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소문과 서소문공원, 광희문과 신당동

 

시체가 나간 두 개의 문, 서소문과 광희문

 

15.04.14 13:52   최종 업데이트 15.04.14 16:20

 

 

 

 

 

 

 

 

 
▲ 서소문 공원 서소문 공원에 있는 순교자현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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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양에는 두 개의 문이 있었다. 무슨 문? 시체가 나가는 두 개의 문이 있었다.

하나는 소의문이라고 불렸던 서소문이고, 다른 하나는 남소문 역할을 했던 광희문이다. 조선시대 한성부에서는 도성 안과 도성 인근 십리 안에는 묘를 쓰는 것을 금지했다. 도성 인근 십리 부근을 '성저십리(城底十里)'라 했는데, 도성과 성저십리는 한성부의 관할이었다. 만약 도성 안에도 묘를 썼다면, 아마도 남산 같은 경우는 공동묘지가 됐을지 모른다. 그럼 '남산골 샌님'이 아닌 '남산골 처녀귀신'이 같은 괴담이 퍼져 나갔을까?

 

 

 

* 소덕문 터: 지금의 중앙일보 주차장 입구.

 

 

 

 



처형장으로 쓰인, 서소문

서울 시청역에서 <중앙일보> 사옥 방면으로 가다보면 철도건널목이 보인다. 그 건널목을 건너면 공원이 나오는데 그곳이 바로 서소문 공원이다. 서소문 공원은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근린공원 규모의 작은 공원이지만 그 역사성만큼은 대단한 곳이다.

서소문은 소덕문(昭德門) 혹은 소의문(昭義門)으로 불린 사소문 중 하나다. 1396년 태조 3년, 이 문이 지어졌을 때는 소덕문이라 불렸다가 1744년(영조 20)에 문루를 세우면서 소의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 자리에서 좀 벗어난 곳에 서소문 공원이 위치해 있는 것이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서소문은 광희문과 함께 시체가 나가는 문 중 하나였다. 하지만 광희문과는 다른 것이 있었다. 처형장으로 쓰였다는 점이다. 서소문, 정확히는 서소문 밖이 처형장으로 쓰였는데 이는 유교 오경 중 <예기>에 언급된 가르침을 적용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예기>에는 '형장은 사직단의 우측이어야 한다'고 적어 놓았는데 서소문 밖이 그 말에 일치되어 조선의 공식 처형장으로 쓰이게 된 것이다.

 

 



 
▲ 서소문 공원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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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유교 경전식 해석 말고 다른 해석도 있다. 서소문에서 의금부나 전옥서(죄수를 관장하는 관서) 등이 가까운 터라 서소문이 처형장으로 쓰였다는 것이다. 지도상에서 보면 사직단이나 서소문이나 둘 다 거의 동일선상에 있는 터라 후자의 의견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렇게 서소문 밖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을 당했다. 신유박해(1801년) 때는 정약용의 셋째 형인 정약종이 이승훈, 최창현 등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 이때 정약종의 첫째 아들 정철상도 함께 목숨을 잃게 된다.

기해박해(1839년) 때도 많은 천주교인들이 서소문에서 처형을 당하게 됐다. 정약종의 둘째 아들이었던 정하상과 딸인 정정혜가 이때 참수를 당했다. 처형을 당한 것은 아니지만 정약종의 아내이자 하상, 정혜의 어머니인 유소사도 기해박해 때 목숨을 잃게 됐다.

서소문에서는 신유박해 때부터 병인박해까지 100여 명의 천주교인들이 처형을 당한다. 그래서 서소문은 천주교 최고의 성지 중에 한 곳이다. 그래서 현재 서소문 공원에는 순교자현양탑이 세워져 있다. 2014년에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도 서소문 공원을 방문했다. 

 

 

 



 
▲ 서소문 공원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문을 기념하여 동판을 새겨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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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을 둘러싼 갈등들

현재 서소문 공원 일대는 '역사공원' 사업이 진행 중에 있다. 지하에 성당을 만들고, 천주교 순교 성인을 위한 기념전시관을 만드는 데 약 500억 원이 투입될 예정이다. 

