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공비 루트에 고운 단풍... 그런데 여기가 서울?



정릉에서 김신조 루트까지, 성북동 역사트레킹




16.11.21 13:10 최종 업데이트 16.11.21 13:10



            

다음 스토리펀딩에서 <함께 걷는 서울트레킹>이라는 프로젝트를 12월 20일까지 진행합니다. 그 프로젝트 연재글을 알맞게 편집·수정하여 오마이뉴스에 기고할 예정입니다. 이번글은 5편입니다. - 기자 말

    

▲ 북악산 북악산 하늘길, 일명 김신조 루트를 걷고 있는 참가자들.
빛깔 고운 단풍비를 맞으며 걷고 있다.

        

        



출발 전부터 바람이 불었다. 빗방울도 오락가락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늘이 처음 런칭하는 날인데..."

지난 10월 23일.

이 날은 성북동 역사트레킹이 행해진 날이었다. 성북동 트레킹은 스토리펀딩에서 처음으로 실시하는 트레킹이었다. 그래서 나름 준비도 열심히 했다. 발에 물집이 잡힐 정도로 답사도 여러번 다녀왔고, 자료를 찾는다고 책장을 분주히 넘기기도 했다. 하지만 당일 날 날씨가 발목을 잡았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바람이 불고,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트레킹할 때 날씨가 좋으면 반을 먹고 들어간다고 하는데 보시다시피 오늘은 꽝이네요."
"그래도 좋아요!"
"이런 날씨에 걷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오히려 그 자리에 모인 후원자분들이 더 걱정을 해주셨다. 말씀만이라도 고마웠다. 이런 후원자들과 함께 트레킹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축복일 테지!





▲ 정릉 세계문화유산 정릉.   

       







이성계의 총애를 받은 신덕왕후

트레킹 팀이 첫 번째로 탐방한 곳은 정릉(貞陵)이었다. 정릉은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이다. 황해도 곡산 출신인 신덕왕후는 이성계의 둘째 부인으로 이성계의 총애를 받게 된다. 1392년, 조선이 개국했을 때 태조의 옆에 서 있던 사람도 신덕왕후였다. 이성계의 첫 번째 부인인 신의왕후 한씨가 그 전 해에, 조선의 개창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결국 강씨는 현비로 봉해져 조선의 첫 번째 왕비에 오르게 된다.

조선왕조가 개창될 때 이성계의 나이는 58세였다. 그래서 즉위하자마자 세자 책봉에 나서야 했다. 현비였던 신덕왕후로서는 자신이 생산한 왕자를 세자의 자리에 앉히고 싶어 했다. 이성계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던 그녀였기에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했으리라.

하지만 쟁쟁하게 버티고 있던 신의왕후 한씨의 소생들이 문제였다. 방과(정종), 방원(태종) 등등... 신의왕후의 소생들은 조선 창업에 큰 공을 세운 이들었다. 호락호락한 인물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었던 신덕왕후는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정도전과 손을 잡게 된다. 정도전 입장에서도 이미 다 장성한데다 자기 주관이 뚜렷한 신의왕후 자제들보다는 아직 나이가 어린 강씨의 소생이 세자가 되는 게 더 좋았을 것이다. 재상중심의 왕도정치를 주창한 정도전이었으니까.

결국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이었던 방석(의안대군)이 1392년 8월 20일에 세자로 책봉된다. 그해 7월 17일에 조선이 개국했으니 약 한 달 만에 세자가 책봉이 된 것이다. 이에 이방원(정안대군)은 격분한다.

"정릉은 조선왕조가 개국한 후 처음으로 능으로 조성되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왕릉들에 비해서는 좀 허술해 보이지 않나요? 봉분을 둘러싼 봉분석도 없고요." 

그 말대로 정릉은 능의 격식에 맞지 않게 무언가가 빠져 있다. 여백의 미학이 아닌 인위적으로 뺄셈을 당한 것이다. 그렇게 뺄셈을 한 사람은 바로 태종 이방원이었다.

신덕왕후는 자신의 소생이 왕위에 등극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1396년(태조5)에 눈을 감고 만다. 자신이 너무나 사랑했던 신덕왕후가 죽자 이성계는 지금의 서울 정동, 현재의 영국대사관 자리에 능을 조성했다. 또한 흥천사라는 사찰을 지어 그녀의 명목을 빌었다.

이 흥천사를 두고 원찰(願刹)이라고 부르는데, 원찰은 망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어진 사찰을 뜻한다. 정조대왕과 그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묻힌 융건릉 인근에 있는 용주사도 원찰이다.



                             ▲ 정릉 봉분을 두르는 봉분석이 없다.

