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광화문이 옮겨진 이유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쪽에서 촬영한 광화문

 

 

 

광화문은 이른바 뜨는 지역이라는 ‘핫플레이스’를 양쪽으로 거느리고 있다. 오른쪽으로는 북촌, 왼쪽으로는 서촌이 바로 그곳이다. 하지만 광화문은 그 자체로 관광 명소다. 서울을 찾는 관광객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 쯤 광화문 광장을 산책했을 것이다. 또한 누구나 한 번은 수문장 교대식을 바라보며 카메라 셔터를 눌렀을 것이다.

 

이렇듯 광화문 일대는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곳이 됐다. 하지만 예전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형편없는 대접을 받았다. 일제에 의해 훼손됐고, 거기에 더해 본 위치에서 벗어난 곳에 방치되기까지 했다.

 

 

 

‘궁’과 ‘궐’이 합쳐진 궁궐

 

조선시대 궁들 중에서 궁궐이라는 말에 딱 떨어지는 곳은 경복궁이 유일하다. 여기서 말하는 궁궐은 ‘궁’과 ‘궐’이 결합된 말이다. ‘궁’은 다 아실 테니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문제는 ‘궐’인데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분들이 의외로 많다. ‘궐’은 높은 석대 위에 있는 곳으로 감시초소 역할을 하는 곳을 말한다. 중앙에 있는 문을 중심으로 궁벽의 양 옆에 궐이 자리 잡는다. 이렇게 궐이 있어야 온전한 궁궐 칭호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광화문을 정문으로 삼고 있는 경복궁이 유일하게 궁궐의 칭호를 받을 수 있는 것은 광화문과 함께 궐인 동십자각과 서십자각이 배치됐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설명하면, 광화문을 중심으로 북촌으로 가는 동쪽에는 동십자각이 자리 잡고 있고, 서촌으로 가는 서쪽에는 서십자각이 위치해 있었다.

 

 

 

 

 

* 수문장교대식

 

 

 

 

 

* 동십자각

 

 

 

 

광화문과 동십자각

 

현재 동십자각은 도로 한 가운데에 ‘뚝’ 떨어져 나와 있다. 그 동십자각을 사이에 두고 쉴 세 없이 자동차들이 오가고 있다. 외국인 관광객들을 태운 버스들도 많이 오간다.

 

그렇다면 왜 동십자각은 지금처럼 도로 한 가운데 나와 있는 것일까? 당연한 이야기지만 예전에는 동십자각도 경복궁의 담벼락과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 이렇게 담벼락과 떨어지게 됐다. 일제가 조선총독부를 만든다는 목적으로 남쪽의 담벼락을 다 헐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때 광화문도 원래 위치에서 동북쪽, 지금의 민속박물관 부근으로 옮겨지게 된다. 그렇게 담벼락이 헐린 곳에는 철책선이 흉물스럽게 들어서게 된다. 이후 삼청동쪽으로 도로가 건설됐고 동십자각은 현재와 같이 도로 위의 섬처럼 ‘뚝’ 튀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래도 동십자각은 서십자각 보다는 상황이 더 낫다. 서십자각은 아예 허물어졌기 때문이다. 일제는 광화문에서 영추문 사이에 전차노선을 개설했는데 그때 서십자각을 철거했던 것이다. 그나마 동십자각은 실물이 있어 사진이라도 찍을 수 있지만 서십자각은 그 터만 남아 있다.

 

 

 

핫플레이스를 연결하는 핫플레이스

 

수문장 교대식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광화문은 2010년 8월에 완공된 것이다. 1968년에 중수를 하게 되는데 그때는 제대로 복원을 하지 못했다. 당시 중앙청으로 쓰이던 구 조선총독부 축에 맞춰 중수를 했는데 그 때문에 본래보다 3.5도 가량 틀어졌던 것이다. 그런 오류를 바로잡고 거듭난 광화문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공간이 되었다. 앞서 언급한 수문장 교대식 때문이다. 그 수문장 교대식을 보면서 많은 관광객들이 환호와 박수를 보낸다.

 

개인적으로는 동십자각과 서십자각이 온전한 상태로 복원이 됐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그럼 경복궁과 광화문의 권위가 한층 더 살아나지 않았을까. 하지만 너무 안타까워하지 말자. 이 소중한 광화문을 중심으로 북촌도 가고, 서촌도 갈 수 있으니까. 핫플레이스를 연결해주는 핫플레이스인 광화문이 아직 우리 곁에 남아있으니까!

 

 

 

 

* 광화문 해태상

 

 

* 광화문 돌담

 

끊어진 곳에서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하다!

