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옛 도시에 남겨 놓은 물음표들

 

[22일간의 스페인 여행 ⑩] 바야돌리드 2부

 

15.01.26 17:02  최종 업데이트 15.01.26 17:04

 

곽동운(artpunk)

 

 

 

 

 

 

이전 여행기에서 'Valladolid'를 '발라돌리드'라고 표기를 했으나 어떤 독자분이 그 표기가 합당하지 않다는 고견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번 여행기부터는 '바야돌리드'로 표기를 수정했습니다. 더 정확하게 사실관계를 확인한 후 기사작성에 임하겠습니다. 고견을 주신 독자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 기자말

 


전편에도 언급했듯이 바야돌리드는 유서가 깊은 도시다. 그래서 이 도시와 관련된 역사 인물들도 많다. 먼저 펠리페 2세가 있다. 그는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투르쿠를 물리쳐, 유럽에서 이슬람 세력을 완전히 몰아냈다. 그 레판토 해전에서 승리한 스페인 함대를 두고 무적함대라는 별명이 붙었다. 스페인 축구대표팀을 두고 '무적함대'라고 칭하는 데 그 명칭의 기원은 펠리페 2세 치하의 스페인 함대였던 것이다.

이 도시에서는 전 유럽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지켜봤던 결혼식도 거행됐었다. 카스티야 왕국의 왕위 계승자 이사벨라 1세와 아라곤 왕위 계승자 페르난도 2세가 그 결혼식의 주인공들이었다. 촉각을 곤두세웠다는 것은 방해자들이 많았다는 뜻이다. 왕실의 결혼식이었지만 그들은 추격자들을 따돌리며 예식을 올렸어야 했다. 그만큼 이 결혼식은 '세기'의 웨딩마치였다.

이런 정치인들 이외에도 대문호인 세르반테스와 탐험가 콜럼버스가 바야돌리드와 인연을 맺고 있다.

 

 

 

산타크루즈 궁과 '황금' 도서관

 


 
▲ 산타 크루즈 궁 산타 크루즈 궁(Santa Cruz Place). 수도원의 회랑식으로 지어진 궁. 사진 사진 아래에는 해시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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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산타크루즈 궁(Santa Cruz Place)로 향했다. 1486년 멘도사 추기경에 의해 건립이 된 산타크루즈 궁은 4년여의 기간 동안 지어진 건물이다. 산티아고 대성당이 완공되는 데 150년 이상 걸렸던 것에 비하면 무척 빨리 시공된 셈이다.


공사기간이 짧았음에도 이 궁전은 건축 중에 드라마틱한 변화를 겪게 된다. 처음에는 고딕 양식으로 지어지다가 이후에는 르네상스 양식으로 전환됐다. 그러다 18세기에는 벤츄라 로드리게스가 신 고전양식을 가미하여 궁을 손보게 된다.

산타크루즈 궁은 반원형의 아치가 인상적인 3층 건물이다. 각층은 수도원 형식의 회랑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왕이 거주했던 궁치고는 상당히 소박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런 소박함 중에서도 사치스러운 공간은 있었다.

2층에 예배당과 함께 도서관이 있었는데 고 장서들이 번쩍번쩍 빛을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금테를 두른 황금 도서관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 장서들은 그레고리 페르난데즈가 모은 것들이란다. 책값만 해도 엄청나다고 한다.

 

 

 

 

 

▲ 황금 도서관 산타크루즈 궁에 있는 도서관.

유리 너머로 찍어서 좀 깨지게 나왔다.  

 

 

 

 



대학도시 바야돌리드와 세르반테스

 


산타크루즈 궁의 화원을 가로 질러가면 바야돌리드 대학의 입구가 나온다. 바야돌리드 대학은 1241년에 건립됐는데 1254년에 등장한, 그 유명한 살라망카 대학보다 더 오래된 대학이다. 사실 바야돌리드 대학의 모태는 팔렌시아(Palencia : 동부에 있는 '발렌시아'와 다른 도시) 대학이었다. 팔렌시아 대학은 1212년에 건립됐다. 이후 바야돌리드로 이전하여 더 큰 발전을 이루게 된 것이다.

