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금티에 세워진 동학 장승들

- 우금티 장승제이야기

 

14.02.19 14:09l   최종 업데이트 14.02.19 14:09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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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금티 장승제 금강 풍물패가 사물놀이를 하고 있다. 한편 왼쪽 장승은 웨이브가 져서 무척 독특한 형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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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금티 실제로 동학군들이 살육을 당한 곳은 우금티 고개 아래쪽이다. 사진에서 버스와 트럭이 다니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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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으로 불리는 장승은 마을 입구와 같이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곳에 세워졌다. 역병 같은 액운을 막고, 마을의 무사태평을 기원하기 위해 세웠던 것이다. 즉 장승은 마을의 수호신이자 지킴이였던 것이다. 

하지만 공주 우금티 고개에 세워지는 장승들은 그런 교과서적인 의미의 장승들과는 '임무'면에서 차이가 있었다. 왜? 우금티는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동학군들이 결사항전을 벌인 역사적인 장소이기 때문이다. 동학군들의 한, 민초들의 한이 서려 있는 곳이기에 그곳에 세워지는 장승들도 남다른 '스토리'를 갖게 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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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승 장승작업은 나무 껍질을 벗기는 것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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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김작업 장승의 얼굴과 복부 부분의 틀을 잡기 위해 전기톱으로 깎고 있다. 장승은 남녀 쌍으로 제작하기에 사진에서처럼 동시 작업을 할 수 있다. 사진 오른편에서 나무 껍질을 벗기고 있는 사람들은 공주대학교 학생들이다. 공주대 이명희 교수는 교학사 역사교과서 집필에 참여해 식민지 근대화를 역설했지만 정작 나이 어린 공주대 학생들은 우금티에서 동학 정신을 기리는 장승을 깎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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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16일, 충남 공주시 우금티 고개에서는 우금티 장승제가 거행됐다. 우금티 장승제는 공주민주단체협의회와 우금티 기념사업회가 주관하는 행사로 매년 정월대보름 주간에 열렸다. 벌써 20년이 넘는 유서 깊은 제례라고 한다.

장승제라고 해서 매년마다 장승을 세우지는 않았다. 그렇게 장승을 깎지 않았던 해는 제례만 드렸다고 한다. 제례를 통해 공주 지역의 무사태평과 함께 동학 정신을 기렸던 것이다.

다른 지역에서는 시간상의 한계 때문에 미리 제작된 거대한 장승이 세워지는 것으로 장승제가 진행된다. 하지만 우금티 장승제에서는 현장에서 장승이 직접 제작되어 참관객들의 시선을 끌었다. 또한 참관객들이 장승 제작에 직접 손발을 보태기도 했다. 필자도 힘을 보탰다. 땔감을 날랐고, 다듬기 작업도 했다. 하지만 크게 일한 티가 나지 않았다. 역시 내가 잘하는 걸 해야지!

'그래서 내가 지금 이 기사를 쓰고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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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승 역시 공주대학교 학생이 글씨가 새겨지는 부분을 다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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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승 윤여관 우금티기념사업회 집행위원장께서 끌과 망치로 장승의 얼굴 부분을 정교하게 입체화 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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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 제작의 첫 단추는 나무껍질 벗기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장승에 쓰이는 나무는 밤나무와 같은 목질이 단단한 것들이 선호되지만 일반적으로는 야산에서 구하기 쉬운 소나무가 주로 쓰인다. 껍질이 제거되면 나무는 '알몸'을 드러낸다. 이제 본격적인 장승 제작이 시작되는 것이다.

몸통이 매끈하게 드러난 목재에 전기톱을 이용하여 기본스케치를 하는 것이 두 번째 작업이다. 얼굴 부분과 글씨가 새겨질 복부 부분에 기본스케치를 하게 된다. 이후 얼굴 부분과 몸통부분은 좀 다르게 작업된다.   

