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도 이런 대형석불이? 외국 안 가도 되겠네 2

 

고려 전기시대 대형석불 테마 탐방...

가을 여행지로 여기 어떠세요?

 

14.09.30 15:51 최종 업데이트 14.09.30 15:51

 

 

 

 

 



 

 
▲ 대조사 석불 대조사 석불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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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사찰에 10미터가 넘는 큰 석불이?

 

이제 충남 부여로 가보자. 부여군 임천면에는 대조사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도 거대한 석불이 있다. 대조사는 부여 천도를 위한 밑돌 역할을 해주는 중요한 사찰이었다. 백제 성왕이 천도를 앞두고 직접 대조사의 창건을 명했다고 하는데, 사찰터를 지목한 사람은 유명한 백제의 고승 겸익이라고 한다.

현재의 대조사는 작은 사찰이다. 하지만 그렇게 작은 사찰에 10미터가 넘는 큰 석불이 있다. 바로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 바로 그것이다. 대조사 석불도 고려 초기 작품이다. 그래서 정교성보다는 투박함이, 조화미보다는 개성이 넘쳤다. 얼핏 보면 우스꽝스러운 외모를 가지고 있는데 인체비례로 따지면 4등신에 가깝다고 한다.

은진미륵과 대조사 석불은 지리적으로 가깝게 위치해 있고, 또한 제작 시기나 규모가 유사하기 때문에 곧잘 같이 묶여 이야기된다. 또한 두 석상은 서로 비교가 되기도 한다. 은진 미륵이 뒷산과 좀 거리를 두고 평지 쪽으로 나와 있다면, 대조사 석불은 바로 옆쪽에 작은 언덕이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 언덕에서 뻗어 나온 소나무 가지가 석불에 우산처럼 드리운 형상을 하고 있다.

한편 석불 앞에 있는 법당에는 불상이 없다. 법당의 창문을 열면 큰 석불이 시원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도포를 두른 안동 이천동 석불?

이제는 경북 안동으로 가보자. 안동 시내에서 북쪽으로 5km쯤 떨어진 곳에 가보면 제비원이라는 곳이 있고, 그 뒤쪽으로 이천동 석불이라는 거대한 석불이 자리 잡고 있다. 지금은 공원으로 바뀌었지만 제비원(燕飛院)은 사람들이 여행길에 쉬어가던 일종의 여관이었던 원(院)이었다.

영남에서 충청도나 한양으로 갈 때에는 안동을 거쳐 소백산맥을 넘어야 했는데 그 길목에 제비원이 있었다. 그렇게 사람의 왕래가 빈번했던 곳에 거대한 석불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멀리서 보았을 때 이천동 석불은 도포를 두른 모습이었다. 큰 도포를 두르고 얼굴을 불쑥 내민 형상이었다. 뒤쪽의 무성한 수풀과 어우러져서 그런지, 자신을 다 드러내지 않고 적당히 노출(?)한 모습이었다.

안동 이천동 석불도 자연석을 이용하여 만든 석불이다. 용미리 쌍미륵처럼 몸통 부분과 머리 부분이 별개의 암석으로 제작된 독특한 형상을 하고 있다. 몸통 부분, 즉 필자가 도포를 둘렀다고 지칭한 큰 바위 상단 중앙에 머리 부분을 조각한 별개의 돌을 얹었다는 것이다. 단지 머리 부분만 조각하여 올렸을 뿐인데도 자연석인 몸통 부분이 서로 어우러져 일체형의 거대한 석불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석불 제작자의 지혜에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대목이다.

 


 

 
▲ 이천동 석불 안동 이천동 석불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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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장승 같은 고려 전기시대의 대형석불들

이제까지 고려 전기에 제작된 대형 석불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봤다. 그렇다면 왜 고려 전기시대 사람들은 이처럼 대형 석불들을 만들었을까? 당시는 고려왕조 창건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호족들의 독특한 지방문화가 불교문화제에 투영된 시기였다. 활기차고 강건한 지방문화가 석불 건립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거대한 돌미륵을 탄생 시켰던 것이다.

그렇게 탄생된 대형 석불은 해당지역의 민간신앙까지 접목되어, 큰 장승을 세운 것처럼 형상화됐다. 거인 같은 미륵불이 마을입구나 왕래가 잦은 곳에 떡하니 서 있게 된 것이다. 요즘처럼 청명한 가을날. 전국에 산재한 돌미륵을 찾아 복을 기원해 보자. 그렇게 여행을 하다보면, 어쩌면 '복'된 테마 여행이 될 수도 있다. 여행도 하고, 유물답사도 할 수 있으니까!

 

 

 

※ 도움말 : 찾아가는 길

1. 용미리 쌍미륵: 서울 불광역에서 파주 광탄면행 버스에 탑승한 후 용암사에서 하차한다. 소요시간 약 50~60분 정도.