시가지에는 바야돌리드 단과대들이 분산되어 있다. 또한 2002년에는 대문호인 세르반테스 이름을 딴 미구엘 세르반테스 대학(Miguel de Cervantes European University)이라는 사립대학도 세워졌다. 그래서 이 도시 자체는 커다란  캠퍼스 같다는 느낌이 든다.

 



 
▲ 세르반테스 생가 바야돌리드에 있는 세르반테스의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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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시에는 세르반테스의 생가도 있다. 세르반테스의 아버지는 귀족 출신이었지만 무능했다. 그 여파로 고향을 등지고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했다고 한다. 바야돌리드도 그 중 하나였다.


세르반테스도 앞서 언급한 레판토 해전에 참전했다. 전투 중에 그는 왼쪽 팔에 큰 부상을 당한다. 그 때문에 평생 왼쪽 팔을 쓰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레판토 외팔이'라는 별명까지 얻게 될 정도였다.

하지만 설상가상이라고 그의 불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타고 있던 배가 납치되어 5년 동안 포로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돈키호테>도 세비야에 있는 감옥에서 구상을 했다고 하니, 세르반테스의 삶도 그 자체로 한 편의 소설인 셈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필자가 생가를 방문했을 때는 휴관을 하고 있었다. 안타까웠지만 발길을 돌려야 했다.

한편 이 도시에는 학교만 많은 게 아니다. 궁전도 많다. 앞서 언급한 산타크루즈 궁외에도 피멘텔 궁(Palace Pimetel)이나 비베로 궁(Palace Vivero) 등 여러 궁전 건물이 있다. 특히 비베로 궁은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라 1세와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2세가 결혼식을 올린 곳이기도 하다.

 

 

 


 
▲ 콜럼버스 동상 거대한 콜럼버스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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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9년 행한 두 사람의 결혼으로 인해 스페인의 국토회복운동은 더욱더 활기를 띠게 된다. 이후 마침내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 세력들이 축출되기에 이르는데 그때가 1492년이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찾아 떠난 그 해였다.


바야돌리드는 콜럼버스가 숨을 거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기차역 앞에 있는 콜론 광장이라는 곳에는 그의 동상이 크게 세워져 있었다. 워낙 동상이 커서 그런지, 철없는 동네 아이들은 그 동상에 올라가서 놀기도 했다.

 

 

 



미완성으로 남아 있는 바야돌리드 대성당

 

 


 
▲ 바야돌리드 대성당 바야돌리드 대성당(Valladolid Cathedral). 뒤쪽으로는 산타마리아 안티구아 교회가 보인다. 대성당은 바로크 양식의 건물이고, 안티구아 교회는 로마네스크 양식이다. 두 건물이 잘 보이는 카페가 있는데 그곳에 앉으면 서양미술사 공부가 저절로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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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야돌리드 대성당 재정난에 휩싸여 아직까지도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정돈되지 않은 성당의 뒤편을 담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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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소개할 곳은 바야돌리드 대성당(Valladolid Cathedral)이다. 이 대성당은 우여곡절이 많은 건물로 아직까지도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1595년 9월, 교황 클레멘스 8세의 승인에 의해 바야돌리드에 새롭게 주교 관할구가 설치된다. 이에 시 위원회는 에스파냐 땅에서 가장 큰 성당을 짓기로 결의 한다.


당시는 국왕 펠리페 2세가 바야돌리드에 거주하며 에스파냐를 통치하던 시기였다. 펠리페 2세의 고향은 이곳 바야돌리드였다. 왕이 거주하니 이 도시는 사실상의 도읍지였던 셈이다. 도시에 주교 관할구가 생성됐고, 도읍지 역할까지 하고 있으니 에스파냐 땅에서 가장 큰 성당을 짓겠다는 시 위원회의 결의가 결코 허망한 것은 아니었다.

