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가장 활발하게 기원이 행해지는 곳이 어딜까? 정답은 서울이다. 사람들이 많이 사니까. 잘난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누구나 다 기원을 한다. 건강, 학업, 승진, 시험... 누구는 로또.


두 손을 모아 간절히 기원을 올린다. 성당이나 교회에서는 기도를 드리겠지만 단어가 달라진다고 내용까지 달라지지는 않는다. 성경책 위에 가지런히 모은 두 손과 불경 위에 올려진 합장한 손은 종교적인 구분만 있을 뿐 그 속에 담은 마음만은 동일하다.


무속신앙도 마찬가지다. 정화수를 떠놓고 바퀴 굴리듯 손을 비벼대며 올리는 기원도 외형만 다를 뿐이다. 잘 되라고, 건강하라고, 사랑하라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이들의 정성인 것이다.

오늘 탐방할 곳은 서울의 우백호 인왕산이다. 이곳 인왕산에는 한국에서 가장 기도빨이 잘 받는 기도터가 있다.

 




* 인왕산역사트레킹





서울의 우백호 인왕산

 

당연한 이야기지만 서울에도 좌청룡·우백호가 있다. 조선의 도읍지였던 한양이 풍수지리에 의거해 기획된 도시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래서 좌청룡·우백호가 있고, 남쪽에는 주작, 북쪽에는 현무가 자리 잡고 있다. 인왕산이 우백호라면 좌청룡은 어디일까? 낙산이다. 혜화동 뒤편에 나지막하게 서 있는 낙산이 바로 서울의 좌청룡인 것이다.


인왕산과 낙산, 거기에 남산과 북악산을 더해 내사산(內四山)이라고 부른다. 말 그대로 안쪽의 4개의 산이라는 뜻이다. 이 내사산을 기반으로 18.6km의 성벽을 쌓았으니 그것이 바로 한양도성이다.


외사산(外四山)도 있다. 남쪽에서 주작 역할을 하는 관악산, 북쪽에서 현무 역할을 하고 있는 북한산, 여기에 동쪽의 아차산과 서쪽의 덕양산(행주산성) 4개의 산을 일컬어 외사산이라고 칭한다. 이를 두고 필자는 트레킹팀에게 이렇게 설명을 하곤 했다.

 

내사산이니 외사산이니 하는 말들이 감이 잘 안 오시죠. 이렇게 생각하세요. 내사산은 작은 서울, 외사산은 큰 서울. 지도 놓고 보시면 더 감이 잘 올 거예요.”

 





* 내사산 외사산







사직단은 '종묘사직'할 때, '사직'이다

 

인왕산 역사트레킹은 사직단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 선조들은 삼국시대부터 사직단을 세워 기원을 올렸다. 그것도 한 곳에만 세우지 않고 여러 곳에 세웠다. 우편번호를 검색해보면 사직동이라는 지명이 꽤 여러 곳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당장 부산에 사직야구장이 있지 않던가.


사직단은 토지의 신인 사신(社神)과 오곡의 신인 직신(稷神)에게 제례를 올리는 곳이다. '종묘사직'할 때 '사직'이 바로 사직단인 것이다. 농경을 중시했던 조선왕조였기에 사직단의 의미는 종묘보다 더 크면 컸지 작지는 않았다. 실제로 조선의 왕들은 국가적으로 중대한 일들이 닥쳤을 때 사직단에 직접 나아가 제사를 올렸다. 지역에 있는 사직단에는 해당지역 수령이 왕을 대신하여 제사를 드렸다.


보통 '사직'은 궁을 중심으로 서쪽, '종묘'는 동쪽에 들어선다. 실제로 사직단은 경복궁의 서편인 서촌에 위치에 있고, 종묘는 경복궁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다. 사직단은 동쪽에 사신을 모시는 사단, 서쪽에는 직신을 모시는 직단이 있다. 큰 담 안에 작은 담이 둘러져 있는데, 그 작은 담은 ''라고 불린다. 그 유 안에 사단과 직단이 있는 것이다.

이번편의 주제는 기원이다. 사직단은 국가적인 기원, 즉 풍작을 기원하는 곳이니 주제 적합도가 딱 맞아 떨어진다.

 




* 사직단





그래도 국가적인 기원은 계속될 것이다

 

조선이 망국의 길로 들어서자 사직단에도 일제의 마수가 뻗치게 된다. 1911년에 사직단이 폐사됐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1922년에는 원래 부지에다 인근의 땅들을 합쳐서 공원을 만든다. 사직단을 공원화하여 격하시켰던 것이다.


해방 이후에도 사직단은 아픔을 겪었다. 도시계획에 따라 신문(神門)이라고 불린 정문이 원 위치보다 14미터 뒤로 후퇴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영역 안에 차례로 도서관, 어린이 놀이공간, 단군성전 등이 세워지게 된다. 심지어 수영장도 들어섰다. 애초 사직단의 근본 취지와 동떨어진 건물들이 자리를 잡게 됐다.


그렇게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이 떠난(?) 예전 사직공원은 몸살을 앓았다. 취객들이 술김에 울타리를 넘어 가기도 하고, 아이들은 제단에서 씨름을 하기도 했다. 어두운 불빛 아래에서는 '부비부비'를 즐긴 남녀들도 넘쳐났다고 한다. 국가적으로 기원을 드렸던 곳인데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현재 사직단은 복원정비사업 중이다. 2015년에 시작한 복원 사업은 2027년에 완료될 예정이다. 무려 12년 동안 진행된다. 상처가 깊었던 만큼 복원하는데 시간도 많이 걸리는 셈이다.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현대에는 왕도 없고, 국가적으로 제례를 드리지도 않는다. 농업과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더 이상 사신과 직신은 한물간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국가적인 기원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소녀상을 두고 일본의 진심어린 사과를 바라는 것과 세월호를 두고 진실규명을 바라는 것처럼 말이다.

 




* 선바위






승복을 입은 선바위?

 

국가적인 기원을 올렸던 사직단을 탐방했으니 이제 개인적인 기원을 드리는 곳으로 가보자. 그곳이 어디인가? 바로 선바위다.


인왕산 서남쪽에 자리 잡고 있는 선바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기도빨이 잘 받는 곳 중에 하나다. 특히 아이를 잘 잉태해준다고 한다. 그래서 트레킹팀에게 이런 말을 간간이 건넸다.

 

늦둥이를 낳고 싶으신 분들은 시주 한 번 하시고 간절히 기원하세요!”

