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데기 앞에서 주름잡기?

토박이와 함께 한 공주역사트레킹

 

 

이번 트레킹 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데...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다고, 이거 괜히 공주토박이 앞에서 망신당하는 거 아니야?’

 

역사트레킹을 진행하다보면 흥미로운 에피소드들이 톡톡 튀어나옵니다. 제 리딩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중간에 집에 가버리는 분. 그것도 아무런 말씀도 없이... 험한 서울 성곽길을 걷는데 하이힐을 신고 오신 분. 트레킹에는 관심이 없고 이성의 연락처를 얻는 데만 혈안이 되신 분 등등...


몇 해 전, 가을경에 행했던 공주역사트레킹에서도 재미난 에피소드가 있었습니다. 바로 공주 토박이 분이 참가를 했던 것입니다. 그것도 공주 시청에서 근무하는 분이 참가를 한 것입니다. 좀 긴장이 되더군요. 괜히 밑천이 드러날까 조마조마하기까지 했습니다.

 





* 우금티. 우금티에 쓰러져 있는 조형물. 원래는 서 있었는데 지금은 쓰러져 있다. 120여 년 전, 우금티에서 쓰러져 갔을 농민군들의 모습이 겹쳐져서 그런지, 보고 있으면 마음이 애잔해진다.






 

토박이에게 선수를 빼앗기다!

 

공주역사트레킹의 시작점은 공산성입니다. 동학농민전쟁 당시 전봉준 부대가 가고자 했던 성이 바로 공산성입니다. 공주성이 공산성이라는 것이죠.


현재의 공산성 일대는 삼국시대부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475년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현 공주)으로 천도했을 때 이곳은 왕성이었고, 536년 사비(현 부여)로 천도했을 때는 북방성으로 불리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당나라 소정방에 의해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백제가 역사속으로 사라졌을 때, 의자왕이 있던 곳도 사비성이 아닌 바로 이곳 공산성이었습니다.


공산성의 현재 모습은 조선 후기 시대에 그 틀이 잡혔습니다. 임진왜란의 영향으로 인해, 1602년 충청감영이 충주에서 공주로 이전했고, 그에 따라 공산성도 개·보수가 이루어졌습니다.





* 진남루: 공산성 진남루. 남쪽에 위치해 있다.





매표소가 있는 금서루 부근에서 이런 기본적인 설명을 하며 서쪽 성곽을 둘러갔습니다. 서쪽 성곽에서는 멀리 황새울이라는 천주교 성지가 보이는데 그 지점에 다다랐을 때 공주토박이 참가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기 건너편 십자가 표시 보이시죠? 저기가 황새울이라는 곳인데요. 저기서 천주교 신자가 많이 죽었어요. 그래서 황새울 성지로 불러요.”


! 그건 제가 설명하려고 했는데...”

 

선수를 빼앗긴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시선을 되찾아오기 위해 서둘러 첨언을 했습니다.

 

저 건너편에 공주 감영이 있어서 그랬어요. 사실 천주교 신자가 가장 많이 희생된 곳은 여기 공주라고 하더군요. 감영이 있어 충청지역의 천주교도들이 여기로 다 붙잡혀 온 거에요. 그래서 희생이 컸던 거고요.”

 

염려했던 일이 발생했지만 그럭저럭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식은땀 한 방울을 흘리며 서둘러 쌍수정(雙樹亭)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 산책로: 공산성 산책로.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기... 참 힘드네!

 

1624년 인조는 이괄의 난을 피해 공산성으로 파천(播遷:임금이 도성을 떠나 피난을 하는 일)했습니다. 인조는 성 안에 있는 나무 두 그루 아래에서 반란이 진압되길 간절히 기원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이괄이 부하의 배신으로 참수됐다는 소식에 기뻐하며 그 나무 두 그루(쌍수)에 정삼품의 작위(통훈대부)를 내립니다.


이후 영조 11, 그 자리에 정자가 세워졌으니 이것이 바로 쌍수정입니다. 처음에는 삼가정이라고 불렸으나 이후 쌍수정이 되었고, 오늘에 이르고 있지요. 한편 이런 스토리텔링 때문인지 공산성은 조선시대 쌍수산성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쌍수정에 대한 대략적인 이야기를 하고 금강이 보이는 성의 북면으로 이동을 하려고 할 때였습니다. 인조와 관련된 설명을 하나 더 준비를 했는데 기억이 안 났습니다. 무슨 떡 이름이었는데 기억이 안 나서 그냥 북면 쪽으로 이동을 하려 했습니다. 찜찜한 마음을 뒤로 하고 선두로 나서는데 뒤쪽에서 그 떡 이름과 그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더군요.

 

인조가 이곳에 와서 6일 동안 머물렀는데 인근에 사는 임씨 집안사람이 떡을 받쳤데요. 인조는 그걸 맛있게 먹었고요. 당연히 그 떡 이름을 물어봤겠죠. 그런데 이름이 없던 거에요. 그래서 이후에 임씨 집안에서 만든 맛있는 떡이라고 해서 인절미가 된 거라고 하더군요.”

 

또 그 토박이 분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못한 설명을 그 분이 직접 대신해주었습니다. 저는 멋쩍은 나머지 서둘러 입을 열었습니다. 그래도 명색이 역사트레킹 마스터 아닙니까!

 

“‘변화돼서 결국 인절미가 된 거에요. 그나저나 갑자기 인절미가 땡기네...”

 

괜히 애꿎은 인절미 타령을 하며 그 순간을 벗어났습니다. 역시 토박이 앞에서 해당 지역을 설명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번데기 앞에서는 주름을 잡는 게 그렇게나 힘들 줄이야!

 

 





* 임류각: 공산성 임류각. 백제 동명왕 시대 건축물이다. 1980년대 복원한 것이다.






 

공산성을 떠나 우금티로 향하는 길

 

공산성 탐방을 마친 트레킹 팀은 중동성당을 지나 본격적인 도보여행에 나섰습니다. 옛 공주 읍내는 분지형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시가지를 두고 둥글게 산들이 둘러싸고 있는 모습입니다. 공주 분들은 이를 두고 공주대간이라고 부르더군요

 

그렇게 공주대간을 타고 가는 중간에 우금티와 관련된 설명들을 간략하게 했습니다. 1894년 갑오년에 있었던 국내정세, 청나라의 파병을 빌미로 국내로 출병한 일본군, 청나라와의 전쟁 중이라 후방지역의 준동을 심각하게 판단했던 당시 일본 정부, 일본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청나라 폐잔병들 일부가 동학농민군에 합류했다는 사실 등등...


우금티로 향해가는 의미를 확실히 전달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입니다. 참가자들 중에는 이미 동학농민전쟁과 우금티에 대해서 알고 있는 분들도 있었고, 처음 듣는 듯 생소한 눈빛을 보내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 금학생태공원. 금학생태공원을 걷고 있는 트레킹팀.






이미 그 관련 내용을 알고 있든, 아니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건 우리가 공산성을 출발하여 우금티로 가는 것이었고, 그곳에서 120년 전의 사건을 떠올려 보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의미심장한 다짐을 하고 나섰습니다.


하지만 의외의 복병(?)을 만났습니다. 복병은 바로 밤송이들이었습니다. 공주역사트레킹을 행했을 때가 가을경이어서 그랬던 것입니다. 밤 막걸리에서 보듯, 공주는 밤의 고장 아닙니까? 우금티 부근도 밤나무가 지천으로 깔려 있어서 그런지, 가는 곳마다 밤송이들이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밤송이가 너무 많아 이동이 쉽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얼마나 독한지(?) 신발 사이로 가시가 쑥쑥 들어올 정도였지요. 선두에 선 저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조심하세요. 지뢰밭이에요. 밤송이 지뢰밭!”