 

 

 


 
▲ 산타마리아 안티구아 산타마리아 안티구아 교회(Santa Maria Antigua).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이다. 언뜻보면 예배당이 아니라 성처럼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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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세상 일이 생각만큼 쉬운 일이겠는가? 1606년, 펠리페 3세는 수도를 마드리드로 이전한다. 이에 도시의 정치적 위상도 추락하게 된다. 중심권에서 벗어나니 시 재정도 그만큼 타격을 입게 됐고, 대성당의 건립에도 악영향을 끼치게 됐다. 결국 대성당 건립은 미완으로 남은 채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편 바야돌리드 대성당 뒤편에는 산타마리아 안티구아(Santa María Antigua) 교회도 있다. 필자는 그 두 건물이 잘 보이는 바르에 앉아 느긋하게 커피 한 잔을 마셨다. 대성당은 에레라(Herrerian)라는 스페인식의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반면, 안티구아 교회는 길쭉한 종탑이 인상적인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져 있었다. 그 둘을 비교하면서 바라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었다. 참고로 안티구아 교회는 마요르 광장에 서 있는 콘데 안스레스에 의해 12세기에 첫 삽을 떴다.

 

 

 

 



정교한 석조 양식으로 유명한 산 파블로 교회


 
▲ 산 파블로 교회 산 파블로 교회(San Pablo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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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탐방지는 도미니크 수도회 소속 건물인 산 파블로 교회(San Pablo Church)다. 섬세한 조각상들이 여행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이 건물은 1270년 경에 처음으로 짓기 시작했다. 이후 1550년 경에는 건물 정면을 섬세한 조각들로 새겨 넣게 된다.


이렇게 건물 정면을 정교하게 꾸미는 기법을 두고 파사드(facade)라고 한다. 파사드는 건물을 돋보이게 할뿐더러 자체의 위엄을 높이는 형식으로 작동된다. 이렇듯 파사드가 적용된 산 파블로 교회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딕 양식 건물로 손꼽히고 있다.

사진을 찍으려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몇몇 석조상들은 훼손이 된 상태였다. 인물을 형상한 조각들이었는데 어떤 것은 팔다리가 잘려나가기도 했고, 어떤 것들은 목이 없기도 했다. '시간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이 석조상들에도 적용됐다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 산 파블로 교회 떨어져 나간 장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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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 파블로 교회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쇠락한 제국의 한 귀퉁이를 돌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저런 화려한 장식들 이면에 드러나지 않은 당시 스페인 백성들의 노고를 떠올리기도 했다.


'저런 화려한 건축물이 나타나기까지 얼마나 많은 백성들의 피와 땀이 필요했을까? 또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수탈은 어떻고?'

솔직히 필자는 바야돌리드 대해서 잘 몰랐다. 하지만 그곳에 가지 않았으면 무척 후회했을 것 같다. 생각지도 못한 보물 상자를 얻은 느낌이 들 정도로 흥미로운 여행이었으니까. 그렇다고 화려한 유물들을 탐방하며 감탄사만 연발하지는 않았다. 많은 물음표도 남기고 왔다. 그런 물음표들은 다음 여행을 위한 밑거름으로 삼을 생각이다. 단순히 사진을 찍기 위해 옛 도시를 가는 것은 아니니까….

 

 



도움말

 

1. 바야돌리드는 마드리드에서 버스로 약 2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마드리드 국제 공항에서 출발하는 공항버스도 있다. 그 버스는 약 3시간 정도 소요된다.

