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호빗>을 통해 톨킨이 말 하려고 했던 것!

 

판타지를 통해 본 인간 근원의 문제

 

15.01.03 15:07 최종 업데이트 15.01.03 15:07

 

 

 

 

 

 

 

 

 

 

 

* 이 기사에는 영화의 줄거리나 주요 장면이 포함돼 있습니다.

 

 



 
▲ 호빗 영화 <호빗>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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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네요. 다른 건 모르겠는데 그 영화는 좀... 그거 판타지 영화 아니에요. 애들 보는 거요?"


<JSA 공동경비구역>, <박하사탕>, <7월 4일생> 등등 필자가 그런 영화들을 감명 깊게 봤다고 하면 상대방도 흔쾌히 수긍한다. 하지만 <반지의 제왕>에 이르면 꼭 부연 설명이 필요했다.

"원작이 워낙 탄탄해요. J.J. 톨킨 박사가 원작자인데 이 사람이 북유럽 신화에 아주 능통하거든요. 보시면 아시겠지만, 영화 자체가 하나의 잘 짜인 신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신화라는 텍스트에 인간의 욕망을 담아냈으니 하나의 대서사시가 되는 것이죠. 앞으로 이렇게 기승전결이 잘 떨어지는 판타지영화는 나오기 힘들 겁니다."

이렇게 장황하게 부연 설명을 했다는 건, 필자와 상대방의 시각이 큰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판타지 영화에 대해서 높은 점수를 주지 않는다. 애들이 보는 영화라 취급하며 낮잡아 보기까지 한다. 리얼리티가 강조될수록 후한 별점을 주는 풍토에서 요정이 활을 쏘고 용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판타지물은 그저 아이들의 영역으로만 자리매김 될 뿐이다.

 

 

 

 
▲ 호빗 엘프족 여전사 타우리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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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통해 인간의 근원을 들쳐보다


팍팍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시각으로 보자면 백색의 마법사 간달프의 주술은 로또 1등만큼이나 현실성이 없어 보인다. 또한 중간계를 짓누르는 악의 화신 사우론의 눈빛보다 옆에 있는 김 팀장의 시선이 더 싸늘해 보인다. 그래서 판타지 영화에서는 <레미제라블>과 같은 카타르시스를 아예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판타지를, '눈 뜨고 코 베어 가는' 냉혹한 현실을 빗대어보는 하나의 원초적 도구로 바라본다. 철천지원수인 엘프족의 레골라스와 난쟁이족의 김리가 당면한 목적을 위해 오월동주(吳越同舟)가 되는 모습, 더 큰 욕심 때문에 난쟁이 왕 소린이 생사고락을 함께한 부하들을 의심하는 모습 등을 보고 있자면, 인간 내면의 깊숙한 곳을 들쳐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요정족, 난쟁이족 같은 비현실적인 종족들이 오히려 인간의 근원적인 심성을 더 명징하게 표출했다고 판단한다.

SF영화와 달리 판타지영화는 물리적으로 현실화 될 수 없는 것들을 담아 놓았다. 기술이 발전하면 <스타워즈>에 등장했던 광선검 같은 무기들도 '실전배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반지의 제왕>에 등장한 엘프족이나 호빗들은 스크린 밖으로 나올 수 없다. 대신 그들은 탐욕과 무소유, 신뢰와 배신, 전쟁과 평화 같은 우리 현실세계에서 빈번하게 회자되는 개념들을 스크린에 뿌려 놓는다.

 

 

 

 

 

 

 

 

 

 

 

▲ 제복을 입은 톨킨 1차대전에 참전했던 톨킨.

풀네임은 John Ronald Reuel Tolkien 이다.  

위키피다 출전. 

 

 

 

 

 

 

 

물질문명을 지독하게 혐오했던 톨킨


원작자 톨킨은 1차대전 중 가장 치열한 전투 중에 하나였던 솜 강 전투에 초급 장교로 참전했다. 그 전투에서 친구를 잃은 톨킨은 전쟁, 더 나아가 세계대전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던 현대문명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감을 갖게 된다. 그래서인지 그는 이후 현대문명과 과학기술에서 멀찌감치 자신을 떼어 놓았다.

문헌학자였던 톨킨은 각 나라들의 언어 변천과정을 연구했는데 각 언어들에 내포되어 있는 신화적인 요소들에 매료됐다. 기계문명의 빈자리를 고대의 신화가 채웠던 셈이다.