 

밤송이 지뢰밭을 지나 우여곡절 끝에 트레킹 팀은 우금티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 우금티터널: 우금티 아래를 지나고 있는 우금티 터널.





 

우금티에서 갑오년, 그날을 떠올리다!

 

우금티에 도착해서는 주위 지형을 가리키며 설명을 했습니다. 일본군의 기관총이 어디에 배치됐는지 또한 농민군들이 어느 방면에서 올라왔는지, 하는 것들을 알려주었습니다. 농민군들은 실제로 정상부가 아닌 고개 아래에서 희생을 많이 당했는데 높은 지대를 선점하고 있던 연합부대가 기관총과 화포를 난사해서 그렇게 됐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현장성을 살려 책에서는 풀어낼 수 없는 것들을 설명하려고 나름대로 애썼지요. 물론 그런 설명들이 제대로 전달됐는지는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었습니다. 당시 참가자들이 트레킹을 단순히 소비(?) 하지 않고 그 이상의 대화를 나누었다는 점입니다. 우금티 고개에 있는 조형물들, 처음에는 곧추 세워져 있었으나 지금은 쓰러져 있는 조형물들이 동학농민군처럼 느껴져 마음이 애잔하다고, 표현한 참가자가 있었습니다. 또한 이런 식으로 대화가 확장되기도 했습니다.

 

요즘 세대들은 우리 역사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을 안 하는 것 같아요.”

이런 아픔의 역사들을 많이 알아야 하는데... 아는 사람만 아는 것 같고요.”

정치도 그래요. 젊은 사람들이 좀 많이 관심을 가져야 할 텐데요. 투표날에 놀러가지 말고요.”

 

우금티에서 이런 대화들이 오갔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저 뿌듯할 따름이었지요. 리딩자로서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 맛에 역사트레킹을 하는 것이겠죠.

그렇게 하여 공주역사트레킹은 잘 종료가 됐습니다. 트레킹을 마친 후 그 토박이 분이 제게 이런 말을 하더군요.

 

공주 사람도 잘 몰랐던 길을 안내해 주셔서 감사해요. 오랜만에 엄청 걸었네요. 힘들어도 재밌었어요.”

 

공주 토박이 분에게 그런 칭찬의 말을 들으니 정말 기분이 좋더군요. 코스를 잡기 위해서 100km 이상을 탐방을 했었는데 그게 물거품이 되지 않았으니까요. 중간에 뱀들과 사투(?)를 벌이며 탐방했던 게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초반에는 좀 스텝이 꼬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번데기 앞에서 제대로 주름을 잡아본 하루였습니다.

 

 



* 우금티: 우금티 조형물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트레킹팀.




 

공주 역사트레킹

 

1. 코스: 공산성 중동성당 금학생태공원 우금티

 

2. 이동거리: 11km

 

3. 소요시간: 4시간 30분 정도(휴식시간 포함)

 

4. 난이도:












 

 

 

 

우금티 고개에서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현장] '2015 우금티 예술제', 통한의 고개에서 본 '희망의 씨앗'

 

15.11.14 15:54   최종 업데이트 15.11.14 15:56

 

 

 

 

 

 

 
▲ 우금티 예술제 지게 상여가 나가고 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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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오후 2시. 전국에 촉촉한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극심한 가을 가뭄을 꺾어줄 단비였지요. 저는 그날 우산을 받쳐 들고 충남 공주시 우금티 고개에 서있었습니다. '2015 우금티 예술제'에 참석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금티 전투. 벌써 12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60갑자로 치면, 두 갑자에다 또 한 해가 더해진 것입니다. 121년 전 그날, 그곳 우금티 고개에서는 통한의 피눈물들이 뿌려졌습니다. 빗발치는 일본군과 관군의 공세에 막혀 우금티를 넘지 못하고, 그곳에서 눈을 감아야 했던 2만여 명의 농민군들의 피눈물이 바로 그것입니다.  농민군들이 내세웠던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도 그 피눈물을 따라 흩뿌려지게 됩니다.

'2015 우금티 예술제'는 사단법인 '동학농민전쟁 우금티기념사업회'가 주관이 되어 진행됐습니다. 우금티를 넘지 못했던, 인내천 사상을 제대로 펼쳐보지 못했던 수많은 농민군들의 통한을 달래주기 위해서 행해졌습니다.

 

 


 
▲ 지게상여 우금티예술제에 등장한 지게상여.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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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제는 추모제례와 역사축제로 나눌 수 있었습니다. 추모제례는 농민군들의 한을 달래기 위한 의식이 진행됐는데 특이하게도 지게상여가 등장했더군요. 지게 두 개를 이어붙인 지게상여는 상여를 살 수 없었던 망자를 운구하기 위해 쓰였습니다. 그 옛날, 가난 때문에 상여조차 구할 수 없었던 이들이 이승과 하직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타고 갔던 것이 지게상여였습니다. 평생 동안 등짝에 걸쳐 메고 곡식과 땔감을 날랐던 그 지게에 자신을 실어 보냈던 것입니다. 


121년 전, 우금티에서 전사한 동학농민군들은 그런 초라한 지게 상여조차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시신은 버려졌고 내팽개쳐졌습니다. 살아난 자들에게는 '반역도'라는 낙인이 찍혀졌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장례는 꿈도 못 꾸었던 것입니다.

 

 



21세기 우금티 고개엔, "역사 교과서 국정화 반대"

 
▲ 설문조사판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설문조사판이 설치되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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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제례가 영령들의 한을 달래주는 자리였다면, 역사축제는 미래 세대들을 위한 자리였습니다. 예술제에 모인 중·고등학생들은 농민군들의 뜻을 기억하면서도 '놀 건' 놀았습니다. 짚으로 만든 달걀꾸러미 체험, 벼훑이를 이용한 탈곡체험 등등... 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자신의 소원을 적은 만장과 사발통문이었습니다.


'좋은 대학 가게해주세요!'
'이번에는 오빠들 콘서트 꼭 가고 말테야!'


위처럼 또래끼리 통용되는 생각들이 많이 적혀있더군요. 하지만 뜨거운 이슈를 담은 것들도 있었습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한국사 국정교과서 OUT'


'헬조선'이라는 우울한 말이 그들의 입에서 오르내리고, 극우 성향의 커뮤니티 일베 같은 사이트에 쉽게 노출될 수 있는 그들이지만, 그래도 우리 사회의 희망의 씨앗도 그들 아닙니까?

121년 전, 갑오년의 우금티가 통한의 피눈물이 터져 나온 곳이라면 현재의 우금티는 새로운 희망이 싹 터 오르는 옥토와 같은 곳이 되어야 합니다. 인내천을 꿈꾸던 농민군들의 희생이 헛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겠죠. 그런 의미로 우리 아이들이 우금티에서 많은 역사체험을 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우금티 우금티에 세워진 조형물이 쓰러져 있다. 우금티에서 쓰러져 갔을 농민군들의 모습이 겹쳐져서 마음이 애잔해진다. 봄의 새싹처럼 힘껏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으면 좋겠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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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저는 2년 전에도 우금티 추모제례에 대해서 기사를 작성했습니다. 그때 기사를 다시 살펴보니, 당시는 교학사 역사교과서에 대해서 언급을 했더군요. 당시 교학사 역사교과서가 얼마나 뜨거운 이슈였습니까? 식민지근대화론에 대해서 긍정적인 시각을 드러낸 교학사 교과서에 대해서 많은 이들이 반대를 했었죠.