 

홍지문, 동십자각, 광희문... 이 건축물들은 왜 끊어졌을까

 

 

15.04.03 11:15  최종 업데이트 15.04.03 14:58

 

 

 

 

 

 

 
▲ 홍지문 끊겨진 성벽 위로 도로가 닦였고, 그 위로 자동차들이 쌩쌩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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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언가를 항상 연결하고 이으려고 한다. 이쪽과 저쪽을 연결하려고 길을 닦는다. 바쁘다는 핑계로 연락이 뜸했던 지인들과의 인맥을 다시 잇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연결과 이음은 인간의 본성 중에 하나일지도 모른다. 이와 달리 끊김은 회피하려고 한다. 부정적이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때 한강 다리가 끊겨 수많은 피난민이 수장되었다. 상호 간에 왕래가 끊겼다는 것은 서로 소원해 졌다는 뜻이다.


건축물도 마찬가지다. 건축물이 끊겼다는 건 좋은 뜻이 아니다. 그 정체성이 훼손되어 원래의 의미를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런 '끊어진 건축물'들을 소개해보고자 이 글을 작성하였다.

 

 



 
▲ 동십자각 도로 위에 섬처럼 떠있는 동십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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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처럼 떠 있는 동십자각


광화문에서 동쪽, 삼청동 방면으로 가다보면 누각 하나가 '껑뚱'하게 떨어져 나와 있는 것이 보인다. 광화문 인근이라서 그런지 자동차들이 쉴 새 없이 그 앞을 지난다. 외국인 관광객들을 태운 대형 버스들도 많이 지나간다. 도로 한복판에 툭 튀어 나온 누각을 보고 있다 보면 마치 도로 위에 섬이 떠 있는 느낌이 들 정도다.

도로 한복판에 외떨어져 나온 누각은 동십자각이다. 동십자각은 경복궁의 동쪽의 방위 초소 역할을 했던 곳이다. 보통 궁궐은 '궁'과 '궐'이 합쳐진 것을 지칭한다. '궁'은 말 그대로 궁이다. '궐'은 높은 석대 위에 누각을 올려놓은 것을 말한다. 이 둘을 합쳐 '궁궐'이라고 했던 것이다. 만약 '궐'이 없다면 궁궐이라고 하지 않고, 그냥 궁이라고 했다.

광화문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동십자각, 서쪽으로는 서십자각이 배치되었는데 이는 유일하게 궐문 형식을 갖춘 것이었다. 즉 조선의 법궁이었던 경복궁의 위상을 궐문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현재 동십자각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동십자각은 경복궁의 담벼락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럼 왜 지금처럼 끊겨 있는 걸까? 일제에 의해 끊기게 됐다. 일제는 조선총독부를 만든다는 명목으로 경복궁의 남쪽 담벼락을 다 헐어버렸다. 그리고 광화문도 원래 위치에서 멀리 떨어진 동북쪽으로 옮겨버렸다. 지금의 민속박물관 부근이다. 돌담들이 서 있던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게 철책선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구한말에 촬영한 사진을 보면 동십자각에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 계단을 타고 지상으로 오르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계단을 확인할 길이 없다. 한편 동십자각은 감시초소였던 만큼 그 역할은 무척 중요했다. 명성황후를 시해했던 일본인 자객들도 동십자각을 점령한 후 경복궁 내부로 진입했다.

그래도 동십자각은 서십자각보다는 상황이 더 낫다. 서십자각은 아예 허물어졌기 때문이다. 일제는 광화문에서 영추문 사이에 전차노선을 개설했는데 그때 서십자각을 철거했던 것이다. 멀쩡한 광화문을 옮겨버리고, 담장을 헐고, 누각도 철거시키고... 그러고 보면 일제도 반달리즘을 저지른 셈이다. 반달리즘은 로마의 유적들을 파괴했던 반달족들의 반문명적인 행위를 빗댄 명칭이다.

 

 

 


홍지문을 보며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하다

 


조선시대의 도성 방어는 이중 방어 형식을 띠었다. 1차 방어라인은 내사산(북악산-낙산-목멱산-인왕산)이었고, 2차 방어라인은 외사산(북한산-아차산-관악산-덕양산)이었다. 조선 초기, 내사산에는 한양도성이 축조되어 그 방어력을 더 배가시켰다.

이후 숙종 시기에 북한산성의 축조로, 한성 북쪽 지역은 이중방어 체제가 더 공고해졌다. 여기에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는 길이 4km의 성이 만들어졌으니, 이 성을 두고 탕춘대성(湯春大城)이라고 불렀다. 탕춘대성은 성곽이 자리 잡은 곳 인근에 탕춘대라는 돈대가 있어 탕춘대라고 명명됐다고 한다. 탕춘대는 지금의 세검정 초등학교 인근에 위치해 있다.