2. 논산 은진미륵: 논산 읍내에서 건양대행 버스에 탑승 후 관촉사에서 하차함. 읍내에서 관촉사까지는 도보로 약 40분 거리임.

약 3km 정도다. 그래서 택시를 타도 부담이 없음.

3. 대조사 석불: 부여군 읍내에서 임천행 버스 탑승. 임천면사무소에서 하차한 후 대조사로 이동. 면사무소에서 대조사까지는

도보로 20~30분 정도 소요됨.

4. 안동 이천동 석불: 안동 시내에서 제비원(연미사)행 버스 탑승. 시내에서 제비원까지는 약 5km 정도 떨어져 있음.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 작가라고 합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 은진미륵: 은진미륵을 옆에서 본 모습이다. 뒤쪽으로 보이는 곳은 황산벌이다.

 

 

 

 

* 관촉사 5층 석탑: 관촉사 석등과 함께 은진미륵 앞에 병렬에 서 있다. 필자가 방문했을 당시는 그 앞으로 무언가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무려 36년 동안 제작된 은진미륵

우리나라에서 최대이고 긴 세월 동안 제작된 터라, 관촉사 석불에는 흥미로운 설화가 스며있었다. 어느날 반야산에 큰 바위가 불쑥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에 고려 조정은 그 바위로 불상을 만들 것을 결정하고 당대 최고 고승이던 혜명 스님에게 그 일을 맡겼다. 고려 광종 19년(968)에 시작된 석불 건립은 목종 9년(1006)에 가서야 완성이 됐다. 석불 제작은 다리, 몸통, 머리 세 부분으로 나뉘어서 제작이 됐는데 각 부분이 다 완성된 후 큰 문제가 발생했다. 각 부분들이 엄청나게 크고 무거운 터라 인력으로는 석불을 세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당시에 타워크레인이 있었겠는가?

혜명 스님의 고민은 깊어 갔다. 그러던 차에 스님은 아이들이 진흙 불상 놀이를 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거기서 힌트를 얻어 석불을 세웠다고 한다. 아이들도 다리, 몸통, 머리를 따로따로 제작하여 불상을 만들었는데 나중에 그것을 독특한 방법으로 합체를 했던 것이다. 먼저 다리를 세우고 그 주위를 모래로 채우고는 물을 뿌려 주위를 단단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비탈을 만들어 몸통을 굴려서 올렸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래비탈을 이용해서 진흙 석불을 3단 합체했다는 것이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혜명스님은 '옳거니'했고, 결국 18m가 넘는 엄청난 규모의 석불이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이렇듯 은진 미륵불은 제작시기와 제작자가 명확한 석불이다.  

 

 

 

 

 

 

 

 

 

▲ 은진미륵 필자 대신 등장한 나의 배낭. 이제 저 배낭을 메고 계속 해서 '모험'을 떠날 생각이다. 은진미륵의 큰 손을 붙잡고 함께 모험을 떠나고 싶다!

 

 

 

 

 

▲ 은진미륵 은진미륵이 워낙 거대해서, 그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남성이 무척 작아보인다.

 

 

 

 

# 고려 전기시대에 제작된 대형석불들

한편, 은진 미륵불이 제작된 고려 전기시대는 거석 석불이 유행한 시기였다. 고려왕조 창건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호족들의 독특한 지방문화가 불교문화제에 투영된 시기였던 것이다. 활기차고 강건한 지방문화가 석불 건립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거대한 돌미륵을 탄생시켰다.

고려 전기에 제작된 대형 석불들은 여러 개가 있다. 부여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일명 파주 쌍미륵), 안동 이천동 석불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이 시기에 세워진 석불들은 하나 같이 다 엄청난 크기들을 자랑하고 있다. 신체비례에 맞춰 정교함을 구현하는 방식이 아닌 특정 부위를 부각시킨 거대한 석불을 제작하였다. 그런 탓인지 관촉사 석불은 3등신에 가깝고, 얼굴은 '얼큰이'다. 또 손은 마치 야구글로브를 낀 것처럼 아주 크다.

은진미륵을 가까이에서 마주하니, 당장이라도 내게 그 큰 손을 내밀고 이렇게 말하는 듯싶었다.

'어이 곽 작가, 지금 당장 나랑 같이 모험을 떠나자고!'

그럼 왜 그 당시 사람들은 그렇게 큰 석불들을 제작했을까?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보다 세공기술이 덜해서 그랬던 것일까?

고려 전기 시대에는 고을의 평안에서부터 각 개인의 기복까지 다 받아주는 수호신 같은 거대한 석불이 제작되었다. 이런 대형 석불은 해당지역의 민간신앙까지 접목되어, 마치 돌로 큰 장승을 세운 것처럼 형상화됐다. 거인 같은 미륵불이 마을입구나 왕래가 잦은 곳에 떡하니 서 있으니 해당지역 사람들은 얼마나 든든했겠는가? 방범용 CCTV가 없었더라도 아주 든든했을 것 같다. 은진미륵이 서 있는 반야산도 황산벌이 보이는 곳으로 인편의 왕래가 잦은 곳이다.