2년이 지난 현재. 이제 교학사 교과서를 넘어 한국사가 국정 교과서가 되려고 합니다. 역사가 퇴보한다는 걸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겠지요. 정말 안타깝습니다. 내년 우금티 예술제 기사에서는 이런 안타까운 심정을 기사 말미에 적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희망의 씨앗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 우금티: 동학농민전쟁 시기 공주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에 대해서 설명한 설명판.

 

 

 

 

* 우금티: 설명판을 보고 있는 학생. 

 

 

 


덧붙이는 글 | 우금티 예술제에서 자원봉사를 한 후, 그것에 대한 소감을 작성해 보았습니다.

 

 

 

 

 

 

우금티에서 갑오년, 그날을 떠올리다!

 

공주역사트레킹 2편

 

14.10.31 09:39  최종 업데이트 14.10.31 09:39

 

 

 

 

 

 

 

 

 
▲ 우금티 우금티에 쓰러져 있는 조형물들. 피눈물을 흘리며 쓰러져 간 동학농민군들의 모습과 겹쳐져, 좀 서글퍼 보인다. 올해 여름에 촬영한 사진.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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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직이든 수평이든, 장염 걸린 사람에게는 힘들다

 


공산성 탐방을 마친 트레킹 팀은 중동성당을 지나 본격적인 도보여행에 나섰다. 옛 공주 읍내는 분지형 구조를 가지고 있다. 시가지를 두고 둥글게 산들이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다. 그런 지형을 기반으로 도보 여행길을 개척했기에 해변가나 강변을 걷는 길보다는 좀 험하다. 본격적인 등산보다는 덜해도 급경사가 있는 구간이 몇몇 있다는 것이다.

등산이 수직적인 개념이라면, 트레킹은 수평적인 개념이다. 하지만 트레킹도 지형을 타고 가야하기에 일정 부분에서는 수직적으로 올라가야 할 때가 있다. 반대로 등산도 봄소풍 가듯 평평한 길을 걸을 때도 많다.

개념 정의에서는 수직과 수평으로 나누어지지만 지형이라는 구체적인 물리적 공간에서는 중첩되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는 것이다. 실제로 필자가 베이스 캠프로 삼고 있는 관악산 둘레길의 경우,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등산로였다. 그런데 걷기 열풍을 타고 '둘레길'로 변신을 하게 됐다.

하지만 이런 지형적, 개념적 정의들도 컨디션이 좋을 때나 귀에 들어올 것이다. 장염 때문에 배앓이를 하는 사람에게 수직이든 수평이든 힘든 것은 매한가지 일 테니까. 그랬다. 본격적인 트레킹에 나서게 되니 공주토박이 분보다는 장염에 걸린 분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장염 특성상 아무것도 먹을 수 없지 않은가? 공복인 상태로 장시간 걸으면 자칫 탈진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 분을 돌려보낼 수도 없었다. 자신은 완주를 할 수 있다고 강하게 의사표시를 했기 때문이다. 또 나름대로 아웃도어 활동을 꾸준히 해왔다고 해서 그분의 뜻을 존중하기로 했다.

 

 





 

 
▲ 금학생태공원 금학생태공원에서 우금티로 향해가는 역사트레킹 팀. 가는 도중에 밤송이 '지뢰밭'을 지나가야 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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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송이 '지뢰밭'을 지나 우금티로...

 


가는 중간 중간에 우금티와 관련된 설명을 했다. 1894년 갑오년에 있었던 국내 정세, 청나라의 파병을 빌미로 국내로 출병한 일본군, 청나라와의 전쟁 중이라 후방지역의 '준동'을 심각하게 판단했던 당시 일본 정부, 일본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청나라 폐잔병들 일부가 동학농민군에 합류했다는 사실 등등...

우금티로 향해가는 의미를 확실히 전달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다. 참가자들 중에는 이미 동학농민전쟁과 우금티에 대해서 알고 있는 분들도 있었고, 처음 듣는 듯 생소한 눈빛을 보내는 분들도 있었다.

이미 그 관련 내용을 알고 있든, 아니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우리가 공산성을 출발하여 우금티로 가는 것이었고, 그곳에서 120년 전의 사건을 떠올려 보는 것이었다. 이렇게 의미심장한 다짐을 하고 나섰다.

하지만 의외의 복병(?)을 만났다. 밤송이가 바로 그것이다. 우금티 부근도 밤나무가 지천으로 깔려 있어 그런지 가는 곳마다 밤송이들이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밤송이가 너무 많아 이동이 쉽지 않을 정도였다. 얼마나 독한지(?) 신발 사이로 가시가 쑥쑥 들어올 정도였다. 선두에 선 필자는 이렇게 외쳤다.

"조심하세요. 지뢰밭이에요. 밤송이 지뢰밭!"

유독 장염에 걸린 참가자 분이 가장 많이 밤송이에 찔렸다. 트레킹화가 아닌 가벼운 신발을 신고 와서 그랬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했던 건, 밤송이 지뢰밭 통과 이후부터 그 분이 복통을 호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발에 가시가 찔리면서 복통이 완화된 것인가?

이런 우여곡절 끝에 역사트레킹 팀은 우금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장염으로 고생한 분도 무사히 완주를 해주셨다. 공주토박이 분은 '공주 사람도 모르는 길을 개척하고 안내해 주셔서 고맙다'고 말해주었다. 모두 다 완주를 해주고, 저런 칭찬을 들으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 우금티 우금티. 올해 여름에 촬영한 사진.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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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금티에서 갑오년, 그날을 떠올리다!

 


우금티에 도착해서는 주위 지형을 가리키며 설명을 했다. 일본군의 기관총이 어디에 배치됐는지 또한 농민군들이 어느 방면에서 올라왔는지, 하는 것들을 알려주었다. 농민군들은 실제로 정상부가 아닌 고개 아래에서 희생을 많이 당했는데 높은 지대를 선점하고 있던 연합부대가 기관총과 화포를 난사해서 그렇게 됐다고 말해주었다. 현장성을 살려 책에서는 풀어낼 수 없는 것들을 설명하려고 나름대로 애썼다. 물론 그런 설명들이 제대로 전달됐는지는 잘 모를 일이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었다. 참가자들이 이번 트레킹을 단순히 소비(?) 하지 않고 그 이상의 대화를 나누었다는 점이다. 우금티 고개에 있는 조형물들, 처음에는 곧추 세워져 있었으나 지금은 쓰러져 있는 조형물들이 동학농민군처럼 느껴져 마음이 애잔하다고, 표현한 참가자가 있었다. 또한 이런 식으로 대화가 확장되기도 했다.

"요즘 세대들은 우리 역사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을 안 하는 것 같아요."
"이런 아픔의 역사들을 많이 알아야 하는데... 아는 사람만 아는 것 같고요."
"정치도 그래요. 젊은 사람들이 좀 많이 관심을 가져야 할 텐데요."


우금티에서 이런 대화들이 오갔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저 뿌듯할 따름이다. 리딩자로서 보람을 느꼈다. 앞서 언급했듯이 올해는 동학농민혁명이 발생한 지 120주년이 되는 해이다. 60년이 한 갑자이니 120년이면 두 갑자가 되는 것이다.

 

 



 

 
▲ 우금티 우금티에 선 역사트레킹 팀. 그곳에서 갑오년을 떠올렸다. 단순히 트레킹을 소비(?)했던 것이 아니라 발전적이고 확장된 이야기를 나누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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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11월 초에는 우금티 추모제가 개최된다. 프랑스 대혁명에 비견되는 동학농민혁명의 의미를 고찰해 볼 수 있는 좋은 시기가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내외적으로 진지한 숙고의 시간을 방해하는 사건과 발언들이 넘쳐난다. 그 중에서 요즘 가장 '인상적인 발언'은 이인호 KBS 이사장이 해주었다.