2. 마요르 광장을 중심으로 반 시계 방향으로 돌면서 시티투어를 할 수 있다. 소요 시간은 3~4시간 정도. 단 길이 좀 복잡하니 주의해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소 귀로 만든 음식, 혀를 녹이는 맛이네

 

[22일간의 스페인 여행 9] 발라돌리드 ①

 

15.01.25 21:30   최종 업데이트 15.01.25 21:30

 

곽동운(artpunk)

 

 

 

 

 

 

 
▲ 산 파블로 교회 산 파블로 교회(San Pablo Church)는 정교한 석조물로 정면을 꾸몄다. 발라돌리드를 대표하는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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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16일, 여행 14일째. 산티아고 순례길 도보 여행을 마친 후, 필자는 순례팀과 작별하고 개별 배낭여행 형식으로 일정을 이어갔다. 함께 북적북적대며 여행하는 재미와도 작별해야 했다. 이제부터는 고독한 '단독 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여태껏 단체 여행의 장점을 누렸으니 이제는 단독 여행을 누려볼 차례였다.

 



배낭여행의 첫 목적지, 발라돌리드

여행 동선을 크게 잡지는 않았다.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를 중심으로 중부권 영역 일대만 여행 대상으로 삼았다. 스페인에 가면 꼭 들러야 한다는 바르셀로나와 이슬람의 역사가 남아 있는 남부 안달루시아 지역은 제외하기로 했다. 그렇게 골랐더니 발라돌리드, 세고비아, 톨레도 등 세 개의 도시가 정해졌다.

 

 


 
▲ 발라돌리드 중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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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라돌리드(Valladolid)가 그 첫 번째 여행지였다. '바야돌리드'라고도 불리는 이 도시는 마드리드에서 북서쪽으로 약 200km 정도 떨어져 있다. 마드리드에서 버스로 약 2시간 30분 정도 달리면 도달할 수 있는 이곳은, 중세 시대에 대학이 만들어졌을 정도로 유서가 깊은 도시다.


마드리드에서 16유로를 주고 발라돌리드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스페인 버스는 우리나라 버스보다 더 크고, 좌석도  많았다. 화장실까지 갖춘 곳도 있었다. 심지어 국제선 여객기에서나 볼 수 있는 개별 모니터가 장착된 버스도 있었다. 그 모니터로 음악을 듣기도 하고, 영화도 볼 수도 있다. 게임도 가능하다. 아무래도 국토가 넓고, 주행 시간이 길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스페인에서 한반도를 떠올리다


한편, 장애인이 고속버스를 타는 데 용이하도록 리프트 장비가 설치된 버스도 있었다. 그냥 '보여주기'식으로 한 두 대 정도가 배치된 것이 아니었다. 꽤 많은 리프트 버스가 운행되고 있었고, 또한 그 노선도 다양했다. 우리나라의 리프트 버스 배치 상황을 생각해보면 정말 부러운 광경이었다. 이동권 약자들도 당당하게 대중교통을 탈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그곳은 선진국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스페인 고속버스 스페인의 고속버스는 직행버스 개념이다. 논스톱으로 가지 않고 몇 군데를 들렀다 가는 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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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라돌리드 행 버스에도 개별 모니터가 있어 필자도 음악을 들으며 차창 밖을 응시했다. 창문 밖에는 시원스런 풍광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베리아 반도의 중앙은 카스텔라 레온(Castilla y León) 지역인데 이곳은 드넓은 평원 형태를 띠고 있었다. 광활한 평원이 드문 국토, 거기다 남북이 갈려 섬처럼 고립된 우리땅이 생각났다. 그렇게 좁은 국토에 살면서도 지역 감정이니, 동서 갈등이니 하는 식으로 감정의 골이 패니 그저 착잡한 심경이 들 뿐이었다.


바스크와 카탈루냐의 분리 운동으로 유명한 스페인에서, 한국의 지역 감정에 대해 떠올리는 것은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일일지 모른다. 잘 알려지다시피 스페인에 비하면 한국의 지역감정은 양호한 수준이기 때문이다.