 

어떤 대답이 돌아왔을까?

 

지금 있는 것들도 징글징글한데 무슨 놈의 늦둥이야!”

 

본전도 못 찾고 핀잔만 잔뜩 들었다.

 

선바위는 높이 7미터, 가로 10미터 정도가 되는 바위로 산 중턱에 불쑥 솟아 있다. 그렇게 바위의 규모가 크니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그 존재를 알아볼 수 있다. 선바위를 한자로 쓰면 '선암(禪岩)'으로 '스님바위'라는 뜻이 된다. 승복을 입은 선승이 참선을 하는 모습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선바위를 자세히 보면 단일 암석이 아닌 두 개의 바위가 나란히 붙어 있는데 이것을 두고 무학대사와 이성계의 영혼이 나란히 깃들어 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렇게 두 개의 바위가 나란히 서 있다 보니 선바위는 예로부터 아이를 갖기 원하는 이들의 좋은 기도처였다고 한다. 쌍둥이 바위는 다산을 뜻하니까. 요즘같이 저출산 시대에는 애국자 바위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거대한 암석에서 치성을 드리는 것을 두고 거석숭배문화라고 한다. 이 거석숭배문화는 우리 민간신앙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선바위는 이런 거석숭배문화에 한 가지가 더 추가된다. 바로 산악신앙이다.


우리 옛 선인들은 산을 경이로운 존재이자 두려운 존재로 인식하였다. 물이 샘솟고, 과실과 약초들이 산재해 있으며, 연료인 나무들을 채취할 수 있으니 산은 인간에게 생명의 원천과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산을 마냥 좋은 것만 주는 존재로 인식하지는 않았다. 사나운 맹수들이나 험준한 지형이 항상 자신들의 생명을 위협했기 때문이다.

 





* 국사당






국사당과 산악신앙

 

그래서 그들은 경이로운 존재이자 두려운 존재인 산을 신격화하여 제사를 드렸다. 산에 사는 신령, 즉 산신령에게 제사를 드렸던 것이다. 이것을 두고 산악신앙이라고 부른다. 그런 산악신앙은 우리 무속신앙의 근원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바위 아래에는 국사당(國師堂)이라는 신당이 있다. 이 국사당은 원래 남산에 있던 신당이었다. 조선이 개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1395(태조4), 이성계는 목멱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하고 호국의 신으로 삼았다. 그때 제사를 드리기 위해 사당이 세워졌는데 이것을 국사당, 또는 목멱신사(木覓神祠)라고 불렀다.


이 목멱신사에서는 봄과 가을에 국가의 공식행사로 제례를 올렸다. 유교중심주의를 표방하며 건국된 조선에서조차도 산신령을 모시는 사당을 짓고, 제사를 드렸던 것이다.


그렇게 목멱대왕을 모셨던 국사당은 1925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게 된다. 일제가 남산 중턱에 조선신궁을 세웠는데 자기들의 신궁 위에 국사당이 있는 것을 꺼림칙하게 여겼던 것이다. 국사당이 선바위 부근으로 옮겨오게 된 건, 인왕산이 무학대사의 기도처였기 때문이었다. 국사당(國師堂)에서 '국사(國師)'는 무학대사를 뜻한다.


그렇게 아래쪽에 국사당이 자리 잡게 되니 선바위는 거석숭배문화에다 산악신앙까지 더해지게 된다. 선바위에서 기원을 드리는 사람들이 국사당 앞에서도 두 손을 모으게 됐다는 것이다.

사직단에서 선바위, 그리고 국사당까지. 인왕산 남쪽은 굵직굵직한 기원 장소가 즐비하다.

 

 

무학대사와 정도전, 그리고 선바위

 

선바위는 한양도성에서 직선거리로 300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이 선바위를 도성 안에 두냐 마냐를 두고 무학대사와 정도전 간에 격론이 오갔다. 불교세력을 대변했던 무학대사는 당연히 선바위가 도성 안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유교세력을 대변했던 정도전은 이 스님바위가 도성 안에 들어오는 것을 크게 반대했다. 선바위가 들어오면 도성 안에 불교가 융성해질 거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첨예하게 오갔던 격론은 이성계에 의해 결론이 났다. 선바위가 도성 밖으로 물러나게 된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불심이 깊은 이성계였지만 정치적으로는 유학자들의 손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이에 무학대사는 200년 안에 큰 전란이 있을 것이고, 국운이 기울 것이라는 큰 저주(?)를 내뱉었다고 한다.


여기서 잠깐! 이 선바위를 두고 오갔다던 무학대사 VS 정도전간의 갈등은 정사가 아닌 야사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선바위를 두고 오갔던 두 사람의 갈등은 <조선왕조실록> 같은 공식적인 사료에는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왜 이런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일까? 선바위 논쟁이 입에서 입으로 흘러나왔던 건, 실제로 조선이 건국한 후 약 200년 뒤에 일어난 조일전쟁(임진왜란) 때문이었다


당시의 민중들이 어떤 식으로든 전란에 대한 유학자들의 책임을 묻기 위해 선바위와 무학대사를 무대로 등판시켰다는 것이다. 도성을 버리고 떠난 왕과 사대부들에 대한 원망을 선바위와 무학대사에 기대어 풀고자 했던 것이다.


선바위를 빠져나오면 한양도성 인왕산 구간을 걸을 수 있다. 최근 성곽 밖의 순성로도 잘 정비되어 성곽트레킹을 하기에 제격이다. 인왕산 성곽도 좌청룡인 낙산 성곽길처럼 성돌의 변천사를 관찰할 수 있는 좋은 장소이다. 더군다나 이 성곽길의 반대편은 자락길로 유명한 서대문 안산이기에 양 옆의 시선이 다 즐거운 곳이다.

 





* 수성동계곡






인왕산의 숨어 있는 보석, 수성동 계곡

 

다음 탐방지는 수성동 계곡이다. 수성동 계곡은 인왕산의 숨겨진 보물 같은 곳이다. 아랫동네 서촌의 번잡함은 싹 사라지고, 계곡이 주는 청량감이 주위를 감싸고 있는 곳이 바로 수성동 계곡인 것이다.