"김구는 대한민국 건국 공로자가 아니다.(10월 22일, 한국방송 국정감사)"
"(조부는) 유학의 세를 늘려가기 위해 타협하면서 사신 것이다. 그런 식으로 친일을 단죄하면 일제시대 중산층은 다 친일파다.(9월 9일,<한겨레신문>과의 전화통화)"


자신의 조부를 구명하고자 김구 선생까지 매도하는 사람이 KBS 이사장 자리에 앉아 있다. 이렇듯 '친일매국'의 후손들은 요직에 앉아 느긋하게 부모세대들의 친일에 대해 항변하고 있다.

상황이 이러한데 무슨 일본의 군국주의 침탈에 대해 왈가불가 하는가? 일본 아베 정권의 과거사 부정과 친일파 후손들의 항변이 서로 맥락이 다른 것인가? 이인호 같은 사람이 KBS 이사장 자리를 꿰차고 있는 한,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정부비판은 그저 쇼에 불과할 뿐이다. 그저 보여주기 위한 쇼!

우금티에서 돌아가신 영령들은 그런 쇼를 보고 어떤 생각을 가지실까? 혹시 이런 말씀들을 하지 않을까?

"아이고~ 재미없다!"

 

 

 



덧붙임
<공주역사둘레길>은 아직 정식으로 개통되지 않은 길입니다. 내년 봄을 목표로 표식 작업을 완성한 후 개통할 예정입니다. 제 사비를 털어서 표식 작업을 해볼까 하는 생각도 있지만, 더 많은 이들과 함께 하기 위해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자금을 마련할 생각입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과 애정 부탁드립니다!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우금티와 공산성을 이어서 걷다! 공주역사둘레길 탐방기

 

공주역사트레킹 1편

 

14.10.28 11:36 최종 업데이트 14.10.28 11:36

 

 

 

 

 

 

 

기사 관련 사진
▲ 공산성 공산성 성곽길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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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금티-공산성을 연결하여 사람들과 걷고 싶었다

 


필자는 올해 초에 세웠던 계획 중 하나를 성공적(?)으로 실행했다. '2014년 버킷리스트' 중에 한 가지를 달성한 것이다. 작심삼일로 깨진 계획들을 보며, 항상 뒷맛이 개운치 않은 연말을 맞이했는데 올해는 나름대로 흡족하게 제야의 종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필자는 충남 공주에 있는 우금티와 공산성을 연결하는 도보여행길을 개척하고, 그 길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걸어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동학농민군들이 그토록 넘고자 했던 우금티 고개와 그토록 가고자 했던 공주성(공산성)을 하나의 선으로 이어, 사람들과 함께 트레킹을 해보고자 했던 것이다.

제주올레와 지리산둘레길 등, 이미 600개가 넘는 도보여행길이 있음에도 굳이 '우금티-공산성' 구간을 새로 연결하고자 했던 건 사명감 때문이었다. 사실 필자는 도보여행을 하고, 트레킹 코스를 개척하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다. 달리 말하면 도보여행만큼은 남들보다 더 잘할 자신이 있다는 뜻이다.

그런 재능을 살려 동학농민혁명의 뜻을 기리고자 했다. 문인들이 시나 소설로, 예술인들이 춤이나 노래로 갑오년의 정신을 계승했듯이 필자는 도보여행길을 만들어 그날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했다. 농민군들이 가고자 했던 길을 트레킹을 통해 직접 걸어보는 것도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기리는 나름의 방식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도보여행자들이 역사의 한 장면을 걸을 수 있게, 우금티-공산성 구간을 하나로 연결하는 것이 필자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사명감은 '공주역사둘레길'로 결실을 맺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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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남루 공산성 금남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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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사다마? 시작부터 이상 징후가...

 


지난 10월 18일. 역사트레킹 팀은 서울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공주 공산성에 도착했다. 트레킹을 하기에 '딱'인 날씨였다. 가을 햇살이 좀 강한 것 외에는 활동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아웃도어에서 날씨가 좋으면 반은 먹고 들어간다는데...

하지만 청명한 가을 하늘과 달리 필자의 머릿속은 잿빛이었다. 트레킹 시작부터 좀 이상 징후가 있었기 때문이다. 참가자 중에 한 명은 충남 공주 토박이였고 또 다른 참가자는 시작부터 복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장염에 걸렸던 것이다. 그 참가자는 공주 시내에 있는 병원에까지 다녀왔다.

'호사다마인가? 이번 트레킹 성사를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데...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다고, 이거 괜히 공주토박이 앞에서 망신당하는 거 아니야? 그건 그렇다고 해도 장염에 걸린 참가자는 어쩌지... 미리 구급차 길이라도 봐둬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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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트레킹 참가자 공산성 성곽을 걷고 있는 참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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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역사둘레길'의 시작점은 공산성이다. 현재의 공산성 일대는 삼국시대부터 중요한 전략적으로 요충지였다. 475년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현 공주)으로 천도했을 때 이곳은 왕성이었고, 536년 사비(현 부여)로 천도했을 때는 북방성으로 불리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당나라 소정방에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백제가 역사속으로 사라졌을 때, 의자왕이 있던 곳도 사비성이 아닌 바로 이곳 공산성이었다. 공산성의 현재 모습은 조선 후기 시대에 그 틀이 잡혔다. 임진왜란의 영향으로 인해 1602년, 충청감영이 충주에서 공주로 이전했고, 그에 따라 공산성은 개·보수가 이루어졌다.

매표소가 있는 금서루 부근에서 이런 기본적인 설명을 하며 서쪽 성곽을 둘러갔다. 서쪽 성곽에서는 멀리 황새울이라는 천주교 성지가 보이는데 그 지점에 다다랐을 때 공주토박이 참가자가 이런 말을 했다.

"저기 건너편 십자가 표시 보이시죠? 저기가 황새울이라는 곳인데요. 저기서 천주교 신자가 많이 죽었어요. 그래서 황새울 성지로 불러요."
"앗! 그건 제가 설명하려고 했는데..."

선수를 빼앗긴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시선을 되찾아오기 위해 서둘러 첨언을 했다.

"저 건너편에 공주 감영이 있어서 그랬어요. 사실 천주교 신자가 가장 많이 희생된 곳은 여기 공주라고 하더군요. 감영이 있어 충청지역의 천주교도들이 여기로 다 붙잡혀 온 거예요. 그래서 희생이 컸던 거고요."

염려했던 일이 발생했지만 그럭저럭 위기를 모면했다. 식은땀 한 방울을 흘리며 서둘러 쌍수정(雙樹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금강 공산성에서 바라본 금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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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데기 앞에서 주름잡기, 참 힘드네

 



 

1624년 인조는 이괄의 난을 피해 공산성으로 파천(播遷:임금이 도성을 떠나 피난을 하는 일)했다. 인조는 성 안에 있는 나무 두 그루 아래에서 반란이 진압되길 간절히 기원했다고 한다. 그러다 이괄이 부하의 배신으로 참수됐다는 소식에 기뻐하며 그 나무 두 그루(쌍수)에 정삼품의 작위(통훈대부)를 내린다.

이후 영조 11년, 그 자리에 정자가 세워졌으니 이것이 바로 쌍수정이다. 처음에는 삼가정이라고 불렸으나 이후 쌍수정이 되었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이런 '스토리텔링' 때문인지 공산성은 조선시대 '쌍수산성'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쌍수정에 대한 대략적인 이야기를 하고 금강이 보이는 성의 북면으로 이동을 하려고 할 때였다. 인조와 관련된 설명을 하나 더 준비를 했는데 기억이 안 났다. 무슨 떡 이름이었는데 기억이 안 나서 그냥 북면 쪽으로 이동을 하려 했다. 찜찜한 마음을 뒤로 하고 선두로 나서는데 뒤쪽에서 그 떡 이름과 그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인조가 이곳에 와서 6일 동안 머물렀는데 인근에 사는 임씨 집안사람이 떡을 받쳤대요. 인조는 그걸 맛있게 먹었고요. 당연히 그 떡 이름을 물어봤겠죠. 그런데 이름이 없던 거예요. 그래서 이후에 임씨 집안에서 만든 맛있는 떡이라고 해서 인절미가 된 거라고 하더군요."

