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보여행, 이렇게 걸으면 즐거움 커진다  2부

[북악산 역사트레킹 1편] 역사 알면 서울이 달라 보입니다

 

 

* 홍지문

 

 

 

 

 

---> 전편에 이어서

 

 

 

상처(?)가 많은 홍지문

홍지문은 탕춘대성의 성문이었다. 성벽이 숨을 골랐던 자리에 홍지문이 들어선 것이다. 그래서 홍지문 옆에는 홍제천이 흐를 수 있도록 수문 5개가 함께 세워져 있다.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이라고 불리는 이 수문은 홍예형(무지개)으로 이루어져 있다.

홍지문(弘智門)은 상처(?)가 많은 문이다. 사람들이 자꾸 4대문 중 북쪽에 있는 문으로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역사트레킹 팀에도 그렇게 오해를 한 참가자가 있었다.


"이 근처에 북대문이 있다고 하던데... 이게 그 북대문이에요? "

 


아니다. 홍지문은 앞서도 언급했듯이 탕춘대성이라는 보조성의 성문이다. '북대문'이 아니라는 말이다. 북쪽의 대문은 서울성곽 북악산 구간에 있는 숙정문(肅靖門)이다. 4대문에 붙여진 인의예지(仁義禮智) 중 북쪽에 해당되는 '智'가 홍지문(弘智門)에 붙여져 그런 오해가 있는 것 같다.


홍지문은 그런 명칭의 혼용 같은 내적상처 뿐 아니라 외적상처도 있다. 성곽 일부가 잘려나간 것이다. 홍지문 바로 옆으로 세검정로가 놓여 있는데 성곽 일부를 잘라서 도로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홍지문은 자동차들의 매연과 소음이 끊임없이 진동하는 곳이다. 문화재가 자동차들에 의해 압도당하는 느낌이 든다.

그보다 더 큰 상처도 있었다. 1921년 대홍수로 아주 싹 쓸려 내려간 것이다. 옆에 있는 오간대수문도 그때 싹 쓸려 내려갔다. 지금의 홍지문은 1977년에 복원한 것이다. 대홍수 이후 방치되어오다 약 반세기 만에 복원을 한 것이다.

이렇게 상처 많은 홍지문이지만 그곳 일대를 탐방하다보면 서울성곽과 북한산성이 어떻게 하나의 선으로 이어지는지를 관찰할 수 있다. 가파른 경사에 축조된 성곽이 어떻게 방어기지 역할을 했는지를 유추해 볼 수 있다는 말이다. 평소에는 수풀이 우거져 있어 잘 보이지 않지만 가을이 되면 성벽과 오색단풍이 어우러져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할 것이다.

 

 

 

 

 
▲ 석파랑 흥선대원군의 별서 사랑채였다. 전통한옥과 중국풍이 어우러진 건축양식이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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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검정(洗劍亭)보다 고향집 팔각정이 더 낫다?


 

역사트레킹 팀은 다음 탐방지인 석파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석파랑(石坡廊)은 석파정(石坡亭)에서 옮겨져 온 것인데 흥선대원군의 별서 사랑채였다. 석파정은 대원군이 사랑한 별장이었다고 한다. 현재 요릿집으로 쓰이고 있는 석파랑은 벽에 둥근 만월창을 내는 듯, 전통한옥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우리전통 방식과 중국식 양식이 조화를 이룬 건축기법이다.


석파랑에서 조금만 이동을 하면 세검정이 나온다. 세검정은 '칼을 씻었다(洗劍)'는 의미인데 광해군과 관련이 있는 곳이다. 광해군을 몰아내고자, 인조반정을 획책한 이귀, 김류 등이 칼을 갈아 씻었다고 해서 세검정(洗劍亭)이라고 명명됐기 때문이다.


석파정과 세검정에서 보듯, 이 일대(종로구 부암동)는 예부터 많은 이들이 즐겨 찾는 명승지였다. 인왕산, 북악산, 북한산이 주위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고 사천이라 불렸던 홍제천이 너럭바위 위를 유유히 흐르고 있으니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데 안성맞춤이었던 셈이다. 다산 정약용과 겸재 정선도 그렇게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린 이들이었다. 다산 선생은 <유세검정(遊洗劍亭)>이란 시를 지었고, 겸재 선생은 <세검정도>라는 부채 그림을 그려 세검정을 칭송했다.

 

 

 

 
▲ 세검정 세검정과 사천으로 불렸던 홍제천.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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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세검정은 1977년에 지어졌다. 1941년에 인근에 있던 종이공장에서 화재가 났는데 불이 옮겨 붙어 주춧돌만 남기고 완전히 소실됐다, 36년 만에 복원된 것이다. 겸재 선생의 부채 그림을 많이 참조하여 복원됐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차이가 크다고 한다. 필자가 봐도 복원된 세검정과 겸재 선생의 그림 속의 세검정은 닮아 있지 않았다. 현재의 세검정은, 얼핏 보면 그냥 평범한 동네 정자로 보일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참가자 중 한 분이 혼잣말로 이렇게 속삭였다.

"고향 마을회관에 있는 팔각정이 더 좋아 보이는데..." 
 


부채에 그려진 수려한 주위풍광은 되돌릴 없겠지만 문화재 복원만큼은 보다 더 정교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 문제는 앞서 언급한 홍지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숭례문 복원에서 보듯 부실하게 문화재를 복원하면 안 하는 것만도 못한 일이 된다. 특히 답사여행을 하는 사람들 앞에 놓인 것이 '불량 복원품'이라면, 그 답사여행자들은 얼마나 허무하겠는가? 필자 같이 자신의 두 발로 역사트레킹을 하는 사람들은 더 크게 허탈함을 느낄 것이다.

문화재 복원에 대한 의문 혹은 아쉬움을 품고, 트레킹 팀은 이항복 별서터가 있는 백사실계곡 쪽으로 향했다.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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