수성동(水聲洞)의 명성은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더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 역사지리서인 <동국여지비고><한경지략>에는 수성동을 명승지로 소개하고 있고, 겸재 정선은 <수성동>을 그려 이곳의 아름다움을 수묵으로 옮겨놓았다. 또한 이곳은 중인들이 모여 시를 짓고 노닐던 곳이다. 조선후기 중인들을 중심으로 발달했던 위항문학(委巷文學)의 본거지였던 셈이다. 그러니 문학사적인 측면에서도 무척 중요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수성동 계곡은 20127월에 복원한 것인데 복원 전에는 1971년에 지어진 시민아파트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후 안전문제로 아파트는 철거가 됐고, 그 위치를 옛 모습으로 돌려놨던 것이다.


복원 과정에서 겸재 정선의 <수성동>이 큰 역할을 해주었다. <수성동>에 나오는 것처럼 기린교라는 통돌다리도 그대로 복원이 됐다. 어쩌면 겸재의 그림이 없었다면 지금의 수성동 계곡은 평범한 도시 공원의 모습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재개발로 사라졌던지.

 





* 창의문







창의문 밖에는 고소한 냄새가 풍긴다!

 

인왕산에도 자락길이 있다. 걷기에 부담이 없는 길이다. 마천루가 즐비한 도심지와 가까운 곳에 이렇게 부드러운(?) 길이 있다는 게 참 좋다. 그렇게 부드럽게 발걸음을 옮기다보면 인왕산 역사트레킹의 마지막 구간인 창의문을 만나게 된다.


창의문(彰義門)은 사소문중 하나로 자하문(紫霞門)으로 더 많이 알려진 문이다. 북대문인 숙정문이 있었음에도 실질적으로 북문(北門) 역할을 했던 건 바로 창의문이었다. 북악산의 험한 지형 위에 세워진 숙정문은 사람의 발길이 뜸했을 뿐더러 1413년부터는 그마저도 폐쇄를 시켰기 때문이다. 숙정문이 오른팔이 되어 경복궁을 내리누른다는 풍수학적인 의미 때문에 그런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그때 창의문도 폐쇄가 되는데 왼팔의 역할을 하여 경복궁의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죄명때문이었다. 하지만 숙정문과 달리 교통의 요충지 위에 놓여 있던 창의문은 1506(중종 1)에 다시 통행이 재개된다. 그래서 소문(小門), 창의문이 북문 역할이라는 중책을 맡게 된 것이다.


사람들의 통행이 빈번했다는 것은 그 문 아래로 수많은 역사적 발걸음이 오갔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제로 인조반정 때 능양군(인조)을 옹립하던 세력들은 이 문을 통해 도성을 점령했고, 광해군을 쫓아낸 후 권력을 잡게 된다. 현재의 문루는 조일전쟁 때 불 타 사라진 것을 영조 때(1740) 건립한 것이다.


창의문의 천장에는 큰 새가 그려져 있다. 필자는 창의문을 지날 때마다 트레킹팀에게 묻는다.

 

저기 위에 그려진 새가 뭐로 보이세요?”

봉황 아니에요?”

주작이요. 주작!”

 

봉황에 주작까지 나왔다. 하지만 꽝! 정답은 닭이다. 이 일대가 풍수적으로 지네의 기운을 가졌다하여 천적인 닭을 창의문에 그려 넣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창의문 밖인 부암동 일대가 치킨으로 유명한 것이다. 창의문 밖을 나서면 고소한 냄새가 진동을 한다. 그 냄새를 맡은 도보여행자들은 더 이상 길을 나설 수 없게 된다. 자연스럽게 트레킹도 종료되게 된다. 대신 입이 즐거워진다.


사직단, 선바위, 국사당, 성곽길, 수성동계곡, 창의문까지... 거기에 이번 글에 언급하지 않은 윤동주문학관(시인의 언덕)과 이빨바위, 출렁다리까지... 이처럼 스토리텔링이 풍부한 인왕산을 소개할 수 있어서 필자도 참 기쁘게 생각한다.

 




* 인왕산 성곽길





난 타인의 기원을 실현시켜주는 사람

 

트레킹팀과 함께 열심히 걷다보니 한 가지 깨달은 점이 있다. 내가 타인의 기원을 실현시켜주는 기특한 일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트레킹에 오신 분들은 이구동성으로 건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셨다. 육체건강이든 정신건강이든 건강에 대한 간절함이 강렬하셨다. 꾸준한 운동이 필요하다고 하셨는데 역사트레킹이 거기에 이라는 것이다.


숲길도 걷고, 답사도 하고, 만 보 이상 걸으니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튼튼해졌다고 필자에게 신앙고백을 하셨던 분들도 계셨다. 그런 말씀들을 하실 때마다 참 고마웠다. 어쨌든 필자가 건강에 대한 기원에 조금이나마 힘을 보탰으니까. 좀 우쭐하기도 했다. 복 받을 일을 했으니 이 정도 우쭐함은 괜찮지 않나.

 






 

인왕산 역사트레킹

 

1. 코스: 사직단 선바위(국사당) 성곽길 수성동계곡 출렁다리 윤동주문학관 창의문

2. 이동거리: 7km

3. 예상시간: 3시간 30(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5. In: 지하철3호선 경복궁역 / Out: 창의문(부암동)





* 인왕산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펀딩비 미리 당겨썼습니다!

- 청소년들과 함께한 인왕산역사트레킹

 

 

제게 메일 한 통이 왔습니다. 홍은동 공부방이라는 곳의 프로그램 담당 선생님이 보낸 메일이었습니다. 담당 선생님은 검색을 통해 우연히 역사트레킹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하더군요. 그리고는 아이들이 인왕산 역사트레킹에 참여를 할 수 있는지 문의를 했습니다. 한마디로 역사트레킹을 통해 지역체험활동을 하고 싶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인왕산이 홍은동의 동네 뒷산이라서 그랬던 것이죠.

 

 



 

청소년들과 함께한 역사트레킹

 

사실 역사트레킹은 성인 대상 프로그램입니다.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껏 계속 성인들만 참가신청을 해왔기에 그렇게 굳어져버린 것이죠. 그러다보니 저도 성인들 기준으로 코스를 짜게 됐습니다. 또한 성인들의 입맛(?)에 맞는 해설을 준비해 왔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꼭 그렇게 성인들 대상으로만 프로그램을 진행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역사트레킹을 하는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아니, 오히려 청소년들이 더 많이 역사트레킹에 참여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무거운 책가방만큼이나 학습에 짓눌린 그들이기에... 그렇게 해서 지난 528, 청소년들과 함께 인왕산 역사트레킹에 나서게 됐습니다.