또 그 토박이 분이었다. 이번에는 필자가 못한 설명을 그 분이 직접 대신해주었다. 필자는 멋쩍은 나머지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래도 명색이 역사트레킹 마스터 아닌가!

"'ㅁ'이 'ㄴ'변화돼서 결국 인절미가 된 거예요. 그나저나 갑자기 인절미가 땡기네..."

괜히 애꿎은 인절미 타령을 하며 그 순간을 벗어났다. 역시 토박이 앞에서 해당 지역을 설명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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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동성당 공산성 다음 코스가 바로 이 중동성당이다. 중동성당은 1937년도에 완공된 유서가 깊은 성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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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역사를 걷는 길, 공주역사둘레길 ___2편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공주역사둘레길', 제가 만들었습니다

 

 

 

 

50대 아줌마로 빙의(?)하다

"우금티에서 공산성까지 숲 길 따라 가는 길이 있나요? 저쪽 아래 도로길은 매연 때문에 별로라서요."

그렇게 계속 두드리니 틀이 잡히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서 밑그림이 그려졌다. 그때부터는 계속 여기저기를 헤집고 다녔다. 갔던 길을 계속가고, 오르락내리락 하고, 갑자기 장대같은 비를 만나고, 뱀하고 인사하고 등등.

강원도 영월, 경기도 안양 등 이미 10개 정도의 길을 개설한 경험이 있지만 그때보다 이번 '공산성-우금티'를 잇는 개척길이 훨씬 더 힘들었다. 100km 이상의 거리를 계속 헤집고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10km를 개척하기 위해서는 100km 이상의 거리를 직접 조사하고 탐방해야 한다. 그래야 좋은 도보 여행길이 생성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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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학생태공원 가는 길 생태공원은 공주시의 수원지 일대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그 주변은 개발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 손이 닿지 않은 원시림도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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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번 개척은 좀 더 집중을 하고, 좀 더 잘해보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갑오농민전쟁 120주기를 맞아 나름대로 일익을 담당하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50대 아줌마로 빙의(?)까지 했을까. 도보여행길의 난이도를 통상 50대 여성에게 맞추는데 적절한 난이도를 유지하려고 하니, 필자가 50대 아줌마가 되어 버린 것이다. 갑자기 10살 이상 더 먹게 된 것이다. 성별도 바뀌고.

그렇게 되니 아쉽게도 봉수대터가 코스에서 빠지게 됐다. 우금티 동쪽편 봉우리에 위치한 봉수대터는 동학군이 점령하려다 실패한, 역사적 상징성이 강한 곳이기에 코스에 넣고 싶었다. 또 그곳에 올라서면 공주시가지를 내려볼 수 있기에 동학군의 행군로를 설명하기도 수월하다.

하지만 그 곳을 진입하려면 가파른 길을 올라야 하기에 누락시켰던 것이다. 빙의를 해서 그런지 가파른 길이 나오면, 나도 모르게 입에서 '억!' 소리가 나왔다. 그것보다 더 가파른 산들을 올랐을 때도 그냥 힘들이지 않고 올랐었는데, 50대 아줌마로 변신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그런 경사도에 민감하게 반응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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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동 성당 공주 구도심 국고개에 있는 중동 성당. 1937년에 세워진 중동성당은 가톨릭신자나 근대건축물에 관심있는 여행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것이다. 한편 중동성당은 내포지역에 자리잡은 천주교 성지들과 연계되는 중요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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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공주역사둘레길'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공산성과 우금티, 더불어 충청지역 동학군들이 몰살된 송장배미까지 연결하는 '공주역사둘레길'이란 도보 여행길이 생성됐다. 공주의 구도심에 산재한 역사유적들을 원형으로 둘러가기 때문에 공주역사둘레길이란 명칭을 붙인 것이다. 

공주역사둘레길은 앞서서 필자가 언급한 5가지 원칙을 기반을 두어 개척됐다. 특히 역사, 풍광, 생태 세 박자 맞아 떨어지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역사만 있고 풍광이나 생태적인 면이 떨어지는 트레킹 코스는 도보 여행객들에게 외면을 받기 때문이다.

'공주역사둘레길'은 금학생태공원이란 곳을 통과하는데 그 곳 배후면은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은 원시림이 관찰될 정도였다. 그래서 고라니, 삵, 뱀 같은 야생동물들도 꽤 많이 만났다. 트레킹 시에 이런 점들은 주의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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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장배미 충청도 농민군들이 피를 흘렸던 곳이다. 그 농민군들은 전봉준 부대와는 다른 부대였다고 한다. 이 곳은 현재 연못 형태로 되어 있다. 비석에 무슨 그을음 같은게 번졌는지 무척 지저분하다. 그래서 그런가? 송장배미를 지날 때마다 마음이 썩 좋지 않았다. 버려졌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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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유적지들의 성격에 맞게 구획 설정도 해보았다. '금강교-공산성'은 백제구역, '중동성당-충남역사박물관-영명학교'는 근대구역, '금학생태공원-삼거리'는 생태구역, '우금티-송장배미'는 동학농민혁명구역 등으로 세분화 한 것이다. 각 구역에 따라 다양한 스토리텔링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부족한 도보여행객들이나 동학농민운동에 유달리 관심 있는 분들은 생태구역과 동학농민혁명 구역만 묶어서 트레킹을 할 수도 있다.

공주역사둘레길은 아직 지도상으로만 존재하는 길이다. 표식작업 등, 앞으로 시급히 보완을 해야 할 것들이 넘쳐나는 트레킹 코스다. 하지만 일단 제 궤도에 오르면 공주 여행을 더 풍부하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이렇게 1박 2일 여행 일정을 짤 수 있다. 첫째 날은 공주역사둘레길을 걷고, 둘째 날은 공주 읍내에서 버스로 30분 정도 떨어진 마곡사에 가는 것이다. 마곡사에 가서 김구 선생의 자취를 따라 산사트레킹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정말 알찬 1박 2일, 공주 역사 기행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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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주역사둘레길의 지도 공주 구도심의 역사유적들을 저런 식으로 둘러본다. 네이버지도를 편집해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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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덧붙임: 6월 하순경에 답사와 조사를 실시했고, 이후 서울로 상경하여 후속 작업을 실시했습니다. 기사 본문에 언급되어 있듯이 현재 공주역사둘레길은 지도상으로만 존재하는 길입니다. 이 도보여행길이 정식으로 개통되기 위해서는 표식작업 등의 사후 작업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올해는 우금티 전투 120주기입니다. 필자의 작은 바람은 우금티 추모제가 개최되기 전에 그러한 작업들이 완수되어, 동학농민혁명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과 함께 공주역사둘레길  트레킹을 해보는 것입니다. 

 

 

 

 

 

 

▲ 금학생태공원 <공주역사둘레길> 금학생태공원 구간에서는 생태탐방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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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자 좋구먼! 인생 참 재밌게 살어!"

전국을 돌며 역사트레킹 코스를 '개척'하고 다니니, 만나는 사람마다 저런 소리를 툭툭 내던진다. 팔자가 좋기는… 남의 속도 모르면서! 한편 온라인에서는 상당히 날카로운 비판들이 가해진다.