 

 

 

 

▲ 대조사 석조관음보살입상 고려 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생김새와 조각기법 등이 논산 관촉사 석조관음보살입상과 유사성을 띄고 있다.

대조사는 충남 부여에 있는 사찰이다. 부여의 옆동네가 논산으로 두 지역은 무척 가까이에 있다.

 

 

 

 

# 은진미륵의 디테일은 선이 굵은 디테일

한편 디테일(detail)적인 관점으로 은진미륵을 바라본다면 어떤 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충남 서산시 가야산 자락 절벽에는 6세기 말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서산마애삼존불상이 새겨져 있다. '백제의 미소'라고 불리는 서산마애삼존불은 섬세한 백제 불교 미술의 정수라고 할 만하다. 마치 한 땀 한 땀 수를 놓은 듯이 바위에 새겨진 마애삼존불은 정교성을 강조한 '세밀한 디테일'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손도 크고, 얼굴도 큰 은진미륵은 '선이 굵은 디테일'로 불릴 수 있을 것 같다. 얼굴과 손을 강조했고, 더군다나 발가락까지 크게 부각시킨 은진미륵을 두고 기계적인 관점에서 디테일이 떨어진다고 하면 그거 정말 곤란한 일이다. 세밀한 디테일이 있는가 하면 선이 굵은 디테일도 있지 않겠는가?

 

 

 

▲ 서산삼존마애석불 6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서산 삼존마애석불. 일명 백제의 미소로 불린다. 세밀한 디테일이 두드러진 정교한 석불이다.

 

 

 

 

 

 

은진미륵께 삼배를 올린 후, 필자는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자리를 계속 옮겨가며 열심히 사진을 찍다 카메라 LCD창에 비친 내 얼굴을 보게 되었다. 내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그것도 그냥 웃음이 아니라 함박웃음이었다. 그냥 은진미륵 앞에 서 있으니 좋았던 것이다. 필자는 그냥 복을 넝쿨째 받은 느낌이었다.

은진미륵께서 복을 내려주셨으니 필자의 새로운 비즈니스가 번창할 것 같다. 새로운 비즈니스? 필자는 현재 outdoor와 tour를 접목한 일명 '아웃투어'를 아이템 삼아 사업을 시작할 예정이다. 거창한 일은 아니고, 그저 예전부터 해왔던 여행을 나름대로 특화시켜볼 생각이다. 기회가 된다면 <오마이뉴스>에도 아웃투어와 관련된 기사를 송고할 생각이다.

논산 관촉사에 가서 은진미륵께서 주신 '기복'을 받아왔으니 앞으로는 좋은 일들만 가득할 것 같다. 독자여러분들도 좋은 일들이 가득하시길 기원해본다.

 

 

 

 

 

* 무량사 극락적, 오층석탑, 석등: 귀중한 유물 세 개가 동시에 일렬로 서 있는 모습이 무척 이채롭다.

 

 

 

*부여의 단풍

 

 

 

 

---> 전편에 이어

 

 

# 대조사의 석조관음보살입상

 

 

장하리를 떠난 답사단은 임천면 대조사로 향했다.

대조사는 부여 천도를 위한 밑돌 역할을 해주는 중요한 사찰이었다. 백제 성왕이 천도를 앞두고 직접 대조사의 창건을 명했다고 하는데, 사찰터를 지목한 사람은 유명한 백제의 고승 겸익이라고 한다. 겸익은 성왕의 명을 받고 인도로 직접 가서 범어를 배우고 돌아온 최초의 백제 승려였다. 성왕이 직접 창건을 명하고, 겸익이 그 사찰의 터를 지목하였던 만큼 사비시대의 대조사는 의리의리 했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하지만 현재의 대조사는 어마어마한 사찰이 아니다. 대조사가 있는 임천면 성흥산에 올랐을 때의 첫 느낌은 ‘뭐야 왜 이렇게 작아’였다. 우리동네 관악산에 있는 사찰보다도 더 작은 대조사였다. 물론 사찰을, 물리적인 공간의 크고 작음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성왕과 겸익이 창건에 힘을 썼다면서? 공주에서 부여로 천도하는데 신호탄과 같은 역할을 했다면서...