한편, 인왕산역사트레킹은 지난 1화에 언급이 됐습니다. 그럼 이번화는 재탕이 되는 건가요? 아닙니다. 그때는 윤동주 시인과 관련된 에피소드 위주로 내용을 서술해 나갔습니다. 하지만 이번화에서는 코스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담았습니다. 또한 코스의 시작점도 변경됐습니다. 예전에는 광화문에서부터 시작을 했지만 변경된 코스에서는 청계천에 있는 광통교에서부터 출발을 하게 됩니다.


이번화가 재탕인지 아닌지 끝까지 읽어 봐주세요. 더군다나 펀딩비를 미리 땡겨쓴만큼 후원자분들은 냉철한 시선으로 이번화를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 광통교





 

 

광통교(廣通橋)


트레킹 팀이 첫 번째로 탐방한 곳은 청계천에 있는 광통교입니다. 대광통교, 광충교, 광교라고도 불리는 광통교는 원래 태조 때 흙으로 만들어진 토교(土橋)였습니다. 그러다 태종10(1410), 홍수로 인해 다리가 떠내려 가 다시 돌다리(石橋)로 만들게 됩니다. 이때 다리에 쓰였던 석재들은 정릉(貞陵)에 있던 석물들이었습니다. 정릉은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의 무덤입니다.


여기서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어떻게 왕후의 무덤에 있던 돌들이 다리의 재료로 쓰일 수 있냐는 의문 말입니다.


조선왕조가 개창될 때 이성계의 나이는 58세였습니다. 그래서 즉위하자마자 세자 책봉에 나서야했습니다. 그래서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이었던 방석이 1392820일에 세자로 책봉됩니다. 그해 717일에 조선이 개국했으니 약 한 달 만에 세자가 책봉이 된 것이지요.


쟁쟁한 형들을 물리치고 이방석이 세자가 될 수 있었던 건, 신덕왕후가 개국 후 첫 번째 왕후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입니다. 원래 이성계의 첫 번째 부인은 신의왕후 한 씨였습니다. 한 씨는 이성계가 즉위하기 1년 전에 세상을 떠났기에 왕비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게 됩니다. 신의왕후는 방과(정종), 방원(태종), 방간(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킴) 6명의 남자 형제들을 낳았습니다

   



* 광통교. 거꾸로 세워진 신장석.




 

신덕왕후는 자신의 소생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보지 못한 채 1396(태조5)에 세상을 뜨고 맙니다. 강 씨를 무척 아꼈던 이성계는 지금의 서울 정동에 묘소를 만드니, 그것이 바로 정릉이었습니다. 이후 13988, 이방원이 주도한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고, 이때 세자였던 방석이 죽고 맙니다. 이를 무인년에 일어났다 하여 무인정사(戊寅靖社)라고도 부릅니다.


왕위에 오른 이방원은 1409(태종9), 도성 안에 무덤이 있을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정릉을 현 위치인 성북동으로 옮기게 합니다. 그 다음해에는 정릉의 봉분을 두르고 있던 석각신장(石刻神將) 등을 광통교 건설에 이용하게 합니다

 

신덕왕후에 대한 이방원의 '뒤끝'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기왕 능에서 가져온 귀한 석재들인 만큼 그걸 제대로 쌓았으면 좋았으련만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일부러 신장석들을 뒤집어 놓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장석은 머리가 바닥을 향해 있습니다. 신덕왕후를 철저히 조롱한 것이죠.


이 광통교는 길이(12미터)보다 폭(14미터)이 더 넓습니다. 그래서 광통교라고 부르나 봐요. 그렇게 넓은 다리인 만큼 거기에 담긴 스토리텔링도 풍부하네요.”

 

트레킹 팀은 풍부한 역사를 담고 있는 광통교를 직접 건넜습니다. 다리에 담긴 많은 이야기들을 곱씹어 보면서.

 

 




* 서울성곽: 서울성곽 인왕산 구간.







 

사직단은 종묘사직할 때, 사직이다.

 

트레킹 팀은 광화문을 지나 사직단으로 향했습니다. 사직단은 토지의 신인 사신(社神)과 오곡의 신인 직신(稷神)에게 제례를 올리는 곳입니다. ‘종묘사직할 때 사직이 바로 사직단인 것입니다. 농경을 중시했던 조선왕조였기에 사직단의 의미는 종묘보다 더 크면 컸지 작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실제로 조선의 왕들은 국가적으로 중대한 일들이 닥쳤을 때 사직단에 직접 나아가 제사를 올렸다고 합니다.


보통 사직은 궁을 중심으로 서쪽, ‘종묘는 동쪽에 들어섭니다. 실제로 사직단은 경복궁의 서편인 서촌에 위치에 있고, 종묘는 경복궁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직단은 동쪽에 사신을 모시는 사단, 서쪽에는 직신을 모시는 직단이 있습니다. 큰 담 안에 작은 담이 둘러져 있는데, 그 작은 담은 이라고 부릅니다. 그 율 안에 사단과 직단이 있는 것이죠.


조선의 근간 중에 하나였던 사직단에도 일제의 마수가 뻗쳤습니다. 1911년에 사직단이 폐사됐기 때문입니다. 이에 더해 1922년에는 원래 부지에다 인근의 땅들을 합쳐서 공원을 만들기까지 합니다. 사직단을 공원화하여 격하시켰던 것입니다.






* 사직단: 사직단 제단 바로 옆에서 사진촬영을 하는 청소년 트레킹 팀.






해방 이후에도 사직단은 아픔을 겪었습니다. 도시계획에 따라 신문(神門)이라고 불린 정문이 원 위치보다 14미터 뒤로 후퇴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부지 안에 차례로 도서관, 학교, 어린이 놀이공간 등이 세워지게 됩니다.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이 떠난(?) 예전 사직공원은 몸살을 앓았습니다. 취객들이 술김에 울타리를 넘어 가기도 하고, 아이들은 제단에서 씨름을 하기도 했다고 하더군요. 어두운 불빛 아래에서는 부비부비를 즐긴 남녀들도 넘쳐났다고 합니다



트레킹 팀은 율을 넘어 사직단을 지근거리에서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내친김에 기념촬영도 했습니다. 물론 허락을 받고 안쪽으로 들어간 것이죠. 소중한 문화유산을 앞에 두고 기념촬영을 할 수 있어서 은근히 기분이 좋더군요. 학생들의 표정도 밝아보였습니다. 이런 맛에 역사트레킹 하는 거겠죠!