얼굴 부분은 끌과 망치로 깎아내는 작업을 하게 된다. 마치 조각가가 조각을 하듯이 정교화 작업을 하는 것이다. 복부 부분은 낫으로 다듬기 작업을 한다. 글씨가 새겨질 곳이기 때문에 평탄하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 이런 것들이 세 번째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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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승 장승의 밑둥을 불로 그슬리고 있다. 밑둥은 흙 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쉽게 부식될 수 있다. 그래서 목질의 내구성을 강화시킬 목적으로 밑둥 부분을 불로 그슬린다. 사진 중앙에 마스크를 쓰고 있는 사람이 한준혜 공주민주단체협의회 집행위원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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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승 장승의 복부에 글을 적는다. 보통의 장승들에는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이란 글씨들이 새겨지지만 우금티 장승들은 좀 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문구들이 쓰여진다. 그래서인지 음각을 하지 않고 즉석에서 먹으로 글씨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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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는 나무 밑동을 불로 그슬리는 것이다. 밑동 부분은 땅 속에 묻히기 때문에 쉽게 부식될 수 있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불로 그슬리는 것이다. 그렇게 불로 그슬리면 목질이 단단해지고, 벌레들이 덜 침투하게 된다. 

이제 글씨를 새기는 작업이다. 칼로 음각을 새기고 그 위에다 먹칠을 하는 것이 정석이다. 하지만 우금티 장승들은 음각을 하지 않고 그냥 먹으로 글씨를 적었다. 왜? 우금티 장승들은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같은 통상적인 문구를 가진 장승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지막 작업은 장승 세우기였다. 미리 준비한 솟대와 함께 장승을 세우는 것으로 장승 작업은 종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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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승세우기 예전에는 직접 삽으로 땅을 파서 장승을 세웠지만 요즘은 포클레인으로 땅을 파고 장승을 세운다. 이렇게 하여 장승제작과 장승세우기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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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승제 장승세우기가 끝나고 이제 제례가 시작됐다. 우금티기념사업회 이원하 사무국장이 제례의 사회를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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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보듯 장승 세우기는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다. 마을 공동체가 움직여야 가능한 작업이다. 그렇게 마을 주민들의 공동의 염원과 기원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장승들이 떡~하고 마을 앞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해보시라. 얼마나 든든하겠는가? '세콤'이 달린 것보다도 훨씬 더 든든할 것이다.

우금티 장승들에는 '시민교통노조화합'과 '살림·나눔·모심' 같은 문구들이 새겨졌다.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과 같은 일반적인 문구들이 아니라 지역 단체들의 염원과 기원이 새겨졌던 것이다. 현안에 맞춰 더 디테일한 문구들이 장승에 새겨진 것이다.

그렇게 하여 우금티에는 한 쌍의 장승들이 더 자리 잡게 되었다. 120년 전, 못다핀 동학군들의 열망이 서려있는 우금티에 농민군들의 뜻을 이어받은 장승들이 더 세워지게 된 것이다. 그렇게 동학군들의 장승들이 더해지니 우금티가 든든해 보였다.  

장승제가 무사히 끝난 후, 필자도 나름대로 장승에 새겨질 문구를 떠올려보았다. 만약 필자에게 먹과 붓이 주워졌다면 이런 문구를 새겨 넣었을 것이다.

'친일매국노 교과서 축귀'
'국정원 댓글 조작 축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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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승 한쪽편만 있던 장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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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승 왼쪽에 새로운 장승이 세워졌다. 우금티 고개가 더 든든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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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동학군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청나라와 일본은 기어코 조선땅에 군대를 파병하게 된다. 앞서 언급한대로 청나라는 조선 정부의 파병 요청을 받고 진압군을 보냈다. 이에 일본도 텐진 조약을 빌미 삼아 조선땅에 군대를 급파하게 된다. 청나라야 요청을 받았다지만 일본군의 파병은 뚱딴지같은 처사였다. 조선 정부의 공식 파병 요청도 없었을 뿐더러 전주화약 이후에 조선 땅에 들어 왔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들은 남부지방이 아닌 한성으로 진격을 했다. 동학도들이 한성에다 집강소를 차린 것도 아닌데.