 

 

 

# 고려 초기 석불: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하지만 그런 ‘외소 콤플렉스’를 일거에 날려버릴 석불이 있었다. 바로 석조미륵보살입상이다. 석조관음보살입상은 무려 10미터가 넘는 큰 키를 자랑하는 ‘거인’과도 같은 풍모였다. 얼핏 보면 우스꽝스러운 외모를 가지고 있는데 인체비례로 따지면 4등신에 가깝다고 한다. 또한 얼굴은 어찌나 큰지 ‘얼큰이’ 같았다. 머리에 쓴 네모난 관도 매우 특이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정교성보다는 투박함이, 조화미보다는 개성이 넘치는 석상이었다.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고려 초기의 작품이다. 옆 동네 논산 관촉사에 있는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도 고려 초기의 작품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그럼 왜 고려 사람들은 선이 굵으면서, 개성이 넘치는 이런 큰 석불을 제작했을까? 이전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의 사람들보다 정교성이나 세공 기술이 떨어져서 이런 식으로 석불을 제작을 했단 말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고려시대 사람들의 기술력이 떨어져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대조사 석조관음보살입상은 당시 그 지역, 중부지방 일원의 민간신앙이 접목된 석불이었다. 마치 큰 장승을 세운 것처럼 석불을 조각했던 것이다. 마을의 수호와 안녕부터 개인적 기복까지 다 받아주는 수호신과 같은 ‘키다리 아저씨’를 제작했던 것이다. 삼국시대 귀족불교에서 출발한 불교문화가 통일신라를 거친 후 고려 초기 시대에 각 지역의 민간신앙과 어떤 식으로 접목이 되었는지 탐구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한편, 재미있는 것은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약 18미터)보다 키가 작을지 모르지만 보물로 재정된 순번은 더 빠르다는 것이다. 대조사 석불이 보물 제217호이고, 관촉사 석불이 보물 제218호다.

 

대조사는 경내가 작지만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 있어 큰 사찰이 됐다. 10미터가 넘는, 그것도 천년의 세월을 이겨내며 꿋꿋이 성흥산 일대를 굽어보는 석불이 있는 사찰이 작다고 표현을 하면, 그거 큰 실례일 것이다. ‘대조사는 아담하기에 차분하게 경내를 둘러 볼 수 있어 좋았다. 큰 대조사 석불이 있어 작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렇게 바꿔서 표현할 수 있겠다.

 

 

 

 

* 대조사 석조관음보살입상: 멀리 아래쪽에서 찍어봤다.

 

 

 

* 대조사의 건물들과 석조관음보살입상: 대조사는 경내가 작은 사찰이었다. 하지만 석조관음보살입상이 있어 결코 작은 사찰이 아니었다.

 

 

 

 

 

 

이제 일행은 무량사로 향했다. 무량사는 외산면 만수산에 위치해 있다. 무량(無量)사의 뜻은 셀 수 없다는 뜻이다. 세월도, 돈도, 삶조차도 셀 수 없다는 것이다. 그 곳 무량사에 들어서면 셀 수 없단다. 무량사를 탐방했을 때가 11월 3일이라 세상은 이미 늦가을에 접어들었다. 그래서 저 강원도 지역은 이미 단풍철이 지났다고 했다. 하지만 무량사는 늦가을의 정취가 남아 있었다. 올 가을은 단풍놀이다운 단풍놀이를 못하고 넘어가나 했더니 무량사에서 단풍을 제대로 구경했던 것이다. 문화재 관람과 단풍놀이를 동시에 즐겼던 셈이다. 이래서 사람들이 우리문화답사 여행을 떠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문화 유적을 탐방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대자연의 정취에 녹아들기 때문이다. 그만큼 우리 선조들이 만든 유물과 유적은 자연의 조화를 중시해 제작을 했다는 뜻이다.

 

 

 

# 방랑시인 김시습의 흔적이 곳곳에 베어든 천년 고찰 무량사

 

무량사는 생육신 매월당 김시습이 말년을 보낸 곳으로 유명하다. 세조에 의해 단종이 폐위된 사건을 보고 천재 시인 김시습은 세상을 등지고 정처 없이 유랑길에 나선다. 그렇게 유랑생활을 계속하다 말년에는 이곳 무량사에 머무르게 되고, 결국에는 병환으로 서거하게 된다. 그때가 그의 나이 59세였다.

 

이렇듯 무량사는 김시습과 관련된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다. 그 유명한 무량사 극락전의 편액을 김시습이 직접 썼다고 한다. 당시 극락전은 수리를 하고 있었는데, 마땅히 시주할 것이 없었던 김시습은 글씨로서 시주를 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편액 글씨로서 재능 나눔을 했던 셈이다.