 

 



 
▲ 홍지문 홍지문과 오간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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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이 들어섰으니 성문도 있어야 했다. 그래서 생긴 것이 홍지문이다. 인왕산 줄기를 타고 내려온 탕춘대성의 성벽은 홍제천에서 홍지문과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으로 그 형태를 달리한다. 홍제천을 건넌(?) 이후에는 가파른 비탈을 타고 북한산 방면으로 향한다.


앞서 탕춘대는 돈대라고 언급했다. 돈대는 경사면을 자르거나, 혹은 채워서 평평하게 만든 것을 말한다. 높은 곳에 위치해 있는 돈대는 주위를 관망하기에 좋다. 그래서 주로 군사시설에 쓰였다. 하지만 탕춘대는 유희 공간으로 쓰였다. 연산군이 세웠던 탕춘대는 앞으로 홍제천이 흐르고, 그 건너편에는 북악산이 위치해 있으니 놀기(?)에 적당한 곳이었을지 모른다.    

홍지문은 동십자각과는 달리 자연재해를 입어 '끊기게' 됐다. 풍유를 즐기게 해주었던 홍제천이 범람하여 홍지문을 비롯한 오간대수문을 싹 다 쓸어버린 것이다. 그때가 1921년이었다. 홍지문과 오간대수문이 다시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된 건 1977년이었다. 56년 동안 방치되어 오다가 다시 그 자리를 찾은 것이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50년이면 세상이 5번이나 바뀔 기간이었다. 그 기간 동안 홍지문은 복원이 됐지만 인왕산 쪽의 성벽은 단절되었다. 그 위로 도로가 생겼기 때문이다.
오늘도 홍지문 옆으로 자동차들이 '쌩쌩' 달린다. 그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면서 머릿속으로나마 옛 모습을 복원해본다. 그 자동차들을 제거하고, 아스팔트도 들어내 본다. 그리고는 그 위로 성벽을 연결하여 끊어진 구간을 연결시켜 본다.

 

 



 
▲ 광희문 도심의 확장으로 인해 '끊겨진' 광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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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확장으로 '끊긴' 광희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가 위치해 있는 곳에서 신당동쪽으로 살짝 코너를 돌면 광희문이 자리 잡고 있다. 사람들 중에는 간간이 광희문(光熙門)과 광화문(光化門)을 혼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광희문'과 '광화문'의 한글 명칭에도 차이가 있듯, 이 두 문은 전혀 다른 개념의 문이다. 광화문은 동십자각 부분에서도 언급했듯이 경복궁의 정문이다. 궁궐의 대문(大門)이라는 말이다. 이에 비해 광희문은 소문(小門)이다.

도성에는 사대문 이외에도 작은 문 4개를 만들었는데 이를 사소문이라고 하였다. 광희문은 숭례문(남대문)과 흥인지문(동대문) 사이에 있다하여 남소문이라 불리기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흥인지문 쪽에 훨씬 더 가깝게 위치해 있다. 그래서 광희문에서 10분 정도 걸어가면 동대문에 닿을 수 있는 것이다.

'빛나는 빛의 문'이라는 명칭과는 달리 광희문은 시체가 나가는 문이었다. 그래서 시구문(屍口門)이라고도 불렸다. 광희문을 나선 장례 행렬은 지금의 신당동과 왕십리로 이어졌는데, 그곳에 공동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 광희문 2014년 2월, 39년 만에 광희문이 개방됐다. 그 전에는 낮은 철책이 쳐져서 문 안으로 출입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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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희문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는 동안 크게 훼손됐다. 현재의 광희문은 1975년에 복원된 것인데 원래 위치보다 남쪽으로 15미터 가량 떨어져 세워졌다. 도로 확장 때문에 제자리에서 벗어나 복원된 것이다.


이와 같이 광희문의 '끊김'은 서울의 확장과 연관이 있다. 도심지가 확장될수록 성벽이 잘려나갔기 때문이다. 잘려나간 성벽 위로는 도로가 닦였다. 집이 지어지기도 했다. 심지어 운동장이 들어서기도 했다.

이제까지 '끊어진' 것들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끊어진' 것들을 알아봤으니 이제는 연결을 해보자. 무엇으로? 역사적 상상력을 이용해서. 눈을 감고 머릿속에서 3D를 그려내어 이곳과 저곳을 연결해보는 것이다.

 


"머리가 돌처럼 굳어 상상력이 떨어졌다고요? 그럼 현장에 가보세요. 유적 앞에서면 없던 상상력도 자연스럽게 떠오를 겁니다."    

 

 

 

덧붙이는 글 |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http://blog.daum.net/artpu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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