그렇게 신화적인 상상력으로 풀어낸 <호빗>을 톨킨은 자신의 아이들에게 들려주었다.  태어난 지 3년 만에 아버지를 여윈 톨킨은, 그 자신이 평생 가질 수 없었던 부성애를 자식들의 침대 곁에서 이야기로 풀어낸 것이다. 그런 아빠의 이야기를 듣고 잠이 들었던 아이들은 꿈에서 엘프 혹은 용을 만났을지 모른다. 

 

 

 

 


<호빗 3: 다섯 군대의 전투>

2014년 12월에 개봉된 <호빗 3: 다섯 군대의 전투>는 호빗 시리즈의 최종판이다. 자신들의 왕국이었던 에르보르를 탈환하기 위해 난쟁이의 왕 소린은 원정대를 꾸린다.

원정대에는 호빗 종족의 빌보 배긴스도 포함되는데 빌보의 역할은 스마우그라는 용에게서 난쟁이들의 최고의 보물인 '아르겐스톤'을 훔쳐 오는 것이었다. 험준한 산 아래에 자리 잡은 에르보르는 원래 난쟁이들이 만든 요새였지만, 사악한 스마우그라는 용이 그곳을 파괴하고 수많은 금은보화 속에서 '꽈리'를 틀게 된다.  

결국 스마우그는 죽고, 난쟁이들은 꿈에도 그리던 잃어버린 땅을 되찾게 됐다. 소린이 자신의 왕국을 되찾은 것이다. 하지만 용이 죽었다고 끝이 아니었다. 악에 의해 이루어진 균형이, 그 악이 제거됐다고 바로 선의 의한 균형으로 넘어가지는 않았던 것이다. 후세인이 제거되자 정파주의에 의해 이리저리 찢기고, 결국에는 IS(이슬람국가)가 꽈리를 튼 이라크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에르보르의 전략적 가치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황금을 차지하기 위해 사방에서 군대들이 진격해 오기 시작했다. 그 군대들은 오크족이나 괴수족 같은 어둠의 세력뿐만이 아니었다. 엘프족도 포함되어 있었다.   

 

 

 
▲ 호빗 영화 <호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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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쳐오고 있었지만, 난쟁이 왕 소린은 전투준비에 박차를 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릇된 행동을 하게 된다. 최고의 보물이라는 아르켄스톤을 부하 중에 한 명이 미리 빼돌렸다고 의심을 했던 것이다. '황금의 저주'로 인해 눈이 멀게 된 것이다. 탐욕 때문에 생사고락을 함께 한 부하들을 다 도둑놈으로 몰아붙인 것이다.

<반지의 제왕 3>편에서도 이와 비슷한 장면이 있다. 반지를 파괴하는 임무를 지닌 프로도가 절대반지의 힘에 눈이 멀어 자신의 임무를 망각하고 스스로 반지의 주인으로 선언하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임무 수행을 위해 여러번 죽을 고비를 넘겼던 프로도였지만 정작 마지막 순간에는 반지를 용암에 던지지 못하고 주인 행세를 하려 든 것이다.

이 부분에서 원작자인 톨킨 박사는 탐욕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을 유도했는지 모른다. 채워지지 않는 무한한 욕구로 인해 인간이 궁극적으로 어떤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지를 일깨워주었다고나 할까? 난쟁이였던 소린은 피붙이와 같은 자신의 부하와 친구들에게 불신을 얻게 됐고, 호빗인 프로도는 절대반지를 끼었던 검지손가락 한마디를 잃게 됐다. 그것이 바로 현대 물질문명을 혐오했던 톨킨이 판타지를 통해 우리 인간들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대망의 2015년이 시작됐다. 유난히 사건과 사고가 많았던 지난 2014년과 달리 올해는 좀 더 달라질 수 있을까? 좀 더 행복할 수 있을까? 그러려면 인간들이 탐욕에 눈이 멀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물질에서 좀 더 자유로워야 할 것이다. 하지만 필자의 이런 언급은 '판타지'적이라고 욕을 먹을지 모른다.

"장그래로 대변되는 비정규직들이 넘쳐나고, 최저 시급의 굴레에 사로잡힌 알바생들 좀 봐! 탐욕에서 자유로워지라니, 탐욕을 부릴게 있어야 탐욕을 부리지!"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호빗>과 <변호인>

우리는 영웅이 아닌 친구가 필요하다!