        






뺄셈을 당한 정릉

1398년 8월, 이방원이 주도한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무인년에 일어났다 하여 무인정사(戊寅靖社)라고도 불리는 1차 왕자의 난으로 인해 정도전은 목숨을 잃게 된다. 세자였던 이방석도 목숨을 잃게 된다. 

왕위에 오른 이방원은 도성 안에 무덤이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1409년(태종9)에 정릉을 지금의 위치인 성북동으로 이전시킨다. 본격적인 뺄셈이 시작된 것이다. 그 다음해에는 정릉의 봉분을 두르고 있던 석각신장 같은 석물을 광통교 건설에 쓰게 했다. 광통교는 청계천에 있는 다리다.

능에서 가져온 귀한 석재들로 돌다리를 만드는 만큼 그것들을 제대로 이용했으면 좋았으련만 이방원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일부러 신장석을 뒤집어 놓았던 것이다. 그래서 광통교 하단을 보면 몇몇 신장석들은 머리가 바닥을 향해 있다. 이방원은 철저하게 신덕왕후를 짓밟았던 것이다.

"여기 이거 물구나무 선 거 같지 않나요?"
"진짜 그러네요."
"청계천 복원할 때 뒤집어서 복원한 게 아니고, 광통교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부터 이렇게 물구나무를 세웠습니다. 광통교는 1410년, 태종 때 만들어졌지요. 이렇게 거꾸로 놓이게 된 건 제작자의 의도가 강하게 반영됐다는 뜻이겠죠."
"굳이 이렇게까지..."
"그나저나 이것들은 거의 600년 이상을 이렇게 거꾸로 세상을 보고 있었겠네요."


인왕산역사트레킹 때 광통교 앞에서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이런 스토리텔링이 있기 때문에 정릉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광통교도 함께 탐방할 것을 추천한다. 





▲ 광통교 정릉에서 빼온 신장석이 거꾸로 세워져 있다. 무려 600년이 넘는 시간동안. 광통교는 청계천에 있다.

     


 
  

아픈 현대사를 걷다, 김신조 루트를 걷다

정릉을 뒤로 하고 트레킹팀은 본격적인 길을 나섰다. 바람이 좀 더 세게 부는 듯했다. 빗줄기도 더 강해지고 있었다. 참가자들 중에는 우비를 꺼내 입은 분들도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날씨가 이런 게 내 잘못이야? 기왕 이렇게 된 거 좋게 생각하자. 오늘 가는 곳이 아픈 현대사를 담은 곳이잖아. 그러니 비를 배경 삼아 가는 것도 괜찮겠네.'

트레킹팀은 북악스카이웨이를 지나 <북악하늘길>로 접어들었다. 북악하늘길은 성북구에서 조성한 도보여행길로 총 4개 코스로 이루어져 있는데 트레킹 팀은 제2산책로를 '타깃'삼아 이동을 했다. 나는 제2산책로를 앞에다 두고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정릉을 거쳤고, 북악스카이웨이 옆 산책로도 지나왔습니다. 그러다보니 시간이 많이 소요됐습니다."
"그럼 거의 끝난 건가요?"
"아니요.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이 코스를 걷기 위해 우리가 여기에 온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예행연습이었어요."
"에이..."
"너무 해!"







      ▲ 북악산 하늘길 단풍이 고운 북악산 하늘길.         

       



그렇게 참가자들은 탄식을 내뱉었다. 어떤 참가자는 내게 '사기꾼'이라며 핀잔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자신이 있었다. 그 탄식과 핀잔이 감탄사로 바뀔 것이라는 그런 자신감.

"이 곳은 북악하늘길 제2코스입니다. 일명 김신조 루트라고 불리는 곳이죠."

북악산은 군사 목적으로 출입이 제한되다가 지난 2007년 전면 개방이 되었다. 그 군사적인 목적의 원인을 제공한 것이 바로 김신조 일당이었다.

"1·21사태, 일명 김신조 사건에 대해서 알고 계시죠? 청와대 습격 사건이라고도 부르는 그 사건이요."

나는 호경암 앞에서 입을 열었다. 호경암은 1·21사태 때 격전이 벌어진 곳이다. 당시에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져 아직까지도 바위 곳곳에는 그날의 아픈 흉터가 선명하게 남아 있다.

"당시 김신조를 위시한 무장공비들은 시간당 10km 이동을 했답니다. 그것도 산길을요. 건강한 성인이 4km로 정도로 이동하니까 그들이 얼마나 무지막지하게 이동을 했는지 알 수 있겠죠."