그랬다. 일본군들은 이미 그릇된 야욕을 품고 조선땅을 침략했던 것이다. 그래서 1894년 6월 하순에 경복궁을 공격했고, 곧이어 청나라와 청·일 전쟁을 벌이게 된다. 이런 거듭된 일본의 침략 야욕에 동학군들은 크게 반발하며 본격적인 항일 투쟁에 나서게 된다. 그들은 전열을 가다듬고 충청도 공주로 진격을 하게 된다. 당시 공주는 충청 감영이 있던 곳으로 호서 지방의 중심지였다. 공주성을 함락시킨다면 호서 지방도 동학군들의 세력 범위 안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공주성으로 나아가려는 동학군과 이를 진압하려는 관군, 일본군 사이에 큰 전투가 벌어지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우금티 전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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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농민운동 겉면에는 주제가 나가고, 날개를 들어 안쪽을 보면 그 주제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기재된 작품. 충남 천안여고 역사동아리 학생들이 제작한 것이다. 역시 여고생들이 제작해서 그런지 꼼꼼함이 돋보였다. 설명 부분에 기재된 내용도 상당히 심도가 있었다. 웬만한 성인들도 잘 모를 수 있는 역사적 사실들을 충실히 잘 기재하였다. 우리 청소년들이 역사를 잘 모른다고 걱정들을 하시는데 이런 작품들을 보면 오히려 자기 자신을 책망할지 모른다. '읔, 고딩들보다 내가 더 모르네...'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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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은 죽창으로 무장했던 동학군들에게 개틀링 기관총과 야포를 난사했다. 일본군과 관군의 우수한 화력 앞에 동학군은 속수무책 당하고 말았다. 약 1만 5000명 정도 되는 동학농민군들이 우금티에서 비통한 최후를 맞았고 동학군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심대한 타격을 입게 됐다.

당시 일본은 동학군의 진압에 심혈을 기울였다. 우금티 전투가 일어날 무렵, 일본군은 청·일 전쟁 중이었는데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와 요동반도를 공략하고 있었다. 그래서 동학군의 봉기를 후방을 교란하는 심각한 사태로 판단하고 무자비하게 진압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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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 공주대 교학사 역사교과서 파동으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 중 하나는 공주대가 아닐까? 저자 중에 한 사람인 이명희 교수가 공주대 역사교육과에 재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더군다나 이 교수는 총대를 매듯 이번 사태에서 선봉장 역할을 하고 있으니, 그 비판의 화살이 이 교수를 넘어 공주대 전역으로까지 퍼져나가는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을지 모른다.

그런 면에서 공주대 재학생들과 졸업생들은 무척 억울했을지도 모른다. 자기와는 관계 없는 인물 때문에 괜히 자신들까지 도매급으로 팔려나갔으니까. 하지만 걱정마시라! 필자가 만나본 공주대 역사교육과 재학생들은 패기가 넘쳤고, 무척 똘똘했다. 도매금으로 팔려나갈 인물들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학생들이 교수보다 더 낫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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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보다 학생들이 더 낫네

본격적인 우금티 추모제에 앞서 사전 행사인 역사 축제가 공주대학교 산학협력관에서 개최됐다. 공주대학교? 혹시 교학사 역사교과서의 주요 필진 중의 한 명인 이명희 교수가 재직하고 있다는 그곳?