바스크와 카탈로니아 문제는 1천 년 이상의 시간이 녹아 있다. 그 시간 속에는 이슬람 세력과의 항쟁 과정 속에서 나온 부산물도 또아리를 틀고 있다. 분리주의 운동이 하루 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한국인은 나 혼자


주위 풍광에 매료되는 걸 멈추고, 문득 버스 안을 둘러봤다. 자세히보니 오직 필자만 동양인이었다. 마드리드에서도 산티아고에서도, 심지어 땅끝이었던 피스테라에서도 동양인은 물론 한국사람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그만큼 한국인이 해외 여행을 많이 다닌다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발라돌리도에서는 가는 버스뿐 아니라 현지에서도 한국인을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고독한 단독 여행을 위한 장치(?)들이 제대로 갖춰진 셈이다.

'그래 한국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이 곳에서 진정한 배낭여행자가 돼 주지! 어차피 배낭여행도 숙식만 해결되면 반 이상은 먹고 들어가는 거잖아!'

그렇게 다짐한 후 남은 여비를 생각해봤다. 순례길에서 워낙 저렴하게 숙식을 해결해서 그런지 여행 14일째인데도 300유로 밖에 지출하지 않았다. 그때까지 40만 원도 안 되는 돈으로 2주 정도를 버틴 것이다. 이것만 봐도 산티아고 순례길이 얼마나 도보 여행자에게 친화적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캄포 그란데에서 새들과 옥신각신


 
▲ 캄포 그란데 공작새가 노닐던 캄포 그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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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시대에 만들어진 도시답게 발라돌리드는 여러 문화 유적이 산재해 있다. 하지만 시가지가 크지 않아 그 유적들을 도보로 다 둘러볼 수 있었다. 일단 버스 터미널에서 빠져 나온 후 처음 방문한 곳은 캄포 그란데(Campo Grande)라는 공원이었다. 스페인어로 'Campo'는 '초원' 혹은 '들판'이란 뜻이고, 'Grande'는 '큰'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마디로 캄포 그란데는 '큰 들판'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삼각형의 틀을 가진 캄포 그란데는 이 도시 사람들이 무척 사랑하는 공원이다. 이곳은 새들의 천국으로, 공작새를 비롯한 비둘기, 오리, 거위들이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특히 공작새가 눈에 많이 띄었는데 어떤 녀석은 갈 길 바쁜 필자 뒤를 졸졸 따라 오기도 했다. 먹이를 달라는 것이다.

"가라! 나 먹을 것도 없어!"

그래도 공작새는 양반이었다. 연못에 사는 거위 한 마리는 아예 필자의 손가락을 낚아챌 듯 덤벼들었다. 괘씸한 생각에 계속 먹이를 주는 척하며 손을 거두기를 반복했다. 그랬더니 신경질을 내듯 "꽥꽥"대며 물 안쪽으로 들어가는 게 아닌가. 필자의 승리였다. 이렇듯 새들과 옥신각신하는 재미 때문인지 캄포 그란데는 남녀노소 불문하고 발길이 끊이지 않은 곳이었다. 

 

 

 



김치와 고추장이 동시에 생각나는 요리

 


 
▲ 오레자 갈레가 (Oreja Galle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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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시청 건물이 있는 마요르 광장(Plaza Mayor)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좋다. 발라돌리드 마요르 광장은 상당히 규모가 큰 광장으로, 이 도시 사람들이 모임 장소로 애용하는 곳이다. 노천 카페가 광장을 둘러싸듯 즐비해 있고, 인근에는 저렴한 가격으로 식사를 할 수 있는 식당도 많았다. 여행 안내소에서도 마요르 광장 거리에는 맛 좋은 바르(bar)와 카페가 많다며, 꼭 거기서 식사를 해보라고 권할 정도였다.