구멍이 뻥뻥 뚫린 호경암을 앞에 두고 나는 설명을 이어갔다.


▲ 호경암 치열했던 교전의 흔적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호경암. 빨간색으로 칠한 표시가 바로 총탄 자국이다.        

  





격동의 시기, 1968년!

"김신조 사태가 1968년 1월 21일에 발생합니다. 그리고 그 이틀 후인, 1월 23일에는 미국의 정보선인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의해 나포되지요. 또 그해 10월 경에는 울진, 삼척 지역에 무장공비 120명이 침투를 하기에 이릅니다."
"참 많은 일이 있었네요. 그때..."
"우리나라만 그런 게 아니었어요. 베트남에서는 월맹군의 구정공세로 미군의 예봉이 꺾였고, 미국에서는 반전 운동이 크게 일어났잖아요. 히피문화로 대변되는..."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나는 숨을 좀 가다듬고 말을 이어갔다.

"이것 말고도 1968년에는 전세계적으로 많은 일들이 발생합니다. 서구에서는 68혁명이라 하여 구체제 극복을 내세운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약간 다른 이야기지만 당시 공산권인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프라하의 봄이라는 혁명이 일어났지요. 밀란 쿤데라라고 소설가 아시죠? 그 사람이 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도 프라하의 봄이 중요한 모티브였습니다. 하지만 그 봄날은 오래가지 못했답니다. 구소련이 강제 진압을 했었거든요. 봄날이 너무나 쉽게 가버린 것이죠."

너무 설명이 진지했던 것 같아 약간 말을 돌렸다.

"이제까지 1968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봤는데, 그 1968이라는 숫자를 저도 가지고 있답니다. 제 전화기 끝자리가 1968이거든요."

그렇게 내가 실없는 소리를 했어도 참가자들은 신나했다. 비가 오고 있어도 바람이 불고 있어도 신나했다. 왜? 성북동 트레킹이 아름다운 풍광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악산 단풍이 아주 곱게 잘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빛깔 고운 단풍을 서울에서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무장공비의 루트였던 곳에서 그토록 아름다운 풍광을 바라보고 있다니!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하긴 아무리 지뢰가 깔리고, 철조망이 쳐져 있다고 해도 DMZ만큼 아름다운 곳도 없을 테니까!

글을 마치기 전에 혁명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한 마디만 하자. 며칠 전인 12일에 백 만명 이상 사람들이 모여 촛불집회를 열었다. 그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19일에도 수많은 이들이 촛불을 들고 광화문으로 모여들었다. 촛불혁명이라고 명명해도 지나침이 없을 정도로 많은 이들이 광장에 모여 불을 밝혔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이렇게 외쳤다.

"박근혜 퇴진"

나중에 이 촛불혁명은 어떻게 기록될 것인가? 승리로 기록될 것인가? 아니면 패배로? 나는 승리로 기록되길 간절히 기원한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펀딩비 미리 당겨썼습니다!

- 청소년들과 함께한 인왕산역사트레킹

 

 

제게 메일 한 통이 왔습니다. 홍은동 공부방이라는 곳의 프로그램 담당 선생님이 보낸 메일이었습니다. 담당 선생님은 검색을 통해 우연히 역사트레킹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하더군요. 그리고는 아이들이 인왕산 역사트레킹에 참여를 할 수 있는지 문의를 했습니다. 한마디로 역사트레킹을 통해 지역체험활동을 하고 싶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인왕산이 홍은동의 동네 뒷산이라서 그랬던 것이죠.

 

 



 

청소년들과 함께한 역사트레킹

 

사실 역사트레킹은 성인 대상 프로그램입니다.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껏 계속 성인들만 참가신청을 해왔기에 그렇게 굳어져버린 것이죠. 그러다보니 저도 성인들 기준으로 코스를 짜게 됐습니다. 또한 성인들의 입맛(?)에 맞는 해설을 준비해 왔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꼭 그렇게 성인들 대상으로만 프로그램을 진행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역사트레킹을 하는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아니, 오히려 청소년들이 더 많이 역사트레킹에 참여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무거운 책가방만큼이나 학습에 짓눌린 그들이기에... 그렇게 해서 지난 528, 청소년들과 함께 인왕산 역사트레킹에 나서게 됐습니다.


한편, 인왕산역사트레킹은 지난 1화에 언급이 됐습니다. 그럼 이번화는 재탕이 되는 건가요? 아닙니다. 그때는 윤동주 시인과 관련된 에피소드 위주로 내용을 서술해 나갔습니다. 하지만 이번화에서는 코스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담았습니다. 또한 코스의 시작점도 변경됐습니다. 예전에는 광화문에서부터 시작을 했지만 변경된 코스에서는 청계천에 있는 광통교에서부터 출발을 하게 됩니다.