그렇다. 교학사 교과서 문제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냈던 이명희 교수는 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에 재직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번 역사 축제는 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 재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프로그램을 총괄하고 있었다. 단순히 장소 제공을 넘어 전체 진행을 주도적으로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금티 역사축제는 충남 관내에 있는 고등학생들이 직접 제작한 작품 전시와 소극장에서 펼쳐지는 발표회, 두 축으로 이루어졌다. 꼼꼼한 손길로 제작된 전시물들에는 동학뿐만 아니라 독도, 위안부 강제 동원 같은 다양한 문제들이 담겨져 있었다. 작품 의도가 무엇이냐는 필자의 물음에 학생들은 똑 부러지는 설명도 잊지 않았다. 해당 내용을 제대로 숙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당찬 모습에 '요즘 애들은 역사를 너무 모른다'고 몰아세우는 편에 섰던 한 사람으로서 좀 부끄럽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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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넋전 넋전을 직접 땅에 꽂고 있는 청소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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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교학사 역사교과서 파동으로 인해 공주대학교는 본의 아니게 큰 불똥을 맞게 됐다. 선봉장(?) 역할을 맡고 있는 이명희 교수가 목소리를 높이면 높일수록 애꿎은 공주대학교의 재학생·졸업생·교수들까지 도매금으로 묶여 질책을 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자가 만나본 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 학생들은 무척 합리적이었고 쾌활한 젊은이들이였다. 해당 학과의 교수 한 명 때문에 다수의 청춘들이 싸잡혀서 욕을 먹는다? 이거 정말 불합리하지 않은가?

우금티 추모제는 오후 3시 우금티 고개에서 행해졌다. 참가자들이 죽은이의 넋이 담겨져 있는 넋전이라는 종이 인형을 제단 앞쪽에 꽂으면서 추모제는 시작됐다. 추모제는 해원무 공연, 사물 놀이 공연 등으로 이어졌는데 전체적으로 규모가 작게, 조촐하게 치러졌다. 공동집행위원장인 지수걸 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는 이런 인사말을 했다.



"여기서 북쪽으로 3km 정도만 올라가면 금강이 나옵니다. 만약 동학군들이 우금티를 넘고, 금강을 건넜다면 세상은 어떻게 변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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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금티 추모제례 119년 전 우금티 고개에서 유명을 달리한 동학농민군들의 넋을 달래는 추모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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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변했을 것 같다. 적어도 일제강점이라는 치욕적인 역사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면 분단도 없었을 것이다. 역사에 가정이란 그저 허무한 일이라지만 그래도 이런 유쾌한 상상력은 삶에 활력을 가져다줄지 모른다.

 

 

 

 

 

 

 

 

 

 

 

 

'교학사' 이명희 교수, 공주대 제자들에게 배우시길

공주에서 '우금티 전투' 추모제례·역사축제 열려

13.11.06 13:47l최종 업데이트 13.11.06 15:42
곽동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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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 작은 외계인? 이것은 넋전이다. 넋전은 죽은이의 넋을 담은 종이 인형을 말한다. 이 넋전에는 우금티 전투에서 비통하게 눈을 감은 동학농민군들의 혼이 담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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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금티 캐릭터 이제 동학농민전쟁 기념식도 정형적인 틀에서 벗어나 젊은층의 참여를 이끌 수 있는 방식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런 캐릭터 이벤트는 청년층에 대한 참여와 관심을 이끌 수 있다. 한편 위의 캐릭터에 새겨진 초코릿 복근이 무척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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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금티냐, 우금치냐

지난 10월 27일. 옛 백제의 도읍이었던 충청남도 공주시에서 작지만 의미 있는 행사가 하나 개최됐다. 119년 전 공주 우금티에서 비통한 최후를 맞은 동학 농민군들에 대한 추모 제례와 역사 축제가 행해진 것이다.