필자도 광장 인근에 있는 바르에서 오레자 갈레가(Oreja Gallega)라는 음식을 주문했다. 가격이 4유로로 무척 저렴했기에 그 요리를 택한 것이다. 값이 싸기에 그저 간단한 샐러드 요리가 나올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무슨 비계 껍데기가 나왔는데 외관부터가 아주 비호감이었다. 딱 봐도 느끼함이 흘러내렸다. 그래도 그냥 물러설 수 없었다. 아까운 음식을 버릴 수도 없지 않은가? 보기에는 그래도 맛은 별미일지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포크를 집어 들었다.

'음... 김치와 고추장이 동시에 생각나는 요리는 난생 처음이야. 아주 느끼한 맛이 혀 전체를 녹여버리는 느낌이군... 젠장!'

 

 


 
▲ 케밥 이 케밥도 느끼해 보이시나? 좀 느끼하긴 했어도 케밥은 먹을만 했다. 양도 많아서 반은 먹고, 반은 남겨서 도시락을 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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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만큼 느끼한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도 오레자 갈레가를 맛본다면 분명 필자와 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오레자 갈레가는 소의 귀를 잘라서 만든 요리였다. 그리고 그 느끼한 맛을 음미하며 먹는 요리라고 했다.


달리 이야기하면 한국 사람이 요리를 먹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하다는 뜻일 것이다. 소 귀 요리인 줄도 모르고 덥석 주문했다가는 느끼함으로 아주 몸서리를 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억지로 식사를 마친 후문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옆 카페에 붙은 광고지를 보고 다리에 힘이 풀리고 말았다.

'앗! 옆에 일식집이 있었네. 초밥이 비싸지 않네...'

 

 

 

고독함을 뼛속까지 체험한 밤

 


 
▲ 야경 발라돌리드 시가지의 야경. 캄포 그란데 입구쪽에서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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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럭저럭 식사는 해결됐다. 이제 문제는 잠잘 곳이었다. 지금까지 산티아고 순례길의 알베르게 요금에 익숙한 터라 호스텔 비용이 걱정이었다. 그나마 호텔은 눈에 잘 띄었는데 호스텔은 눈에 잘 보이지도 않았다.


도시가 오래돼서 그런지 발라돌리드는 좁은 골목길이 많았다. 어둠이 내리자 골목길이 더 좁게 느껴졌다. 골목길을 헤매며 값싼 호스텔을 찾아 나섰다. 그러다 호스텔 파리라는 곳이 눈에 띄었다.

"뭐요? 40유로요?"

필자는 멈칫했다. '호스텔 비용이 40유로나 하다니! 조금 더 보태서 호텔에 들어가는 게 낫지!' 그냥 두 말 없이 발길을 돌렸다. 6유로로 1박을 할 수 있는 공립 알베르게가 무척이나 그리운 순간이었다. 

저렴한 숙박지를 찾아 열심히 발라돌리드를 걸어 다녔다. 밤 길이라 그런지 계속 같은 골목을 뱅뱅 도는 느낌이었다. 설상가상이라고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낯선 타국의 골목길을 걷고 또 걸었다. 그러다 결국에는 호스텔 리마라는 곳을 찾아냈고, 25유로를 주고 1박을 할 수 있게 됐다. 발품을 팔았더니 그나마 저렴한 숙소를 찾아낸 것이다.

고독한 단독 여행의 특징을 뼛속까지 체험한 밤이었다. 북적북적하던 알베르게가 그리운 밤이었다. 냄새는 났지만 서로 간의 격려가 넘치던 알베르게로 돌아가고 싶은 밤이었다. 발라돌리드의 문화유적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편에 이어진다.

 

 


 


 
▲ 마요르 광장 발라돌리드 마요르 광장. 꼰데 안수레스(Conde Ansurez) 동상이 있다. 페드로 안수레스라고도 불리는 이 인물은 에스퍄냐 북서부 지역의 유명한 백작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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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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