 

김시습의 유려한 서체가 빛나는 극락전은 외형도 참 웅장하다. 외부에서 보면 2층 기와집인데 안으로 들어가면 1층이다. 위아래를 터버려서 하나의 층으로 만든 것이다. 그래서 극락전 내부에 모셔진 소조아미타여래삼존상도 키가 크다. 본존인 아미타불상이 무려 5.4미터라고 하는데 동양 최대 규모라고 한다. 극락전 외부가 크고 웅장한 만큼 내부의 삼존불상도 크고 화려했던 것이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무량사는 2층 전각 구조를 가졌다. 극락전은 조선 중기 시대에 재건축되었는데 다층 구조를 가진 건축물은 충북 보은의 법주사 팔상전이 유명하다. 억불 정책에 의해 불교를 탄압했던 조선에서 크고 웅장한 다층 구조의 사찰 건축물이 들어섰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고 한다. 임진왜란에 참전한 승병장들의 활약으로 인해 천대받던 불교가 다시 주목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곡창지대에 있는 사찰들을 중심으로 큰 건축물들이 들어서게 됐다고 한다. 전북 김제 금산사 미륵전, 전남 구례 화엄사 각황전, 충북 보은 팔상전 등이 대표적이다.

 

 

 

# 무량사의 자랑: 무량사 오층 석탑

 

무량사에서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무량사 오층석탑이다. 오층석탑은 차곡차곡 쌓아 올려진 모습이 인상적이다. 한층 한층 올라가지만 안정감을 잃지 않은 모습이 인상적이다. 7미터 이상으로 쌓여 올린 탑은 고려 전기의 작품이라고 한다. 같은 시기에 제작된, 앞서 본 장하리 삼층석탑과는 좀 다른 인상이 느껴진다. 이런 장중하면서 안정감을 강조한 오층석탑이 무량사 극락전 앞에 서있다.

 

또 오층석탑 앞에서는 석등이 하나 서있다. 일명 무량사 석등이다. 이 역시 고려 초기의 작품이라고 한다. 석등을 맨 앞으로 하여, 오층석탑과 극락전이 연이어 서있는 모습은 무척 인상적이다. 귀중한 우리의 문화유산들이 조밀한 공간에 세 개나 있다는 건, 보는 이에게 새 배 이상의 기쁨을 선사할 것이다.

 

답사는 외산면 반교마을과 홍산면 홍산관아 탐방으로 이어졌다. 반교마을은 돌담길이 잘 정비된 곳인데 현재 유홍준이 ‘휴휴당’이라는 집을 짓고 실제로 살고 있는 곳이다. 유홍준은 자신이 반교마을 청년회 회원이라고 힘주어 말해 답사객들의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홍산관아는 옛 관아의 원형이 비교적 잘 남아 있는 곳이다. 관아는 고을의 수령이 직무를 보던 곳으로 지금의 군청이나 읍사무소의 역할을 했다. 대신 조선시대 수령들은 사법권도 행사하고 있었기에 관아에는 자체적으로 감옥도 갖추고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전국에 330여 곳에 관아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친 후 관아들은 다 파괴되거나 원형을 잃게 된다. 그나마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한 관아가 바로 홍산현 관아라는 것이다.

 

홍산관아 탐방을 끝으로 하루 동안의 짧은 부여 답사여행이 끝이 났다. 좀 더 둘러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다음 기회를 기약해야 했다. 하긴 한 번 오고 다시 부여에 안 올 텐가?

 

이렇게 좋은 답사여행을 준비해주신 유홍준 선생님과 눌화출판사에 감사를 드린다. 유홍준 선생님은 우리나라 문화 답사의 붐을 일으킨 주범(?)으로서 앞으로도 더 많이 답사여행 가이드에 나서주셔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책에 기술된 유적 앞에서 독자들을 위해 마이크를 든 저자 유홍준의 모습은 참 행복해보였으니까!

 

 

 

 

 

* 무량사 극락적, 오층석탑, 석등: 차례로 위치해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무량사 극락전: 조선 중기에 다시 지어졌다고 한다. 외부에서는 2층으로 보이나 사실은 천장이 높은 1층이다. 층간을 터버려서 내부는 1층으로 만든 것이다.

 

 

 

*무량사 오층석탑: 한 층, 한 층 올려진 모습이 안정감 드러낸다. 고려 초기 작품으로 백제와 통일신라 기법이 어우러진 석탑이라고 한다.

 왼쪽 하단에 있는 꼬맹이 녀석은 오층석탑이 좋은지 탑돌이를 하는 것 같다.

 

 

 

 

 

*홍산 관아 객사: 조선시대에는 전국 팔도에 330여 고을이 있었고, 그 고을마다 관아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관아들은

거의 다 사라져 갔다. 홍산현 관아는 비교적 원형복원이 잘 된 곳이라고 한다.

 

 

 

 

 

* 홍산현 관아 객사: 조선시대 객사에는 임금과 궁궐을 상징하는 궐패가 안치되었다고 한다. 수령은 임금을 대신하여 고을을 다스리기에 그에 걸맞은 징표를 객사에 두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객사는 수령이 근무하는 동헌보다 더 격이 높은 곳이라고 한다. 한편 동헌은 객사의 동쪽에 있다고 해서 동헌이라고 불린다.