일단 용어 정리가 필요하겠다. '우금치'는 알겠는데 '우금티'는 무엇이냐고 반문을 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또 '치'나 '티'나 비스무리한데 굳이 왜 우금티를 내세우냐고 물으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고개를 뜻하는 순수한 우리말은 '티'나 '재'였다. 칡이 많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충북 충주의 '갈티고개', 노루들이 출몰한다는 경북 봉화의 '노루재'가 그 좋은 예일 것이다. 하지만 일제는 고개를 뜻하는 우리말에도 왜곡의 씨앗을 뿌려 놓았다. 일제는 지도를 제작하면서 고개마다 이름을 붙였는데 고개를 뜻하는 한자 '티'자가 없었기에 손쉬운 대로 '언덕 치(峙)'자를 가져다 붙였다고 한다. 그래서 '우금티'가 '우금치'로 개명된 것이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 때문인지 공주 지역에서는 우금치가 아닌 우금티로 더 많이 불리고 있었다.

옛 고지도를 살펴보면 '언덕 치(峙)'를 쓴 지명들이 적지 않게 나타난다. '곰치재'나 '웅치' 같은 곳들이 그런 곳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굳이 우금티라는 명칭을 소리 높여 부른다고 오히려 질책을 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금티가 어떤 곳인가?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동학농민군들이 학살에 가까운 몰살을 당한 곳이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이 결합되었기에 '우금치'가 아닌 '우금티'로의 제 이름 찾기는 분명 의미가 있는 발걸음으로 평가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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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수걸 교수 지수걸 교수는 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 학과장이자 이번 <우금티 추모제례 및 역사축제>의 공동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얼마전 같은 학과에 있는 이명희 교수의 <교학사 역사교과서>에 대한 비판을 꼼꼼하게 담은 성명서를 발표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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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4년 11월, 공주 우금티 고개


그럼 119년 전인 1894년에 도대체 우금티에서는 무슨 일이 발생했는가? 아시는 분들도 많겠지만 모르시는 독자들을 위해 부연 설명을 해보겠다. 황토현 전투에서 승리한 동학군은 그 기세를 몰아 정읍을 점령하고 전주로의 진격을 결행한다.

전주가 어떤 곳인가? 당시 전주는 전라도의 핵심 지역으로 관찰사의 소재지였다. 한마디로 전라도의 심장부가 동학군에 의해 점령되었던 것이다. 이에 당황한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구원 요청을 한다. 이에 외국 군대의 국내 입성에 대한 빌미를 주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들이 모아져 동학군과 정부 사이에 전주화약(6월 11일)이 맺어졌다.     

전주화약 이후 동학군의 세력 범위에 있던 지역은 점차 안정화를 찾아갔는데 그 중심에서는 집강소 제도가 있었다. 동학농민군이 휩쓸고 간 지역은 치안과 행정이 마비됐는데 어쩌면 이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동학군의 대척점에 서 있던 사람들이 누구였는가, '가렴주구'를 행한 장본인들이 누구였는가를 생각해보면 쉽게 유추가 될 것이다. 동학군에 의해 탐관오리들이 처형됐으니 해당 고을의 치안과 행정은 마비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에 전봉준과 전라도 관찰사 김학진은 전라도 지역의 안정화를 도모하고자 민간자치 기구를 설치하기로 합의한다. 그렇게 하여 탄생된 것이 바로 집강소였다. 집강소는 자치 기구였으나 사실상 지방행정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실질적인 지역 통치기구로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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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뚜껑으로 만든 우리나라 우리나라 외교에서 쟁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병뚜껑에 기재하여 제작한 병뚜껑 한반도. 충남 예산 여고 학생들이 급우들과 함께 만든 작품이다. 독도나 위안부를 적은 병뚜껑이 많이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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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인가요? 아닙니다. 저것은 넋전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죽은 자의 넋을 담은 종이 인형입니다.

그럼 저 넋전들에는 어떤 죽은이들의 혼이 스며 들어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아래 현수막 문구에도 나와 있듯이

119년 전, 충남 공주 우금티 전투에서 유명을 달리한 동학 농민군들의 넋이 담겨져 있답니다.

10월 27일 우금티 고개에서 개최된 <2013년 우금티 추모제례 역사축제>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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