하지만 이 '천주교 성역화' 사업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이들이 있다. <서소문공원 바로 세우기 범국민대책위원회(아래 범대위)>가 바로 그들이다. 범대위는 서소문에서 생을 마감한 이들이 천주교인들만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동학농민전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김개남, 동학의 2대 교주였던 최시형, 홍경래 난에 연루된 관련자들, 사육신인 성삼문, <홍길동전>의 허균 등이 모두 서소문에서 이승과 작별을 했다고 강조한다. 즉, 서소문 공원이 천주교만의 성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범대위 측과 천주교 측의 입장이 절충될 수는 없을까? 서소문 공원에 천주교 성지 건물과 동학(천도교)을 비롯한 민족 종교의 건물이 동시에 등장할 수는 없을까? 이런 식으로 말이다. A구역은 천주교, B구역은 동학, C구역은 인물 역사관 등등...

자, 이제까지 필자는 서소문 공원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서소문 자체보다는 서소문 공원에 대해서 훨씬 더 길게 설명했다. 왜? 서소문은 현재 없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철거됐다. 그래서 현재의 서소문 공원이 옛 서소문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셈이다.

 


 


 
▲ 복원된 성벽 한양 도성의 성곽 중 평지 부분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거의 다 훼손되고 만다. 평지에 있던 서소문도 철거가 되고 만다. 사진에 복원된 성벽은 중앙일보 뒤편에 있는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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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소문역사공원범국민대책위원회: 현수막

 

 

 

 

 

우사단 길도 공동묘지?

도성 안에 매장을 하지 말라는 원칙은 잘 지켜진 반면, '성저십리' 원칙은 서서히 무너져 갔다. 그래서 시체가 나가던 서소문과 광희문(光熙門) 인근에는 공동묘지들이 하나 둘씩 들어서게 됐다. 서소문으로 나갔던 시체들은 지금의 아현동 부근에 묻히게 됐다. 광희문에서 나가는 시체들은 신당동이나 왕십리, 이태원 쪽으로 매장됐다. 그러고 보니 언급된 동네들은 야트막한 언덕배기로 되어 있어 공동묘지가 되기에 안성맞춤(?)인 곳들이다. 그래서 이런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지금 한창 핫플레이스로 뜨고 있는 이태원 우사단길도 예전에는 공동묘지가 아니었는지?"

신당동과 관련된 흥미로운 이야기가 하나 있다. 지금이야 신당동하면 떡볶이로 유명하지만 예전에는 무당들이 모여 산 곳으로 유명했다. 광희문 밖으로 나온 망자들을 위해, 유족들은 무당들을 불러 굿을 하며 넋을 달랬다고 한다. 광희문 밖은 자연스럽게 하나둘씩 신당이 늘어나게 됐고, 이후 신당이 많다 하여 신당동(神堂洞)으로 불렸다. 이후 갑오개혁 때부터는 한자어가 신당동(新堂洞)으로 바뀌어 이제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편 광희문도 서소문처럼 천주교의 성지다. 옥사를 한 천주교인들의 시신이 광희문 밖에 버려졌고 그 곳이 성지화된 것이다.

이제까지 시신들이 나갔던 두 개의 문에 대해서 알아봤다. 죽은 자들은 그 문을 통해 다시는 도성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죽은 자들은 도성에서 '거주'할 자격이 없었던 것 같다. 그건 그렇고... 서소문은 언제 복원이 될까? 앞서도 언급했듯이 서소문 공원에 500억이 투입된다는데 서소문 복원이 우선이 아닐까?

 
▲ 광희문 평지에 있던 광희문도 훼손됐다, 지난 1975년에 다시 복원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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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희문

 

 

 

덧붙이는 글 |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http://blog.daum.net/artpunk

 

 

 

 

끊어진 곳에서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하다!

 

홍지문, 동십자각, 광희문... 이 건축물들은 왜 끊어졌을까

 

 

15.04.03 11:15  최종 업데이트 15.04.03 14:58

 

 

 

 

 

 

 
▲ 홍지문 끊겨진 성벽 위로 도로가 닦였고, 그 위로 자동차들이 쌩쌩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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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언가를 항상 연결하고 이으려고 한다. 이쪽과 저쪽을 연결하려고 길을 닦는다. 바쁘다는 핑계로 연락이 뜸했던 지인들과의 인맥을 다시 잇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연결과 이음은 인간의 본성 중에 하나일지도 모른다. 이와 달리 끊김은 회피하려고 한다. 부정적이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때 한강 다리가 끊겨 수많은 피난민이 수장되었다. 상호 간에 왕래가 끊겼다는 것은 서로 소원해 졌다는 뜻이다.