 

 

 

 

 

 

 

 

 

 

 

 

* 대조사석조관음보살입상과 답사객: 이 사진을 통해서도 대조사 석불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석불 뒤쪽으로 길이 있어 바로 옆에서 석불을 볼 수 있다. 또한 소나무가 석불과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 무척 이채롭다.

 

 

 

 

 

* 장하리 삼층석탑: 석탑 바로 옆이 민가라 그런지 마을아주머니가 탑 주변에서 작업을 하시고 계셨다.

 

 

 

 

---> 전편에서 계속

 

 

 

충청남도 부여는 백제의 3번째 수도였다. 일명 <개로왕 국서>라 불리는 문서로 인하여 고구려 장수왕에 의해 한성이 함락되고 백제왕이 죽는 참극이 일어났는데 그 때가 서기 475년, 개로왕 즉위 21년이었다. 국왕이 죽고, 수도가 함락된 백제는 허둥지둥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천도를 한다. 그때부터 웅진 백제시대라고 하는데, 웅진 시대는 서기 475년부터 538년까지 약 63년간 지속된다.

 

부여로의 천도는 26대 성왕 시기에 이루어진다. 성왕은 국호를 백제에서 남부여로 바꾸고 국가의 부흥을 도모하게 된다. 급기야 웅진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의 천도가 이루어지기까지 했다. 그 시기를 일컬어 사비시대라고 한다. 서기 538년부터 백제가 멸망한 660년까지를 말하는데 약 122년에 걸쳐 사비시대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부흥을 위해 천도된 곳에서 백제는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을 당해야 하는 비운을 겪게 된다.

 

역사의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백제가 멸망하고 난 후 부여는 그저 중앙권력에서 벗어난 변방에 불과했다. 그건 공주도 마찬가지였다. 경주 -> 개경 -> 한양으로 중앙권력이 이동을 했지만 부여와 공주는 옛 백제 땅으로만 기억될 뿐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런 중앙에서 비켜난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에 현재의 부여와 공주는 문화유산 답사를 하기에 상당히 호조건에 있다. 호젓하게 문화유적 답사를 하고, 느긋하게 트래킹도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데 역사의 현장도 ‘새옹지마’가 될 수 있는 것일까?

 

 

 

 

*부여의 단풍

 

 

 

* 유홍준: 무량사 경내에서 무량사의 연혁과 김시습에 대한 설명을 답사객들에게 하고 있다.

 

 

 

 

 

 

 

 

여행의 일정은 다음과 같았다.

 

국립부여박물관(정림사터) 집합 -> 장암면 장하리 삼층석탑 -> 임천면 대조사 -> 외산면 무량사 -> 반교마을 -> 홍산관아 -> 국립부여박물관 입구

 

오전 9시부터 진행된 답사는 오후 5시가 되서야 끝이 났다. 일명 '유구라'라고 불리는 유홍준 선생의 입담은 직설적이면서도 구수했다. 막힘이 없는 달변을 구사했고, 주제 전달력도 상당히 뛰어났다. 자연스럽게 청중의 집중을 이끌어 냈다면 그거 여행가이드로서 최고의 능력 아닌가? 이런 분이라면 여행의 주도권을 내놓아도 상관이 없지.

 

첫 도착지인 장하리 삼층석탑은 장하리 마을 언덕에 세워진 고려시대 석탑이다. 그 유명한 정림사지 오층 석탑의 '3층석탑' 버전으로 보이는 이 석탑의 축조 시기는 고려 전기라고 한다. 장하리 삼층석탑은 ‘늘씬함’을 드러내지만 정교함을 잊지 않은 모습이었다. 사비 백제시대 축조된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롤모델로 삼은 탑이지만 그냥 무턱대고 베끼지는 않은 듯싶었다. 백제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 초기의 탑 축조 기술이 서로 어우러져 장하리 삼층석탑을 만들었던 것이다.

 

한편 옛날에는 삼층석탑 자리 옆에 한산사라는 사찰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 한산사는 사라지고 삼층석탑만이 홀로 남아 웅장했을 옛 사찰의 기억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것은 정림사 오층석탑도 마찬가지다. 현재 정림사도 절터만 남아 있고 오층석탑만이 웅장했을 정림사의 옛 모습을 유추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고보면 사찰은 사라져도 석탑은 남아 있게 되는 것 같다. 돌은 그냥 남아 있는 것 같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이스턴 섬의 이스턴 석상이나 영국의 스톤 헤지가 항상 그 자리에 그렇게 서있는 것처럼 말이다.