이번화가 재탕인지 아닌지 끝까지 읽어 봐주세요. 더군다나 펀딩비를 미리 땡겨쓴만큼 후원자분들은 냉철한 시선으로 이번화를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 광통교





 

 

광통교(廣通橋)


트레킹 팀이 첫 번째로 탐방한 곳은 청계천에 있는 광통교입니다. 대광통교, 광충교, 광교라고도 불리는 광통교는 원래 태조 때 흙으로 만들어진 토교(土橋)였습니다. 그러다 태종10(1410), 홍수로 인해 다리가 떠내려 가 다시 돌다리(石橋)로 만들게 됩니다. 이때 다리에 쓰였던 석재들은 정릉(貞陵)에 있던 석물들이었습니다. 정릉은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의 무덤입니다.


여기서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어떻게 왕후의 무덤에 있던 돌들이 다리의 재료로 쓰일 수 있냐는 의문 말입니다.


조선왕조가 개창될 때 이성계의 나이는 58세였습니다. 그래서 즉위하자마자 세자 책봉에 나서야했습니다. 그래서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이었던 방석이 1392820일에 세자로 책봉됩니다. 그해 717일에 조선이 개국했으니 약 한 달 만에 세자가 책봉이 된 것이지요.


쟁쟁한 형들을 물리치고 이방석이 세자가 될 수 있었던 건, 신덕왕후가 개국 후 첫 번째 왕후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입니다. 원래 이성계의 첫 번째 부인은 신의왕후 한 씨였습니다. 한 씨는 이성계가 즉위하기 1년 전에 세상을 떠났기에 왕비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게 됩니다. 신의왕후는 방과(정종), 방원(태종), 방간(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킴) 6명의 남자 형제들을 낳았습니다

   



* 광통교. 거꾸로 세워진 신장석.




 

신덕왕후는 자신의 소생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보지 못한 채 1396(태조5)에 세상을 뜨고 맙니다. 강 씨를 무척 아꼈던 이성계는 지금의 서울 정동에 묘소를 만드니, 그것이 바로 정릉이었습니다. 이후 13988, 이방원이 주도한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고, 이때 세자였던 방석이 죽고 맙니다. 이를 무인년에 일어났다 하여 무인정사(戊寅靖社)라고도 부릅니다.


왕위에 오른 이방원은 1409(태종9), 도성 안에 무덤이 있을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정릉을 현 위치인 성북동으로 옮기게 합니다. 그 다음해에는 정릉의 봉분을 두르고 있던 석각신장(石刻神將) 등을 광통교 건설에 이용하게 합니다

 

신덕왕후에 대한 이방원의 '뒤끝'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기왕 능에서 가져온 귀한 석재들인 만큼 그걸 제대로 쌓았으면 좋았으련만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일부러 신장석들을 뒤집어 놓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장석은 머리가 바닥을 향해 있습니다. 신덕왕후를 철저히 조롱한 것이죠.


이 광통교는 길이(12미터)보다 폭(14미터)이 더 넓습니다. 그래서 광통교라고 부르나 봐요. 그렇게 넓은 다리인 만큼 거기에 담긴 스토리텔링도 풍부하네요.”

 

트레킹 팀은 풍부한 역사를 담고 있는 광통교를 직접 건넜습니다. 다리에 담긴 많은 이야기들을 곱씹어 보면서.

 

 




* 서울성곽: 서울성곽 인왕산 구간.







 

사직단은 종묘사직할 때, 사직이다.

 

트레킹 팀은 광화문을 지나 사직단으로 향했습니다. 사직단은 토지의 신인 사신(社神)과 오곡의 신인 직신(稷神)에게 제례를 올리는 곳입니다. ‘종묘사직할 때 사직이 바로 사직단인 것입니다. 농경을 중시했던 조선왕조였기에 사직단의 의미는 종묘보다 더 크면 컸지 작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실제로 조선의 왕들은 국가적으로 중대한 일들이 닥쳤을 때 사직단에 직접 나아가 제사를 올렸다고 합니다.


보통 사직은 궁을 중심으로 서쪽, ‘종묘는 동쪽에 들어섭니다. 실제로 사직단은 경복궁의 서편인 서촌에 위치에 있고, 종묘는 경복궁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직단은 동쪽에 사신을 모시는 사단, 서쪽에는 직신을 모시는 직단이 있습니다. 큰 담 안에 작은 담이 둘러져 있는데, 그 작은 담은 이라고 부릅니다. 그 율 안에 사단과 직단이 있는 것이죠.