건축물도 마찬가지다. 건축물이 끊겼다는 건 좋은 뜻이 아니다. 그 정체성이 훼손되어 원래의 의미를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런 '끊어진 건축물'들을 소개해보고자 이 글을 작성하였다.

 

 



 
▲ 동십자각 도로 위에 섬처럼 떠있는 동십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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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처럼 떠 있는 동십자각


광화문에서 동쪽, 삼청동 방면으로 가다보면 누각 하나가 '껑뚱'하게 떨어져 나와 있는 것이 보인다. 광화문 인근이라서 그런지 자동차들이 쉴 새 없이 그 앞을 지난다. 외국인 관광객들을 태운 대형 버스들도 많이 지나간다. 도로 한복판에 툭 튀어 나온 누각을 보고 있다 보면 마치 도로 위에 섬이 떠 있는 느낌이 들 정도다.

도로 한복판에 외떨어져 나온 누각은 동십자각이다. 동십자각은 경복궁의 동쪽의 방위 초소 역할을 했던 곳이다. 보통 궁궐은 '궁'과 '궐'이 합쳐진 것을 지칭한다. '궁'은 말 그대로 궁이다. '궐'은 높은 석대 위에 누각을 올려놓은 것을 말한다. 이 둘을 합쳐 '궁궐'이라고 했던 것이다. 만약 '궐'이 없다면 궁궐이라고 하지 않고, 그냥 궁이라고 했다.

광화문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동십자각, 서쪽으로는 서십자각이 배치되었는데 이는 유일하게 궐문 형식을 갖춘 것이었다. 즉 조선의 법궁이었던 경복궁의 위상을 궐문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현재 동십자각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동십자각은 경복궁의 담벼락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럼 왜 지금처럼 끊겨 있는 걸까? 일제에 의해 끊기게 됐다. 일제는 조선총독부를 만든다는 명목으로 경복궁의 남쪽 담벼락을 다 헐어버렸다. 그리고 광화문도 원래 위치에서 멀리 떨어진 동북쪽으로 옮겨버렸다. 지금의 민속박물관 부근이다. 돌담들이 서 있던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게 철책선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구한말에 촬영한 사진을 보면 동십자각에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 계단을 타고 지상으로 오르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계단을 확인할 길이 없다. 한편 동십자각은 감시초소였던 만큼 그 역할은 무척 중요했다. 명성황후를 시해했던 일본인 자객들도 동십자각을 점령한 후 경복궁 내부로 진입했다.

그래도 동십자각은 서십자각보다는 상황이 더 낫다. 서십자각은 아예 허물어졌기 때문이다. 일제는 광화문에서 영추문 사이에 전차노선을 개설했는데 그때 서십자각을 철거했던 것이다. 멀쩡한 광화문을 옮겨버리고, 담장을 헐고, 누각도 철거시키고... 그러고 보면 일제도 반달리즘을 저지른 셈이다. 반달리즘은 로마의 유적들을 파괴했던 반달족들의 반문명적인 행위를 빗댄 명칭이다.

 

 

 


홍지문을 보며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하다

 


조선시대의 도성 방어는 이중 방어 형식을 띠었다. 1차 방어라인은 내사산(북악산-낙산-목멱산-인왕산)이었고, 2차 방어라인은 외사산(북한산-아차산-관악산-덕양산)이었다. 조선 초기, 내사산에는 한양도성이 축조되어 그 방어력을 더 배가시켰다.

이후 숙종 시기에 북한산성의 축조로, 한성 북쪽 지역은 이중방어 체제가 더 공고해졌다. 여기에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는 길이 4km의 성이 만들어졌으니, 이 성을 두고 탕춘대성(湯春大城)이라고 불렀다. 탕춘대성은 성곽이 자리 잡은 곳 인근에 탕춘대라는 돈대가 있어 탕춘대라고 명명됐다고 한다. 탕춘대는 지금의 세검정 초등학교 인근에 위치해 있다.

 

 



 
▲ 홍지문 홍지문과 오간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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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이 들어섰으니 성문도 있어야 했다. 그래서 생긴 것이 홍지문이다. 인왕산 줄기를 타고 내려온 탕춘대성의 성벽은 홍제천에서 홍지문과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으로 그 형태를 달리한다. 홍제천을 건넌(?) 이후에는 가파른 비탈을 타고 북한산 방면으로 향한다.