 






* 사직단






 

인왕산의 숨겨진 보물, 수성동계곡

 

트레킹 팀은 수성동 계곡을 향해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수성동 계곡은 인왕산의 또 다른 볼거리입니다. 아랫동네 서촌의 번잡함은 싹 사라지고, 계곡이 주는 청량감이 주위를 감싸고 있는 곳이 바로 수성동입니다. 물론 계곡치고는 유량이 거의 없는 것이 안타깝기는 하더군요.


수성동(水聲洞)의 명성은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더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역사지리서인 <동국여지비고><한경지략>에는 수성동을 명승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겸재 정선은 <수성동>을 그려 이곳의 아름다움을 수묵으로 옮겨놓았습니다.


또한 이곳은 중인들이 모여 시를 짓고 노닐던 곳입니다. 조선후기 중인들을 중심으로 발달했던 위항문학(委巷文學)의 본거지였던 셈이죠. 그러니 문학사적인 측면에서도 무척 중요한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수성동 계곡은 20127월에 복원한 것입니다. 복원 전에는 1971년에 지어진 시민아파트가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이후 안전문제로 아파트는 철거가 됐고, 그 위치를 옛 모습으로 돌려놨던 것입니다.


복원 과정에서 겸재 정선의 <수성동>이 큰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수성동>에 나오는 것처럼 기린교라는 통돌다리도 그대로 복원이 됐습니다. 어쩌면 겸재의 그림이 없었다면 지금의 수성동 계곡은 평범한 도시 공원의 모습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 수성동 계곡







 

북문의 역할을 했던 창의문

 

윤동주 문학관을 넘어 마지막 목적지인 창의문으로 향했습니다.


창의문(彰義門)은 사소문중 하나로 자하문(紫霞門)으로 더 많이 알려진 문입니다. 북대문인 숙정문이 있었음에도 실질적으로 북문(北門) 역할을 했던 건 바로 창의문이었습니다.


북악산의 험한 지형 위에 세워진 숙정문은 사람의 발길이 뜸했을 뿐더러 1413년부터는 그마저도 폐쇄를 시켰기 때문입니다. 숙정문이 오른팔이 되어 경복궁을 내리누른다는 풍수학적인 의미 때문에 그런 조치를 취했던 것입니다.


그때 창의문도 폐쇄가 되는데 왼팔의 역할을 하여 경복궁의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죄명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숙정문과 달리 교통의 요충지 위에 놓여 있던 창의문은 1506(중종 1)에 다시 통행이 재개됩니다. 그래서 소문(小門), 창의문이 북문 역할이라는 중책을 맡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의 통행이 빈번했다는 것은 그 문 아래로 수많은 역사적 발걸음이 오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인조반정 때 능양군(인조)을 옹립하던 세력들은 이 문을 통해 도성을 점령했고, 광해군을 쫓아낸 후 권력을 잡게 됩니다.


현재의 문루는 조일전쟁(임진왜란)때 불 타 사라진 것을 영조 때(1740) 건립한 것입니다. 현재 창의문은 일반인에게 개방이 되어 있어 문루까지 직접 올라갈 수 있습니다. 내부에는 인조반정 때 공을 세운 인사들의 이름을 적은 나무판이 걸려 있습니다. 이 판은 문루를 세울 때 같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 창의문: 창의문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청소년 트레킹 팀.





 

 

펀딩비를 미리 당겨쓰다!

 

트레킹 팀은 창의문을 통과할 때 천장화를 바라보면서 이동했습니다.

 

저 그림이 뭘로 보이세요?”

봉황 아니에요?”

주작이요. 주작.”

 

! 봉황에 주작까지 나왔습니다만 정답이 아니었습니다. 정답은 닭이었습니다. 이 일대가 풍수적으로 지네의 기운을 가졌다하여 천적인 닭을 창의문에 그려 넣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창의문 밖인 부암동 일대가 치킨으로 유명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청소년들과 함께 한 인왕산 역사트레킹은 무사히 종료가 되었습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점심시간이 넘었더군요. 그냥 그렇게 헤어지기는 아쉬웠습니다. 배도 고프고.


그래서 제가 점심을 쏘기로 했습니다. 제 사비를 쓸까 하다가 스토리펀딩비를 당겨 쓰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유익하게 역사트레킹을 하려고 펀딩을 받고 있는 거잖아요. 그 목적에 맞게 지출이 됐다면 후원금을 미리 당겨쓴다고 해도 후원자분들이 너그러이 이해해 주실 거라 생각합니다.

 

 

 

인왕산 역사트레킹

 

1. 코스: 광통교 사직단 단군성전 수성동계곡 윤동주문학관 창의문

 

2. 이동거리: 7km

 

3. 예상시간: 3시간(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낭만'과 '비낭만'이 교차하는 서울성곽길

 

[서촌의 뒷산, 인왕산역사트레킹①]

 

15.06.09 16:33  최종 업데이트 15.06.09 16:33

 

 

 

 

 

 

 

 

 

▲ 낭만적인 서울성곽의 모습 활처럼 휜, C자형 구간. 뒤로 남산타워가 보인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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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仁王山)은 보면 볼수록 위엄이 느껴지는 산이다. 가파른 바위가 드러낸 바위색과 그 바위 사이로 가지를 뻗은 수풀들의 푸른색이 서로의 배경색이 되어주니, 그 운치에 감탄사가 절로 나올 수밖에! 그런 인왕산을 겸재 정선은 <인왕제색도>, 강희언은 <인왕산도>를 붓끝으로 담아 표현하였다.   


호랑이가 살고 있어 무서운 곳이긴 했지만 인왕산은 예부터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필자도 마찬가지다. 광화문, 경복궁 너머로 보이는 인왕산의 풍광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혼자만 좋아한 게 아니다. 사람들을 불러 모아 함께 트레킹을 할 정도로 좋아한다. 일명 인왕산 역사트레킹을 리딩하며, 사람들에게 인왕산의 매력을 알려줄 정도다. 인왕산역사트레킹 코스는 다음과 같다.

 


광화문 → 사직단 → 단군성전 → 수성동계곡 → 윤동주문학관 → 창의문

 


▲ 서울성곽 서울성곽 인왕산구간.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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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단은 '종묘사직'할 때, 그 '사직'이다


인왕산 역사트레킹은 사직단에서부터 시작된다. 사직단은 토지의 신인 사신(社神)과 오곡의 신인 직신(稷神)에게 제례를 올리는 곳이다. '종묘사직'할 때 '사직'이 바로 사직단인 것이다. 농경을 중시했던 조선왕조였기에 사직단의 의미는 종묘보다 더 크면 컸지 작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조선의 왕들은 국가적으로 중대한 일들이 닥쳤을 때 사직단에 직접 나아가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보통 '사직'은 궁을 중심으로 서쪽, '종묘'는 동쪽에 들어선다. 실제로 사직단은 경복궁의 서편인 서촌에 위치에 있고, 종묘는 경복궁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다. 사직단은 동쪽에 사신을 모시는 사단, 서쪽에는 직신을 모시는 직단이 있다. 큰 담 안에 작은 담이 둘러져 있는데, 그 작은 담은 '율'이라고 불린다. 그 율 안에 사단과 직단이 있는 것이다.