 

13.12.28 14:53l최종 업데이트 13.12.28 14:53l

 

 

"호빗? 그거 서울에서 안 하잖아."
"그래서 광명까지 갔다 왔어요."
"그렇게까지 가서 볼 필요 있냐? 그거 그냥 블록버스터잖아!"
"……"

선배형은 호빗에 대해서 그냥 시큰둥한 평가를 내렸다. 그 와중에 옆에 있던 후배 녀석이 선배형을 거들면서 이야기를 했다.

"호빗 그거 난쟁이 영화 아니에요? 해리포터 같은... 전 그런 영화는 별로던데... 차라리 변호인 봐요. 그거 재밌다고 하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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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화산 봉화산에서 바라본 봉하마을. 중앙 하단에 있는 삼각형 모양의 땅이 노무현 대통령의 묘소이다. 사진에서 보듯 봉하 마을은 '깡촌'이다. 이곳에 '아방궁'이 들어설 수 있겠는가? 2011년 여름, 남도횡단 자전거여행 때 찍은 사진이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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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빗>과 판타지


그렇다. <호빗 (The Hobbit : The Desolation of Smaug)>은 난쟁이들을 다루었고 해리포터 같은 판타지 영화다. 필자는 호빗들처럼 '짝달막'한데다 판타지 장르를 즐겨 본다. 그래서 멀리까지 가서 보고 온 것이다. 로맨틱코미디는 '닭살'스럽고 공포영화는 '개그콘서트' 보는 것 같지만 판타지 영화에는 팝콘의 유혹을 물리칠 정도로 몰입을 한다.

인간의 근원적인 양태와 희로애락을 신화적인 상상력 안에서 풀어내는 판타지, 필자는 그런 판타지 장르를 선호한다. 불을 내뿜는 용들이 날아다니고 천상의 요정들이 미모를 뽐내는, 그런 화면 가득한 볼거리에 정신이 팔리는 것이 아니다. 물고 물리는 복잡한 스토리 속에서 인간 내면의 '쌩얼'이 꿈틀거리기에, 판타지를 좋아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호빗 2편의 개봉을 손꼽아 기다렸다. 하지만 배급사와 영화관과의 수익배분 문제 때문에 서울에서 호빗을 보기 어려웠고, 그래서 인근에 있는 광명시까지 가서 보고 왔던 것이다.

영화 취향이 천대를 받아서 그랬는지 필자는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래서 <호빗>과 <반지의 제왕>의 원작자인 존 로널드 톨킨(J.R.R.) 박사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톨킨 박사는 세계1차 대전에 참전을 했는데 그런 경험들이 그의 작품에 녹아 있다. 솜강 전투라는 1차 대전 중 최대의 격전에 참가했던 톨킨은 현대 문명에 대해 큰 회의를 품었고, 전후 북유럽과 켈틱 신화에 대해 깊이 매료됐다. 탐욕적인 근대 문명를 크게 혐오하고 물질문명 이전세계에 포커스를 맞추었다. 이런 이야기를 힘주어 말했다. 하지만 역시 시큰둥한 반응만 돌아올 뿐이었다.

"어차피 그거 해리포터처럼 애들이 많이 보는 거잖아?"

 

 


# 스크린의 안의 문제를 스크린 밖으로까지 끄집어낸 <변호인>

 


지난 월요일 오후. 동장군의 위세가 꺾이긴 했지만 밖은 여전히 추웠다. 찬바람이 불면 온몸이 다 부르르 떨릴 정도였다. 하지만 <변호인>을 상영하는 극장 안은 후끈했다. 상대적으로 한가한 월요일 오후 4시경 영화였지만 좌석은 많은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다. 필자도 자리를 잡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역시 젊은 커플들이 많았지만 나이가 지긋한 분들의 얼굴도 눈에 들어왔다.