'현재도 도보 여행길이 넘쳐나고 그러는데, 뭐하러 또 만드나?'
'4대강 사업 때 자전거길 만들어 놓았는데 이용객들도 별로 없잖아. 또 그렇게 되면 어쩌려고?'

 

 



장거리가 아닌 단거리, 역사라는 테마로, 읍내와 가까이

맞는 말이다. 현재 도보 여행길은 포화 상태다. 600개가 넘는 도보 여행길이 있고, 그 거리만 해도 2만km에 달한다. 2만km면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고도 남을 엄청난 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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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성 공산성 북쪽에 위치한 만하루와 연지. 오른쪽에 금강이 흐르고 있다. 뒤쪽으로는 금강대교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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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 사이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도보 여행길은 몇몇 잘 나가는 길들을 제외하고는 역시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자전거 도로와 함께 도매급으로 매도되는 실정이다. 2007년 제주 올레길 열풍 이후, 중앙 정부와 각 지자체에서 경쟁적으로 길을 개설했기에 부작용이 생길 수밖에 없었고, 그런 맹점들이 부각됐다.

필자는 그런 점들을 타산지석 삼아 역사트레킹을 실시하게 됐다. 그러다 보니 몇 가지 원칙들이 세워지게 됐다.

 

1. 무작정 걷는 것보다 역사라는 테마를 가지고 트레킹을 해보자.
2. 육체적으로 힘들면 절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15km 이내 단거리 코스로 만들자.
3. 가급적 포장도로는 피하자. 아스팔트 위를 걸으며 자동차들과 경합하는 도보여행은 할 필요가 없다.
4. 역사, 풍광, 생태 세 박자가 맞아 떨어지는 길을 개척해보자.
5. 시작점(IN)과 종료점(OUT), 둘 다 접근성을 높여보자. 가급적 종료점을 읍내와 가까운 곳에 위치하게 하여 귀경길이 편하게 하자.


 

원칙은 좋다. 하지만 위의 원칙들이 다 부합되는 도보 여행길을 개척하기란 쉽지가 않다. 특히 역사, 풍광, 생태 세 박자가 딱 맞아 떨어지는 길을 개설한다는 건 정말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 더군다나 읍내와 가까운 곳에 개설돼야 한다는 조항까지 맞추려면 머리가 더 복잡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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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금티 2006년 우금티 터널 개통 이후, 우금티는 벌판이 됐다. 동학농민군들은 왼쪽 도로 아래부분에서 많이 희생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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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성과 우금티를 트레킹 코스로 연결하자

 



공주를 처음 방문했을 때 필자도 다른 여행객들처럼 공산성과 우금티를 탐방했다. 하지만 그때는 공주의 지형을 잘 몰라 그 두 곳을 각각 따로 방문했다. 그것도 자동차를 타고 이동을 했다. 도보 여행가라는 명칭이 무색할 정도로 도로 교통에 의존하여 탐방을 했던 것이다.

'여기 우금티에서 공산성까지 멀어야 3~4km인데 공산성까지 트레킹을 통해서 갈 수 있는 방법이 어디 없나? 지도상으로 보면 있을 것도 같은데… 공산성과 우금티를 하나의 선으로 연결해서 트레킹 코스로 만들면 그게 진짜 역사트레킹인데… '

공주를 방문할 때마다 이런 고민들이 밀려왔다. 그래서 공주토박이 분들을 붙잡고 조언을 구했다.

"뭐 하러 걸어가유? 차로 5분인디."
"공주대간이라고 그런 길이 있을 것도 같은디… 근디 그냥 잘 포장된 길 가지, 뭐하러 둘러둘러 가유."


대충 예상했던 반응들이었다. 각 지자체에서 앞다투어 도보 여행길을 개설했을 때 공주시에서 '공산성-우금티'를 직접 연결하는 트레킹 코스를 만들지 않은 걸 보면 무언가 큰 난관이 있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 산딸기 여름이라 그런지 산딸기들이 지천으로 깔려있었다. 행동식이 부족해서 산딸기로 허기를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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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갑오년의 농민군들이 가고자 했던 공주성(공산성)과 농민군들의 아픔이 서린 우금티를 연결하는 영광(?)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올해는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지 120주년이라 그런 도보 여행길의 개설은 더욱더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무작정 지도를 들고 공주의 구도심을 누볐다. 그리고 길 위에서 만난 분들 중, 연세가 있으신 분들을 붙잡고 계속 같은 물음을 던졌다.

 

 

* 공산성: 공산성 북쪽에 위치한 만하루와 연지. 오른쪽에 금강이 흐르고 있고,

뒤쪽으로는 금강대교가 보인다.

 

 

 

 

 

* 우금티: 2006년 우금티 터널 개통 이후, 우금티는 벌판이 형성됐다. 

동학농민군들은 왼쪽 도로 부분에서  많이 희생당했다.

 

 

 

 

 

이 사진들은 <공주역사둘레길>을 걸을 때 볼 수 있는 풍광들입니다. <공주역사둘레길>은 역사 도시,

공주에 산재한 역사유적들을 둘러볼 수 있는 그런 트레킹 코스입니다. 아직까지는 지도상에 존재하는

<공주역사둘레길>이지만 공주 여행의 새로운 묘미가 될 수 있게 한 번 제대로 개통시켜 볼 생각입니다.

트레킹도 하고, 역사 공부도 할 수 있는 그런 <공주역사둘레길>이 되게 하겠습니다!

 

 

 

 

 

 

 

 

 

 

 

* 금학생태공원: 생태공원 일원에서는 생태탐방을 할 수 있다.

 

 

 

 

*금학생태공원 가는 길: 생태공원은 공주시의 수원지 일대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그 주변은 개발이 되지 않았고, 사람 손이 닿지 않은 원시림도 발견된다.

 

 

* 소나무 숲 길: 피톤치드가 풍부해, 산책하기 좋았던 소나무 숲 길.

 

 

 

 

* 우금티

 

 

* 산딸기: 사람들의 손이 잘 닿지 않아서 그런지 산딸기들이 지천으로 깔려있었다.

행동식이 부족해서 산딸기로 허기를 채웠다.

 

 

 

* 영명학교: 설립된 지 100년이 넘은 전통의 사학이다.

한때 유관순 열사가 재학한 학교했다.

 

 

 

* 중동 성당: 공주 구도심 국고개에 있는 중동 성당. 1937년에 세워진 중동성당은

가톨릭신자나 근대건축물에 관심있는 여행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것이다.

한편 중동성당은 내포지역에 자리잡은 천주교 성지들과 연계되는 중요한 곳이다.

 

 

 

 

 

* 송장배미: 충청도 농민군들이 피를 흘렸던 곳이다. 전봉준 부대와는

다른 부대였다고 한다.  이 곳은 현재 연못 형태로 되어 있다. 무슨

그을음 같은게 번졌는지 석비가 무척 지저분한다. 그래서 그런가? 

송장배미를 지날 때마다 마음이 썩 좋지 않았다.

버려졌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 공주역사둘레길의 지도: 공주 구도심의 역사유적들을 저런 식으로 둘러본다.

 

 

 

 

 

 

 

* 공주역사둘레길: '금강대교-공산성'은 백제구역,

'중동성당-충남역사박물관-영명학교'는 근대화구역,

'삼거리-금학생태공원'은 생태구역, '우금티-송장배미'

구역은 동학농민혁명구역 등으로 테마를 잡을 수 있다.

 

 

* 공주역사둘레길: 사유지인지도 모르고 길을 개척하다

욕만 바가지로 먹고 내려와야 했다.