조선의 근간 중 하나였던 사직단에도 일제의 마수가 뻗치게 된다. 1911년에 사직단이 폐사됐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1922년에는 원래 부지에다 인근의 땅들을 합쳐서 공원을 만든다. 사직단을 공원화 하여 격하시켰던 것이다.

해방 이후에도 사직단은 아픔을 겪었다. 도시계획에 따라 신문(神門)이라고 불린 정문이 원 위치보다 14미터 뒤로 후퇴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부지 안에 차례로 도서관, 학교, 어린이 놀이공간 등이 세워지게 된다.

 


▲ 사직제례 사직제례를 준비하는 모습. 2014년에 촬영한 사진이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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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이 떠난(?) 예전 사직공원은 몸살을 앓았다. 취객들이 술김에 울타리를 넘어 가기도 하고, 아이들은 제단에서 씨름을 하기도 했다. 어두운 불빛 아래에서는 '부비부비'를 즐긴 남녀들도 넘쳐났다고 한다. 필자는 사직단 뒤편 신사임당, 이율곡 동상 근처에 있는 족구장과 배드민턴장을 보며 이렇게 이야기했다.


"종묘에서 족구나 배드민턴을 칠 수 없잖아요. 그런데 사직단에서는 지금 하고 있거든요. 현재 사직단은 복원화 사업을 하고 있는데 원안대로 한다면 저기 도서관이랑 어린이 시설을 철거해야 한답니다. 사직단을 종묘처럼 성역화한다면 이곳에서 족구는 못하겠죠. 그건 그렇다 쳐도 도서관이랑 어린이시설까지 철거한다면 너무 일이 커지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그렇게 설명을 얼버무리는 건 복원사업에 대한 스스로의 입장 정리가 되지 않은 탓이다. 대신 확실한 건 하나 있다.

"성역화를 하더라도 입장료는 받지 마세요! 지갑이 얇아서요..."

 


▲ 단군성전 사직공원 한쪽편에 있는 단군성전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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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처럼 휘어나가는 서울성곽의 곡선미


트레킹팀은 단군성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직공원 위쪽에 자리 잡은 단군성전은 규모가 크지 않다. 눈을 크게 뜨고 찾아보지 않는다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사실 단군성전은 전국에 산재해 있다. 규모가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다.

성전이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다. 크기가 중요한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사직동의 단군성전은 우리동네 교회보다도 더 작다. 아무리 그래도 서울에 있는 단군성전이라면 일정 정도 규모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단군성전을 탐방할 때마다 느끼는 아쉬움이다.

그런 아쉬움을 뒤로 하고 본격적인 트레킹에 나섰다. 산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다 보면 활처럼 곡선으로 휜 성곽이 펼쳐진다. 뒤쪽으로 남산을 두고 'C자'형으로 크게 휘어나가는 서울성곽은 트레킹팀의 시선을 독차지했다. 이를 두고 필자는 이렇게 말을 했다.

"여기가 서울성곽 중 가장 곡선미가 뛰어난 구간인 듯싶습니다. 뒤쪽에 남산도 있어서 배경도 살아 있어요. 그러니 열심히 사진을 찍어주세요!"

 


 

▲ 서울성곽 성곽길을 걷고 있는 트레킹팀.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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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이지 않은 서울성곽길


서울성곽길 역사트레킹을 리딩하면서 하면서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생각보다 사람들이 성곽길을 만만하게 보고 있다는 점이다. 등산에 준하는 복장을 갖추라고 미리 공지를 했음에도 트레킹 당일날 보면, 필자를 당혹스럽게 하는 참가자들이 꼭 있었다.

배낭이 없으면 백팩이라도 메고 오라고 당부했지만 옆으로 메는 가방을 들고 오는 참가자. 가급적 트레킹화를 신고 오라고 말을 해도 운동화는커녕 하이힐을 신고 오는 참가자. 그런 사람들을 보면 필자는 이런 말을 건넨다.

"서울성곽 길은 낭만과 비낭만이 교차하는 곳입니다. 성곽자체는 낭만적으로 보일 겁니다. 하지만 한양도성은 말 그대로 방어시설이었어요. 비탈의 경사가 급격할수록 방어력도 높아지잖아요. 그런 상식에 기초해서 성곽이 만들어졌으니 성곽길이 험할 수밖에 없답니다. 그런 곳은 비낭만적이죠."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성곽길을 낭만적인 길로 인지하고 있을까? 미디어에서 접한 모습들이 낭만적으로 묘사돼서 그런 것이 아닐까 한다. 기자들이 험한 구간은 직접 취재하거나 체험하지 않고, 그저 '그림'이 잘 나오는 부분을 부각시키는 기사를 남발했다는 뜻이다. 그런 면에서 필자도 자유롭지 않다. 곡선미가 사는 C자형 성곽구간을 메인 사진으로 올려 사람들의 참가를 유도했으니까. 어렵고 난이도 있는 구간은 쏙 빼놓았으니까. 낭만과 비낭만이 교차하는 성곽길을 뒤로하고 트레킹팀은 수성동 계곡으로 향했다.  