사실 <변호인>에 대한 첫 느낌은 썩 좋지 않았다. 개봉 전부터 너무 떠들썩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는 생각에 괜한 반발심부터 앞섰던 것이다. 영화라는 매개물로 고인을 '팔아'먹는다는 느낌이 들었고, 또한 배우 송강호(송우석 역)와 노무현 대통령이 서로 잘 매칭도 되지 않았다. 수더분한 얼굴의 송강호를 보면 웃음부터 나오기 때문이었다. 노무현을 보면 웃음부터 나오지는 않았기에...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필자의 첫 느낌은 송강호의 넉살 좋은 연기에 서서히 무너져 내려갔다. '깔깔깔' 웃음소리와 함께. 그리고는 왜 이 영화가 2013년 최고의 영화중에 하나라고 불리는지도 깨닫게 됐다. 스크린 속에 그려진 우울한 시대의 단면을 영화관 밖으로 끄집어냈기 때문이다. 그 장면들이 단지 전두환 시대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환기시켰기 때문이다. 건전한 상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스크린 안에서는 끔찍한 고문과 탄압에 분노를 했을 것이고, 극장 밖에서는 현재 우리 앞에 놓인 민주주의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했을 것이다. 

극중에서 송우석 변호사가 고문 경찰관인 차동명에게 사자후와 같은 열변을 토하지만, 차동명 세력'은 쉽게 꺾이지 않았다. 무척 강했고 지금도 강하다. 1981년 부림 사건의 피의자들에게 '북한의 지령'이라는 죄목이 뒤집어 씌어졌다면, 2013년 진보·개혁세력에게는 '종북좌파'라는 비난이 그들에 의해 덧씌워져 있다.

3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갔지만 '차동명 세력'은 자신의 과오를 참회하기는커녕 오히려 상대편에 '종북좌파' 딱지붙이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어쩌면 그들은 항상 '이기는 싸움'만 해왔는지 모른다. 물론 잠깐 숨을 고른 적은 있었겠지만.

그런 '차동명 세력'은 앞으로도 계속 이 나라를 좌지우지할지 모른다. 지금으로부터 30년 후에도 계속 자신의 반대편에게 '딱지'를 붙이고 있을지 모른다. 차동명이 부림사건 시절에는 공안경찰로 등장했다면 앞으로는 다른 모습으로 등장할 수도 있다. <교학사 역사교과서>라는 얼굴로 나타날 수도 있고, 공공기관 민영화라는 '스타일'로 포장될 수도 있다. 현재는 국정원과 군 사이버사의 댓글로 나타난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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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하마을 경작지 봉하마을에서 공동경작을 하는 논이다. 2011년 여름, 남도횡단 자전거여행 때 찍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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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영웅이 아닌 친구가 필요하다!


판타지에는 어김없이 영웅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일당백이 되어 악당들을 물리친다. <호빗>이나 <반지의 제왕>에서도 수많은 영웅들이 악의 세력에 맞서 정의의 칼날을 휘두른다. 백색의 마법사 간달프는 악의 화신인 사우론과 당당히 맞서고,  꽃미남 엘프 레골라스는 거침없이 정의의 화살을 날린다. 간달프와 레골라스의 한방에 오크족과 고블린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나가고 결국 강성했던 어둠의 세력들은 멸망하게 된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반신반인'의 영웅이 나타나 세상을 좌지우지 하는 식의 이야기는 말그대로 '판타지'일 뿐이다. 최강의 포스를 가진 판타지 영웅이 나타난다고 해도 우리시대의 당면과제인 사회양극화, 청년실업, 남북문제 등을 '한방'에 풀어줄 수는 없을 것이다. 슈퍼맨, 베트맨, 정도령, 원더우먼, 오디세우스 등 동서양의 영웅들이 한꺼번에 다 등장한다고 해도 역부족일 것이다.

현실의 문제는 결국 생활인들이 풀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웅이 아닌 친구가 필요하다. 기소된 송우석 변호사를 위해 이름을 올린 99명의 변호인들처럼 묵묵히 자리를 지켜주는 고마운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안녕 대자보를 붙일 때 청테이프를 끊어 주는 친구, 그 대자보를 찬찬히 읽고 따뜻한 캔커피를 건네주는 친구가 필요한 것이다.

오늘은 동장군의 기세를 누를 따끈한 국물이 그리운 날이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돼지국밥 한 그릇이면 속이 든든히 채워질 거 같다. 소중한 친구와 지인들을 모아 따뜻하게 저녁식사를 하고 술잔을 기울이고 싶다. 사람사는 세상을 이야기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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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의 자전거와 내 자전거 오른쪽에 있는 자전거는 노무현 대통령의 것이다. 대통령의 자전거는 단출했지만 필자의 자전거는 무거운 짐들이 잔뜩 실려있다. 고물이고 자세도 안 나오는 내 자전거! 그래도 같이 사진 찍어주는 친구가 생겼네! 2011년 여름, 봉하마을에서 찍은 사진이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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