 

 

 

 

* 공주역사둘레길

 

 

 

 

 

 

 

 

 

 

* 공산성: 공산성 금서루

 

 

 

 

* 지난 6월 중순 경에 '공산성-우금티'를 하나의 선으로 연결하고자 충남 공주로 답사를 다녀왔습니다.  공산성과 우금티는 직선거리로 3km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간 하나의 선으로 연결될 수 있는 트레킹 코스는 없었답니다. 그래서 공산성과 우금티의 탐방도 버스 투어 형식이 많았습니다. 저는 그 부분에 주목을 했고, 어떻게 해서든 두 지점을 연결하여 도보여행을 할 수 있게 해보고 싶었습니다.

 

왜냐? 공산성과 우금티는 공주의 대표적인 역사유적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여 일명 '공주역사둘레길'이 탄생했습니다. 이 길을 따라가면 공산성과 우금티는 물론 중동성당, 영명학교, 송장배미 등의 근현대유적들을 탐방할 수 있답니다. 각 코스를 연결하면 둥근 원형을 띈다고 해서 '공주역사둘레길'이라는 명칭을 붙여 보았습니다. 공주역사둘레길은 역사, 풍광, 동식물 등...

 

세 박자가 딱 맞아 떨어지는 명품트레킹 코스입니다. 정식 개통이 되지 않아 무척 아쉽지만 저도 빨리 여러분들과 함께 이 길에서 역사트레킹을 해보고 싶답니다!

 

 

 

*** 이 포스팅은 그와 관련된 사진포스팅입니다.

 

 

 

 

 

 

 

 

 

 

 * 공산성: 공산성 진남루. 진남루는 공주지역 삼남길의 관문이다.

 

 

 

 

 

 

* 공산성: 금강에서 바라본 공산성 만하루.  파란색 천이 씌워져 있는 것으로 보아 공사중임을 알 수 있다. 

이 사진은 2013년 11월 경에 찍은 사진이다. 필자가 올해 6월에 공산성을 방문했을 때도 만하루 일대는 공사중이었다.  

 

 

 

 

 

 

 

 * 우금티: 우금티는 황량하다. 얼핏보면 우금티 벌판으로 보일 수도 있다.

 

 

 

 

 

 

 * 우금티: 나무로 만든 조형물들이 쓰러져 있다. 

피눈물을 흘리며 쓰러져 갔을 동학농민군들의 모습이 겹쳐져 마음이 무척 착잡했다. 

 

 

 

 

 

* 우금티: 실제로 동학농민군들이 죽음을 당한 곳은 저 아래 쪽이다. 도로가 보이는 곳이다.  

 

 

 

 

 

* 우금티: 나무를 엮어 만든 조형물들은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 사이로 잡풀들이 파고 올라왔다.

피눈물을 흘리며 쓰러져 갔을 동학농민군들의 모습이 연상되어 씁쓸했다.  

 

 

 

 

 

*동학혁명군위령탑: 동학농민 혁명과 잘 어울리는 탑인가?

 

 

 

 

 

 

 * *동학혁명군위령탑: 이 탑도 세월의 흔적을 이기지 못하고 낡아지고 있다.

탑신 중간 부분의 벽돌이 깨어졌다.

 

 

 

 

 

 

*동학혁명군위령탑: 탑두 부분의 빨간 벽돌은 그나마 잘 남아 있다.  

 

 

 

 

 

* 우금티 터널: 현재 우금티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이 우금티 터널이다.  

 

 

 

 

 

 

 

* 공산성: 공산성은 산성트레킹을 하기에 제격인 곳이다.

 

 

 

 

 

* 공산성 만하루: 만하루 옆에는 연지라는 연못이 있다. 옆으로 흐르는 강은 금강이다.

멀리 금강교가 보인다. 이렇듯 공산성은 산성트레킹과 강변트레킹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곳이다.

 

 

 

 

 

 

 

 

 

 

 

 

▲ 우금티 대나무로 만든 조형물들이 쓰러져 있다.

우금티를 넘지 못하고 쓰러진 동학농민군들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편치 않다.

 

 

 

 

 

 

 

                                                       우금티 고개에서 족구 한 판?  ___2편

 

 

 

 

 

---> 1편에 이어

 


황량한 우금티 벌판, 어떻게 채울까

1894년 11월. 동학농민군은 우금티에서 관군과 일본군 연합부대에 의해 크게 패배했다. 당시 동학농민군은 연합부대보다 병력이 훨씬 더 많았다. 하지만 죽창을 든 동학군은 개틀링 기관총 등 최신무기로 무장한 연합부대 앞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지고 만다. '우금티 전투'가 아닌'우금티 학살'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동학농민군들은 엄청난 희생을 치렀던 것이다.

우금티 전투는 갑오동학농민전쟁의 최정점에 위치한 '하이라이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농민군의 역량이 총집결하여 대규모 전투를 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농민군은 패배했고, 뒤이어 전봉준도 사로잡혀 한성으로 압송된다. 이렇게 갑오년의 뜨거운 함성이 메아리치는 우금티. 하지만 그 우금티를 바라보는 필자는 좀 엉뚱한 생각부터 들었다.

'음 여기서 족구 한 판 뜨면 재밌겠군!'

역사적인 장소를 두고 너무 불경한 말을 한 것인가? 사실 필자는 공주여행에서 우금티를 따로 추천하지 않는다. 왜? 너무 한적하기 때문이다. 우금티에 올라서면 이곳이 역사적인 장소가 맞나, 할 정도로 황량함이 몰아친다. 그 흔한 비석조차 없다. 예전에 세워졌던 조형물들은 쓰러져 있고, 여름이면 그 사이를 잡초들이 파고 들어가 무성하게 피어난다. 잡초가 파고 들어간 조형물들을 보고 있자니 그저 안타까움만 더 커질 뿐이다. 우금티를 넘지 못하고 쓰러진 농민군들의 모습이 떠올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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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금티 대나무를 엮어 만든 조형물들은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 사이로 잡풀들이 파고 올라왔다. 피눈물을 흘리며 쓰러져 갔을 동학농민군들의 모습이 연상되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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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혁명군위령탑 동학농민 혁명과 잘 어울리는 탑인가? 한편 이 탑은 건립된지 40년이 넘어서 그런지 무척 낡아보인다. 탑두의 빨간 벽돌은 그런대로 잘 붙어 있지만 탑신 부분의 벽돌은 제거가 됐고, 그 부분이 흉터처럼 남아있다. 좀 흉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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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고개 아래쪽에 세워진 동학혁명군위령탑은 더 형편없어 보인다. 유신시대에 건립된 탑이라 그런지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담아낼 수 있을지 의구심부터 앞서는 게 사실이다. 또한 건립된 지 오래되어 그런지, 탑이 무척 낡아 보이기까지 한다. 실제로 탑신 중간의 벽돌이 떨어져 나가 흉해 보인다.

현재 우금티를 가장 명징하게 드러낸 조형물(?)은 바로 우금티 터널이다. 2006년에 개통된 우금티 터널은 국도 40호선의 4차선 확장 반대 투쟁의 산물로 등장하였다. 우금티를 가로지르던 기존 2차선 도로가 4차선으로 확장되면, 우금티 고개는 원형이 손상될 게 뻔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당시 공주지역 시민단체들은 도로 확장 반대를 주장하며 대안으로 터널형식을 제안하였고, 그것을 관철시켰던 것이다.

터널이 개통되었고 그 위로는 작은 벌판이 생겨났다. 일명 '우금티 벌판'. 하지만 앞서도 언급했듯이 이곳은 그저 황량한 벌판일 뿐이다. 족구가 하고 싶어지는 그런 벌판인 것이다.