 

 


▲ 서울성곽 사진에도 보이듯 성곽길은 경사도가 꽤 된다. 계단을 계속 타고 올라가는게 무척 비낭만적이지만 성벽 넘어로 보이는 풍광들은 무척 낭만적이다. 비낭만이 있어야지 낭만이 더 돋보이는 법이다. 뒤로 보이는 산은 북한산이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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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편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http://blog.daum.net/artpunk

 

 

 

     


'뚜껑없는 박물관', 서울역사도보여행    

  


우리에게 3월은 봄의 시작이자 삼일절이라는 역사적인 날이 있는 달이다. 야외활동을 시작하기 좋은 이 봄에, 역사도보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 멀리 떠날 필요도 없다. 서울 한복판에 있는 광화문에서 서대문형무소까지 이어지는 길로 역사도보여행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광화문과 사직단

 

일명 광화문-서대문형무소 코스로 불릴 수 있는 이 도보여행의 시작점은 경복궁의 남문이자 정문인 광화문에서 시작된다. 경복궁이 조선의 법궁이었던만큼 광화문은 다른 궐문보다 훨씬 더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다. 궁궐은 ‘궁’과 ‘궐’이 합쳐진 말인데 ‘궐’은 높은 석대 위에 누각을 세운 것을 말한다. 지금은 경복궁 돌담과 떨어져 있는 동십자각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 일반적인 궁궐의 의미에 빗대어 보자면 광화문은 조선시대 궁궐 정문 가운데 유일하게 궐문 형식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광화문 수문장 교대식

 

 

 

일제의 마수는 광화문에도 미치게 된다. 일제는 조선의 정기를 끊기 위해 광화문을 헐어 동쪽으로 옮겨 버렸다. 대신 그 자리에는 한용운 선생이 ‘돌집’이라고 불렀던 조선총독부가 들어섰다.

해방 이후 광화문은 여러 차례 중수를 하게 됐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광화문은 2010년 8월에 완공한 것이다. 다시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광화문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공간으로 거듭났다. 수문장 교대식 때문이다. 바람에 펄럭이는 큰 깃발과 화려한 복식을 한 수문장들의 박력 있는 모습은 그 자체로도 큰 관광 상품이 되었다.

 

경복궁 서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인 서촌에는 사직단이 자리를 잡고 있다. 도보로 10분 정도 이동을 하면 닿을 수 있는 곳이다. 사직단은 토지의 신인 ‘사’와 곡식의 신인 ‘직’에게 제례를 올리기 위해 마련된 장소다. 경복궁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종묘, 서쪽으로는 사직단이 자리 잡은 것이다.




토지와 곡신의 신에게 제사를 올린다는 뜻의 `사직단` 제례

 

 

 

종묘사직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사직단은 종묘에 버금가는 곳이었다. 하지만 사직단도 일제시대에 큰 몸살을 앓게 된다. 경내가 크게 훼손되고, 그 영역도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최근에 이슈가 됐던 사직단 복원 문제도 그 근원에는 일제의 마수가 있었던 것이다.



 

서대문형무소와 독립문


도보여행은 인왕산 서울 성곽으로 이어진다. 겸재 정선이 사랑했던 돌산 인왕산에 올라 서울 시내를 찬찬히 살펴보고 마지막 탐방 장소인 서대문형무소로 이동해보자.

서대문 형무소에 대형태극기가 걸려 있다

 

 

 

수많은 독립지사들이 피눈물을 흘렸던 서대문 형무소는 역사도보여행의 절정부이자 종료 지점이다. 서대문형무소는 1996년 성역화 사업 이후 역사공원으로 탈바꿈했는데 빨간 벽돌로 지어진 건물들이 군집을 이루고 있는 형태를 띠고 있다. 아직도 이곳에는 유관순 열사가 옥사했던 여감방, 강인규 열사(사이토 총독에게 폭탄을 던짐)가 처형당한 사형장 등등… 수많은 독립지사들의 복역을 했던 독방들이 전시되어 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찾아가 봐도 좋다

 

 

 

이제 도보여행을 하기 좋은 봄이 왔다. 춘삼월에는 배낭을 꾸려 서울 곳곳에 남아 있는 역사유적들을 탐방해보자. 도보여행을 통해 빛나는 역사뿐 아니라 그늘진 역사도 배워보자. 알고 보면 서울도 뚜껑 없는 박물관인 정도로 풍부한 역사유적을 가지고 있는 매력적인 도시다.


 

 

 

 

 



■ 역사도보여행 제안 코스
 1. 광화문-서대문형무소 코스:
    광화문(경복궁) ▶사직단(서촌) ▶ 인왕산(서울성곽) ▶ 서대문 형무소(독립문)
 2. 교통편: 출발 – 서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이용 / 종료 –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이용
 3. 이동거리: 약 5km / 서대문형무소 관람을 포함, 약 2시간 30분 정도 소요 예상
 

 

 

 

 

 

서울시티투어? 아니... 서울시티트레킹!  2편

자신의 두 발로 가는 서울 명소탐방

 

 

 

 



광화문은 경복궁의 남문이자 정문이었다. 경복궁이 조선의 법궁이었던 만큼 광화문은 다른 궐문보다 훨씬 더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다. 광화문은 석축을 쌓고 중앙에 홍예문(무지개문)을 셋이나 내서 격식을 높였다.

궁궐은 '궁'과 '궐'이 합쳐진 말인데 '궐'은 높은 석대 위에 누각을 세운 것을 말한다. 지금은 경복궁 돌담과 떨어져 있는 동십자각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 일반적인 궁궐의 의미에 빗대어 보자면 광화문은 조선시대 궁궐 정문 가운데 유일하게 궐문 형식을 가지고 있다.

경복궁은 조일전쟁(임진왜란) 때 불에 타고 만다. 광화문 앞에 화기를 막으려고 세운 해태상이 있었음에도 불에 전소되었던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자 선조는 궁궐을 버리고 몽진(임금의 피난)을 하게 되고, 이에 격분한 백성들은 궁궐로 몰려간다. 그중 노비 신분에 있던 사람들은 장예원에 불을 놓는다. 장예원에 노비문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장예원에서 일어난 불길은 사방으로 퍼져나가 경복궁 전체가 화마의 피해를 입었던 것이다. 아무리 해태상을 세운다고 한들, 강력한 소방시설을 갖춘다고 한들 성난 민심 앞에서는 그저 무용지물이었던 것이다.


 

 

 

 

 

 
▲ 광화문 수문장 교대식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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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조선의 정기를 끊기 위해 광화문을 헐어 동쪽으로 옮겨 버렸다. 그 자리에는 한용운 선생이 '돌집'이라고 불렀던 조선총독부가 들어섰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광화문은 2010년 8월에 완공된 것이다. 1968년에 중수를 하게 되는데 그때 제대로 복원을 하지 못했다. 당시 중앙청으로 쓰이던 구 조선총독부 축에 맞춰 중수를 했는데 그 때문에 본래보다 3.5도 가량 틀어졌던 것이다.

그런 오류를 바로잡고 거듭난 광화문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공간이 되었다. 수문장 교대식 때문이다. 바람에 펄럭이는 큰 깃발과 화려한 복식을 한 수문장들의 박력 있는 모습을 보기 위해 국내외 관광객들이 광화문으로 몰려들고 있다.