앞서 탕춘대는 돈대라고 언급했다. 돈대는 경사면을 자르거나, 혹은 채워서 평평하게 만든 것을 말한다. 높은 곳에 위치해 있는 돈대는 주위를 관망하기에 좋다. 그래서 주로 군사시설에 쓰였다. 하지만 탕춘대는 유희 공간으로 쓰였다. 연산군이 세웠던 탕춘대는 앞으로 홍제천이 흐르고, 그 건너편에는 북악산이 위치해 있으니 놀기(?)에 적당한 곳이었을지 모른다.    

홍지문은 동십자각과는 달리 자연재해를 입어 '끊기게' 됐다. 풍유를 즐기게 해주었던 홍제천이 범람하여 홍지문을 비롯한 오간대수문을 싹 다 쓸어버린 것이다. 그때가 1921년이었다. 홍지문과 오간대수문이 다시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된 건 1977년이었다. 56년 동안 방치되어 오다가 다시 그 자리를 찾은 것이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50년이면 세상이 5번이나 바뀔 기간이었다. 그 기간 동안 홍지문은 복원이 됐지만 인왕산 쪽의 성벽은 단절되었다. 그 위로 도로가 생겼기 때문이다.
오늘도 홍지문 옆으로 자동차들이 '쌩쌩' 달린다. 그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면서 머릿속으로나마 옛 모습을 복원해본다. 그 자동차들을 제거하고, 아스팔트도 들어내 본다. 그리고는 그 위로 성벽을 연결하여 끊어진 구간을 연결시켜 본다.

 

 



 
▲ 광희문 도심의 확장으로 인해 '끊겨진' 광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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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확장으로 '끊긴' 광희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가 위치해 있는 곳에서 신당동쪽으로 살짝 코너를 돌면 광희문이 자리 잡고 있다. 사람들 중에는 간간이 광희문(光熙門)과 광화문(光化門)을 혼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광희문'과 '광화문'의 한글 명칭에도 차이가 있듯, 이 두 문은 전혀 다른 개념의 문이다. 광화문은 동십자각 부분에서도 언급했듯이 경복궁의 정문이다. 궁궐의 대문(大門)이라는 말이다. 이에 비해 광희문은 소문(小門)이다.

도성에는 사대문 이외에도 작은 문 4개를 만들었는데 이를 사소문이라고 하였다. 광희문은 숭례문(남대문)과 흥인지문(동대문) 사이에 있다하여 남소문이라 불리기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흥인지문 쪽에 훨씬 더 가깝게 위치해 있다. 그래서 광희문에서 10분 정도 걸어가면 동대문에 닿을 수 있는 것이다.

'빛나는 빛의 문'이라는 명칭과는 달리 광희문은 시체가 나가는 문이었다. 그래서 시구문(屍口門)이라고도 불렸다. 광희문을 나선 장례 행렬은 지금의 신당동과 왕십리로 이어졌는데, 그곳에 공동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 광희문 2014년 2월, 39년 만에 광희문이 개방됐다. 그 전에는 낮은 철책이 쳐져서 문 안으로 출입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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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희문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는 동안 크게 훼손됐다. 현재의 광희문은 1975년에 복원된 것인데 원래 위치보다 남쪽으로 15미터 가량 떨어져 세워졌다. 도로 확장 때문에 제자리에서 벗어나 복원된 것이다.


이와 같이 광희문의 '끊김'은 서울의 확장과 연관이 있다. 도심지가 확장될수록 성벽이 잘려나갔기 때문이다. 잘려나간 성벽 위로는 도로가 닦였다. 집이 지어지기도 했다. 심지어 운동장이 들어서기도 했다.

이제까지 '끊어진' 것들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끊어진' 것들을 알아봤으니 이제는 연결을 해보자. 무엇으로? 역사적 상상력을 이용해서. 눈을 감고 머릿속에서 3D를 그려내어 이곳과 저곳을 연결해보는 것이다.

 


"머리가 돌처럼 굳어 상상력이 떨어졌다고요? 그럼 현장에 가보세요. 유적 앞에서면 없던 상상력도 자연스럽게 떠오를 겁니다."    

 

 

 

덧붙이는 글 |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http://blog.daum.net/artpu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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