이 황량한 우금티 벌판을 무언가로 채워야 하지 않겠나? 언제까지 이런 역사적인 장소를 그저 쓸쓸한 공간으로 남겨둘 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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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금티 터널 현재 우금티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이 우금티 터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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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한 가지 제안을 해본다. 이 우금티 벌판에 돌로 만든 튼튼한 석상 조형물을 올려놓아 보자는 것이다. 큰 동상을 하나 세우자는 것이 아니다. 우금티를 못 넘은 동학농민군의 한을 담아 사람 크기의 동상들을 여러 개 세워보자는 것이다.

그렇게되면 진시황의 병마용으로 보일 수 있는 동학농민군 동상들이 우금티 벌판을 '점령'하게 되는 것이다. 목숨을 걸고 넘고자 했던 우금티 고개를 돌이 되어서나마 넘게 되는 것이다.

역사는 책에서 배우는 것보다 직접 현장에 가서 배우는 것이 가장 좋다. 공산성이든 우금티든 한번 떠나보자. 공산성에서는 즐겁게 산성 트레킹을 해보고, 우금티에서는 갑오년 동학농민군의 결기를 느껴보자. 공산성에서는 백제시대를 떠올려 보고, 우금티에서는 구한말의 상황을 되새겨보자.

그렇게 살아있는 역사 지식을 쌓다보면 머릿속이 튼튼해지는 걸 느낄 수 있을 것이다.

ps. 다음 편에는 공산성과 우금티를 직접 연결하여 트레킹을 할 수 있는 일명 '공주역사둘레길'에 대한 기사를 작성할 생각이다.

 

 

 

 

 

 

 

 

 

 

우금티 고개에서 족구 한 판?

[주장] 우금티에 동학농민군들의 동상을 세우자

14.07.07 11:13l최종 업데이트 14.07.07 11:50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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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성 공산성 진남루. 진남루는 삼남길과 연결된다. 이 길을 따라가면 논산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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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성 공산성 금서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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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공주는 경북 경주와 마찬가지로 땅만 파면 유물이 쏟아져 나오는 곳이다. 그만큼 공주는 도시 자체가 '지붕 없는 박물관'이다. 공산성, 우금티, 무령왕릉, 석장리 유적, 황새울 성지 등등… 이들 중에서 무령왕릉을 제외하고 사람들에게 가장 친숙한 곳은 공산성과 우금티일 것이다. 실제로 이 두 장소는 공주를 대표하는 곳이다.


한편 공산성과 우금티는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 관계에 대해서 알아보자.  

 



웅진성에서 산성공원까지, 공산성의 이름 변천사

앞으로는 금강이 흐르고 있고, 뒤로는 크고 작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현재의 공산성 일대는 삼국시대부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475년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현 공주)으로 천도했을 때 이곳은 왕성(王城)이었고, 536년 사비(현 부여)로 천도했을 때는 북방성으로 불리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660년, 당나라 소정방에 의해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백제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 때, 의자왕이 있던 곳도 사비성이 아닌 바로 이곳 공산성이었다. 당나라가 옛 백제땅에 세운 웅진도독부가 있던 곳도 공산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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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성 공산성은 산성트레킹을 하기에 제격인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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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시기 공주는 신라 9주의 하나인 웅천주였고, 공산성의 이름도 웅천성으로 바뀌게 된다. 공산성이 지금과 같은 '공산성'으로 불리게 된 것은 고려시대 때부터였다. 940년(태조 23년)에 지방제도를 정비하게 되는데 웅천에서 공주(公州)로 명칭이 바뀌게 된 것이다.


이때 비로소 공산성(公山城)이라는 지금의 이름을 얻게 된다. 공(公)자형 산에 성이 축조됐다고 하여 공산성이 된 것이다. 공산성이 자리잡은 산은 '공산'이다. 변산반도의 '변산'처럼 '공산'도 한 글자 산이다.

공산성의 현재 모습은 조선시대에 그 틀이 잡혔다고 볼 수 있다. 1602년 충청감영이 충주에서 공주로 이전했다. 이후 공주는 호서지방의 중심 고을이 되었고 공산성은 개·보수가 이루어졌다. 토성(土城)이었던 공산성이 튼튼한 석성(石城)으로 축조된 것도 조선시대였다.

한편 1624년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공산성으로 피신을 왔는데 그 이후로는 '쌍수산성(雙樹山城)'이라는 이름을 얻기도 했다. 인조는 성 안에 있는 나무 두 그루 아래에서 반란이 진압되길 손꼽아 기다린다. 그러다 이괄이 부하의 배신으로 참수됐다는 소식에 기뻐하며 그 나무 두 그루(쌍수)에 정삼품의 작위를 내린다. 그리하여 '쌍수산성'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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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성 금강에서 바라본 공산성 만하루. 파란색 천이 씌워져 있는 것으로 보아 공사중임을 알 수 있다. 이 사진은 2013년 11월 경에 찍은 사진이다. 필자가 올해 6월에 공산성을 방문했을 때도 만하루 일대는 공사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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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에는 공산성에 공원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곳에서는 각종 체육대회나 야유회가 개최되었다. 그래서 일제시대에는 산성공원(山城公園)으로 불리기도 했다. 일제가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만들어 조선의 궁궐을 격하시켰듯 공산성에 공원을 만들어 그 위엄을 깎아내렸던 것이다.


공산성이 수많은 이름을 가졌다는 것은 그만큼 그 성을 둘러싼 역사가 '드라마틱' 했다는 뜻일 것이다. 현재의 공산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수순을 밟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성벽 일부가 내려앉아 등재까지는 가시밭길이다.

 



공주성, 동학농민군들이 가고자 했던 그 성

왕성, 웅천성, 쌍수산성 등등… 지금까지 공산성과 관련된 수많은 다른 이름들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여기에 한 가지 빠진 명칭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공주성이다.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 1894년 10월.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들은 논산을 출발하여 기세등등하게 북상하고 있었다. 그들이 점령하고자 했던 곳은 공주성이었다. 그렇다. 지금의 공산성인 공주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진격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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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금티 우금티전투가 있었던 우금티. 사진에서도 보이듯 무척 황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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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도 언급했듯이 당시 공주는 감영이 있던 충청지방의 중심지였다. 감영은 관찰사가 주재하던 곳으로 지금으로 치면 도청(都廳)소재지이다. 조선시대 크고 작은 변란이 있었지만 이괄의 난을 제외하고는 한 도(道)의 감영이 함락된 적은 없었다.


그래서 1894년 4월 27일, 동학농민군들이 전주성을 함락시켰을 때 조선 정부는 깜짝 놀라 '멘붕'에 빠졌다. 하지만 당시 조선정부는 이를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결국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을 한다.

청나라는 조선정부의 공식적인 파병 요청을 받고 아산만에 출병을 한다. 이에 일본도 텐진조약을 빌미삼아 인천으로 군대를 급파하게 된다. 그나마 청나라는 출병 요청을 받았다지만 일본군은 왜 우리 땅에 들어왔나? 들어왔으면 전주성이 있는 남도로 진격을 해야지, 왜 인천으로 향했단 말인가?

뚱딴지같은 일본의 출병은 6월 하순에 있은 경복궁 점령으로 본색이 드러나게 된다. 그들은 조선사회의 평안을 위해 이 땅을 밟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평화유지군'이 아니라 그저'침략군'이었을 뿐이다. 경복궁 점령 이후, 아산만 풍도 앞바다에서 청나라군을 기습하여 청일전쟁을 벌인 것을 보면 그 침략야욕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과 뒤이어 발발한 청일전쟁에 대해 동학농민군은 크게 반발했다. 그래서 2차 봉기에 나서게 됐고 공주성을 점령하기 위해 북상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는 우금티에서 관군(3천명)과 일본군(2천명)의 연합부대와 맞서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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