 

 

 

 

 

* 반교마을: 유홍준 선생의 반교마을 집의 이름은 '휴휴당'이다. 그 대문을 지키고 있는 백소나무가 눈길을 끈다. 얼핏보면 저 백소나무가 비실비실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런 나무들이 꿋꿋하게 오래간다고 한다. 자신의 응축된 에너지를 잘 간직하고 있다가 제때에 방출한다는 것이다. 오버하지도 않고, 건방을 떨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에너지를 발산할 때는 발산을 하여 한뼘 한뼘 자신의 가지를 키운다고 한다. 괜히 자기 잘난 맛에 취해 자신의 에너지를 한꺼번에 쏟아 놓고 사멸해 가는 인간들에게 좋은 교훈을 주는 나무인 것 같다. 인생은 한 방 인가? 그건 모르겠고. 최소한 나무의 인생에서 한 방은 무척 위험한 것이다.

 

 

 

* 부여의 가을

 

 

 

 

 

 

 

 

 

 

 

 

 

 

 

 

 

* 대조사 석조관음보살입상: 고려 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생김새와 조각기법 등이 논산 관촉사 석조관음보살입상과 유사성을 띄고 있다.

안동 이천동 석불상, 관촉사 석불 등 고려 초기의 석불 등은 위 사진처럼 아주 거대한 크기로 제작됐다. 전체 높이가 10미터가 넘는 대조사 석상은

그냥 봐도 투박하다. 인체 비례도 맞지 않다. 이천동 석상이나 관촉사 석상도 마찬가지다. 왜 고려 초기 사람들은 이토록

투박하고 '얼큰이' 같은 석불을 제작했을까? 그들의 조각 실력이 미천해서???

 

 

 

 

* 대조사 뒷길 단풍: 대조사 탐방을 마친 후 임천면 면사무소 방면으로 길을 걸을 때 이 단풍나무들을 만났다. 생각지도 못한 단풍놀이를 해서 무척 흥이 났다.

 

 

 

 

 

---> 이 여행기는 유홍준 선생님과 함께 하는 부여답사기에 참여를 하고 작성한 포스팅입니다. 현재 충남 부여에 둥지를 튼 유홍준 선생님은 부여문화원의 요청으로 2009년 4월부터 부여답사 여행에 가이드를 하시고 계십니다. 1회 답사여행의 정원은 80명인데, 유홍준의 네임밸류가 있어서 그런지 접수와 동시에 마감이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부여문화원을 통해서 부여답사를 한 게 아닙니다. 눌와출판사라는 곳에서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 2>가 새롭게 나왔는데, 신간 발행 기념으로 답사이벤트를 진행했고, 저도 운이 좋게 답사에 참여를 하게 된 것입니다.

 

눌와출판사 탐방단 일행 40여 명은 부여문화원이 주관한 답사에 서로 결합하는 형식을 취했습니다. 그래서 11월 3일에 있은 부여답사 일행은 총 120명이나 됐답니다. 뜻깊고 알찬 행사를 주관해주신 눌와출판사와 부여문화원측에 감사를 드립니다. 덕분에 저도 좋은 답사여행을 했고, 현장에서 바로 책도 한 권 구매를 했습니다. <유홍준의 국보순례>라는 책을 사서 유홍준 선생님에게 직접 저자 사인도 받았습니다.

 

아! 정말 이런 문화 체험이벤트는 정말 좋습니다. 저자도 만나고, 책에 기술된 현장에 대한 답사도 하고. 꿩먹고 알먹고...ㅋ 기회가 닿는다면 <유홍준의 국보순례>에 대한 서평도 한 번 써보고 싶네요.

 

 

 

 

 

# 아웃도어와 문화답사

 

나는 아웃도어 여행을 즐겨하는 터라 단독여행이나 소규모 여행을 선호한다. 그래서 가이드 여행을 많이 해보지 않았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런 여행을 할 기회가 별로 없었고, 할 필요도 못 느꼈다. 가이드여행이라면 여행의 주도권을 내가 아닌 가이드들이 행사하는 것인데, 그것이 별로 탐탁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행의 주체자는 어디까지나 내 자신 스스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이런 사고방식이 꼭 좋은 것은 아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부분, 미처 내 시선이 담아내지 못하는 부분들을 가이드들이 짚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앞서도 언급했듯이 여행의 주도권은 잠시 접어야 한다. 나는 그런 것이 ‘거시기’했던 것이다.

 

하지만 여행가이드가 유홍준이라면? <나의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의 저자이자 문화재청 청장을 역임한 유홍준이라면? 그거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 유홍준이 가이드를 해준다면 여행의 주도권을 잡시 접어둔다고 해도 상관이 없을 것이다. 유홍준 에 대한 설명은 따로 할 필요가 없지 않나? <나의문화유산 답사기>라는 저서가 많은 것을 대변해주지 않는가 이 말이다. 그러고 보면, 유홍준은 참 복받은 사람이다. 그의 저작물들이 독서인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고, 그로 인해 유홍준이라는 이름 석 자가 대중들에 의해 각인이 됐기 때문이다. 자신이 쓴 책으로 인해 폭넓은 독서 계층을 확보한 저자가 몇 명이나 있을까? 소설가나 시인 같은 문인이 아닌 미술사 저작물을 통해 폭넓은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는 사람이 도대체 대한민국 지식인층에서 몇 명이나 될까 이 말이다.