사직단은 경복궁에서 서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인 서촌에 자리를 잡고 있다. 사직단은 토지의 신인 '사'와 곡식의 신인 '직'에게 제례를 올리기 위해 마련된 장소다. 경복궁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종묘, 서쪽으로는 사직단이 자리 잡은 것이다. 이런 배치는 <주례고공기>에 의한 것이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설계한 사람은 정도전이었다.   

 

 

 

# 인왕산과 서울성곽


사직단이 있는 서촌까지는 요즘 유행하는 동네걷기와 별 차이가 없다. 포장도로를 걷기 때문이다. 서울성곽이 있는 인왕산 코스에 가야 트레킹다운 트레킹을 할 수 있다.

약 18km에 달하는 서울성곽은 조선의 도성이었다. 북쪽의 백악산(북악산)을 기준으로 동쪽에 낙산, 서쪽에 인왕산, 남쪽에 목멱산(남산)을 둘러서 만든 성곽이다. 이 산들을 묶어 내사산이라 부른다. 북악산은 원래 백악산이라 불렸는데 일제 강점기에 '북악'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고 한다. 그런 도성에는 4대문이 있는데 남쪽에는 숭례문(남대문), 동쪽에는 흥인지문(동대문), 북쪽에는 숙정문, 서쪽에는 돈의문(서대문)이 있었다. 하지만 현재 서대문은 없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서울성곽 서울성곽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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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에 올라서면 성곽과 함께 고층빌딩으로 둘러싸인 서울 시내가 보인다. 내사산이 둘러싸고 있는 서울 중심부다. 이를 두고 필자는 '작은 서울'이라 칭했다. 그럼 '큰 서울'은 어딘가? 서울의 주산인 북한산을 기준으로 남쪽으로는 관악산, 동쪽으로는 아차산(용마산), 서쪽으로는 덕양산(행주산성)을 두고 외사산이라 부르는데 그 외사산의 안쪽 지역을 '큰 서울'이라고 불렀다. 서쪽 지역만 빼놓고는 지금의 서울 행정권역과 얼추 비슷하다. 한양천도 이후, 서울의 확장은 계속됐지만, 지형적인 굴레까지 뛰어넘지는 못했던 것이다.

서울성곽은 자연적 지형을 이용하여 방어요새를 구축했다. 산사면의 급경사를 이용하여 적의 침략을 대비한 것이다. 한마디로 매우 급한 경사면에 성곽이 구축됐다는 뜻이다. 이를 달리 해석하면 서울성곽길은 걷기가 만만치 않다는 결론이 나온다. 걷다 보면 발바닥에 불이 난다는 뜻이다.

하지만 간혹 서울성곽길을 좀 만만하게 보는 분들이 있다. 우리 역사트레킹팀에도 그런 분이 있었다. 사전에 미리 공지를 올렸는데도 어떤 분께서 하이힐을 신고 오셨던 것이다. 트레킹 인도자로서 참 난감했다.

"읔! 제가 분명히 편한 복장에 편한 신발을 신고 오라고 당부드렸는데요."
"앞에는 그냥 평지고, 서울성곽길 걷는다면서요…."

 

 

 

 

 
▲ 서울성곽 '시간 퇴적층'이 새겨진 서울성곽 돌덩이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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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힐을 신고 오신 분도 끝까지 완주를 했다. 정말 다행이었다. 물론 필자는 무척 조마조마했지만….

서울성곽은 여러 번에 걸쳐 개축됐다. 조선 초기에는 토성이었고, 이후에는 주위에 있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축성됐다. 그러다 조선 후기 숙종시대에는 두부 모양의 장대석이 쌓아올려지게 된다. 이후 박정희 정권 시대에 또 한 번 개축된다.

이렇듯 서울성곽은 시간의 흐름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마치 600년이란 시간이 퇴적층처럼 돌들에 새겨져 있는 것 같다. 아랫돌은 옛날에 쌓여 '누릿누릿'한데 그 이후에 축성된 돌들은 하얀색이다. 윗돌과 아랫돌이 시각적으로 '시간 퇴적층'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 서대문형무소와 독립문


역사트레킹팀은 마지막 탐방지인 독립문과 서대문 형무소로 이동했다. 독립문은 잘 아시다시피 독립협회에서 자주 국권을 상징하기 위해 세운 문이다. 독립문은 영은문을 헐고 지은 문이다. 영은문은 청나라 사신을 접견하기 위해 만든 문이었다.

독립협회가 주장한 '자주독립'은 분명 한계가 있었다. 러시아에 대한 독립의지는 확고했으나 일본이나 미국에 대해서 무척 관대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이권침탈에는 목소리를 높이며 반대했으나 일본의 이권 침탈에는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던 것이다.

 

 


 

 
▲ 독립문 독립문을 탐방하는 서울시티트레킹 참가자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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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형무소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해 드리지는 않겠다. 너무나 잘 아시는 곳이겠기에 굳이 필자가 따로 언급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대신 이 말은 하고 싶다.

"그들이 꿈꾸는 세상, 조국 독립을 위해 온몸을 바쳤던 그들이 꿈꾸던 세상을, 현재 우리는 살고 있는가? 아베 총리의 우경화에 핏대 높여 반대를 하면서 식민지근대화론 같은 얼토당토않은 이야기가 끊임없는 나오는 나라를 그들은 꿈꾸었을까? '친일청산은 소련의 지령'이라고 공개적으로 언급한, 친일 매국노의 후손이 KBS 이사장을 맡는 현실을 그들은 꿈꾸었을까?"

 

 

 


 

 
▲ 서대문형무소 서대문형무소에 걸려 있는 대형태극기! 저곳에서 피를 흘리고 목숨을 잃었던 분들이 꿈꾸었던 세상을, 지금 우리는 살고 있는가?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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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움말

1. 서울시티트레킹 코스: 조계사(우정국) ▶ 위안부 소녀상(일본대사관 앞)▶ 광화문(경복궁) ▶사직단(북촌)

▶ 인왕산(서울성곽) ▶ 서대문 형무소 ▶ 독립문

2. 약 6km 정도 밖에 되지 않지만 탐방할 것들이 많아 3시간 이상 소요될 것으로 보임.

3. 시작점: 지하철 1호선 종각역에서 하차 한 후 조계사로 이동. / 종료점: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이용.

4. 이 코스는 지도상으로만 존재하는 곳이다. 따로 표식작업이 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길 찾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스마트폰을 가지고 계신다면 지도검색을 통해 해당 탐방지들을 찾아갈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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