를 개헌을 통해 수정하기가 어려워, 각의결정이라는 우회로를 써서 자위대에 집단적 자위권을 부여한 것이다.

1993년 8월에 있었던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의 '고노담화'도 아베 정권에 의해 크게 흔들리고 있다. 지난 9월 <아사히신문>은 고노담화의 근간이 된 요시다 세이지의 증언을 담은, 자사의 기사에 일부 오류가 있다며 해당 기사를 취소했다. 그것을 빌미 삼아 아베 정권과 우익들은 들불처럼 일어나 손가락질을 해댔다. <아사히신문>과 요시다 세이지의 증언을 기사화한 전직 기자에게 도를 넘는 비난을 가한 것이다.

 

 



 
▲ 위안부소녀상 위안부소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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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 세이지 증언의 큰 골자는 제주도에서 조선인 여성들을 강제로 사냥하듯 위안부로 삼았다는 것이다. 작은 오류가 있을 수는 있지만, 요시다 증언과 수요집회에 선 할머니들의 증언이 큰 간극이 있는가? 백번 양보해서 요시다 증언이 오류를 포함했다고 해도 일본 황군이 위안부를 강제 동원했다는 본질이 전복되는가? 또한 요시다 증언을 담은 30년 전의 <아사히신문> 보도만이 위안부 문제를 다룬 유일한 총체인가?


아베 총리는 요시다 증언 철회를 빌미 삼아 '일본 성노예 강제연행은 중상…'이라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국제여론의 눈치를 보는지 '고노담화는 승계한다'는 이중적인 행보를 보인다. 누구는 위안부소녀상이 외롭고 처량하게 보인다고 한다. 2인용 벤치에 홀로 앉아 있는 모습 때문에 그렇게 본 것이다. 더군다나 일본 정치인들의 끊임없는 망언들을 생각하면 그 외로움이 더 커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필자는 소녀상이 외롭지 않아 보인다. 필자가 소녀상을 방문할 때마다 꽃이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똑같은 꽃이 아니라 매번 다른 꽃이 놓여 있던 것이다. 어떨 때는 과자나 그림 같은 것들이 놓여 있기도 했다. 소녀는 벤치에 홀로 앉아 있지만 혼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친구가 있었던 것이다. 한편 위안부소녀상은 미국 몇몇 도시에도 설치되어 있다.

 

 

 

 
▲ 서울시티트레킹 서울시티트레킹 참가자들. 인왕산 서울성곽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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