 

더군다나 노무현 정권 시절, 유홍준은 문화재청 청장이라는 우리나라 문화재 행정의 수장으로서 그 이름을 날리지 않았던가. 그는 2004년 9월부터 2008년 2월까지 문화재청장 직을 수행했다. 유홍준은 3대 청장을 역임했는데, 솔직히 일반 대중들이 유홍준 이외에 다른 문화재 청장에 대해서 아는 사람들이 있을까? 현재 문화재 청장은 김 찬씨인데, 그는 6대 청장이다. 그런 대중적 관심도와 인기로 인해, 유홍준은 <1박 2일>이나 <놀러와>와 같은 인기 예능 프로그램에도 출현을 했다.

 

 

 

 

* 장하리 삼층석탑과 유홍준 쌤: 유홍준 쌤은 특유의 언변으로 답사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 부여의 가을: 단풍이 예쁘게 색깔을 머금고 있어 카메라에 담아 보았다.

 

 

 

 

# 아웃사이더 기질이 있던 유홍준

 

 

하지만 그도 탄탄대로만을 걷지는 않았다. 기억하시는가? 2008년 2월에 있은 숭례문 방화사건을 말이다. 당시 신병을 비관한 한 남성이 불을 질러 숭례문이 전소된 사건 말이다. 당시 문화재청장이었던 그는 유럽 출장 중이었다고 한다. 국내에 머물고 있지 않았지만 국보 1호인 숭례문의 상징성 때문에 문화재 행정의 수장이었던 유홍준은 책임을 지고 사퇴해야 했다.

 

또한 유홍준은 풍운아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1967년 서울대 미학과에 입학한 그는 1981년 홍익대 대학원에 입학해 미술사학으로 석사과정을 밟는다. 1967년부터 1981년 무려 14년의 시간적 간극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을까. 1967년부터 1981년 사이의 대한민국의 당시 상황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면 유홍준이 걸었을 길이 순탄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쉽게 짐작 할 수 있다. 사실 그 기간 동안 유홍준은 학생운동으로 인해, 투옥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런 폭압적인 정치 세력과의 갈등과 고민, 우리문화에 대한 사랑은 <민족미술협의회> 발족으로 이어지게 된다. <민족미술협의회>는 <민족문학작가회의>와 비슷한 성향의 단체로 보시면 될 것 같다. 단지 구성원들이 다를 뿐 우리문화, 우리문학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공통분모로 두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학문적 과정도 마찬가지다. 1967년 서울대 미학과 입학, 1981년 홍익대 대학원 석사과정(미술사학과), 1988년 성균관대 대학원 박사과정(예술철학) 등 계속 학교를 옮겨 가면서 공부를 하게 된다. 학부, 석사, 박사 과정을 한 대학교에서 수학하는 통상적인 방식이 아니었고, 하나의 테마에 집착한 학문 과정도 아니었다. 석사학위와 박사학위가 다른 것을 보면 그가 걸어간 학문적 길이, 깊이보다는 넓이에 주안점을 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유홍준의 면모를 보면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우리나라 지식인 사회 풍토상 '넓이'에 주안점을 두었으면 전문성이 없다는 평가를 받으며 폄하를 받지 않던가. 그럼 유홍준은 지식인 사회에서 어떤 평가를 받았을까? 위에 언급 그대로다. 우리나라 지식인 풍토가 그리 너그럽지 못하지 않던가. 풍운아에 대한 대접을 적절하게 해주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야기가 길어졌다. 이번 부여 문화답사 행사는 눌와출판사에서 진행을 했는데, 신간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 2> 발행 기념으로 마련된 것이다. 나는 인터넷 서점 알라딘을 통해 본 행사에 지원을 했는데 운이 좋았는지, ‘끝발’로 당첨이 되어 11월 3일(토요일) 부여 답사에 나설 수 있었다.

 

 

 

 

 

* 대조사 석조관음보살입상: 카메라 각도를 다르게 해보니 마치 석불이 숨바꼭질 하는 모습처럼 보인다.

 

 

 

 

  * 반교마을의 석등: 유홍준 선생의 반교마을 집에 있는 석등. 지리산 실상사에 있는 석등을 '카피'하여 세웠다고 한다.

 

 

 

 

* 유홍준과 나무들: 유홍준 쌤은 자신의 독자들과 사진을 찍는게 익숙하신지 아주 자연스러운 포즈를 지으셨다.

 그에 비해 나무들(필자)은 굳은 표정이다.ㅋ 뒤쪽에 서있는 여자분은 눌와출판사 직원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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