조선의 근간 중에 하나였던 사직단에도 일제의 마수가 뻗쳤습니다. 1911년에 사직단이 폐사됐기 때문입니다. 이에 더해 1922년에는 원래 부지에다 인근의 땅들을 합쳐서 공원을 만들기까지 합니다. 사직단을 공원화하여 격하시켰던 것입니다.






* 사직단: 사직단 제단 바로 옆에서 사진촬영을 하는 청소년 트레킹 팀.






해방 이후에도 사직단은 아픔을 겪었습니다. 도시계획에 따라 신문(神門)이라고 불린 정문이 원 위치보다 14미터 뒤로 후퇴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부지 안에 차례로 도서관, 학교, 어린이 놀이공간 등이 세워지게 됩니다.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이 떠난(?) 예전 사직공원은 몸살을 앓았습니다. 취객들이 술김에 울타리를 넘어 가기도 하고, 아이들은 제단에서 씨름을 하기도 했다고 하더군요. 어두운 불빛 아래에서는 부비부비를 즐긴 남녀들도 넘쳐났다고 합니다



트레킹 팀은 율을 넘어 사직단을 지근거리에서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내친김에 기념촬영도 했습니다. 물론 허락을 받고 안쪽으로 들어간 것이죠. 소중한 문화유산을 앞에 두고 기념촬영을 할 수 있어서 은근히 기분이 좋더군요. 학생들의 표정도 밝아보였습니다. 이런 맛에 역사트레킹 하는 거겠죠!

 






* 사직단






 

인왕산의 숨겨진 보물, 수성동계곡

 

트레킹 팀은 수성동 계곡을 향해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수성동 계곡은 인왕산의 또 다른 볼거리입니다. 아랫동네 서촌의 번잡함은 싹 사라지고, 계곡이 주는 청량감이 주위를 감싸고 있는 곳이 바로 수성동입니다. 물론 계곡치고는 유량이 거의 없는 것이 안타깝기는 하더군요.


수성동(水聲洞)의 명성은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더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역사지리서인 <동국여지비고><한경지략>에는 수성동을 명승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겸재 정선은 <수성동>을 그려 이곳의 아름다움을 수묵으로 옮겨놓았습니다.


또한 이곳은 중인들이 모여 시를 짓고 노닐던 곳입니다. 조선후기 중인들을 중심으로 발달했던 위항문학(委巷文學)의 본거지였던 셈이죠. 그러니 문학사적인 측면에서도 무척 중요한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수성동 계곡은 20127월에 복원한 것입니다. 복원 전에는 1971년에 지어진 시민아파트가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이후 안전문제로 아파트는 철거가 됐고, 그 위치를 옛 모습으로 돌려놨던 것입니다.


복원 과정에서 겸재 정선의 <수성동>이 큰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수성동>에 나오는 것처럼 기린교라는 통돌다리도 그대로 복원이 됐습니다. 어쩌면 겸재의 그림이 없었다면 지금의 수성동 계곡은 평범한 도시 공원의 모습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 수성동 계곡







 

북문의 역할을 했던 창의문

 

윤동주 문학관을 넘어 마지막 목적지인 창의문으로 향했습니다.


창의문(彰義門)은 사소문중 하나로 자하문(紫霞門)으로 더 많이 알려진 문입니다. 북대문인 숙정문이 있었음에도 실질적으로 북문(北門) 역할을 했던 건 바로 창의문이었습니다.


북악산의 험한 지형 위에 세워진 숙정문은 사람의 발길이 뜸했을 뿐더러 1413년부터는 그마저도 폐쇄를 시켰기 때문입니다. 숙정문이 오른팔이 되어 경복궁을 내리누른다는 풍수학적인 의미 때문에 그런 조치를 취했던 것입니다.


그때 창의문도 폐쇄가 되는데 왼팔의 역할을 하여 경복궁의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죄명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숙정문과 달리 교통의 요충지 위에 놓여 있던 창의문은 1506(중종 1)에 다시 통행이 재개됩니다. 그래서 소문(小門), 창의문이 북문 역할이라는 중책을 맡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의 통행이 빈번했다는 것은 그 문 아래로 수많은 역사적 발걸음이 오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인조반정 때 능양군(인조)을 옹립하던 세력들은 이 문을 통해 도성을 점령했고, 광해군을 쫓아낸 후 권력을 잡게 됩니다.


현재의 문루는 조일전쟁(임진왜란)때 불 타 사라진 것을 영조 때(1740) 건립한 것입니다. 현재 창의문은 일반인에게 개방이 되어 있어 문루까지 직접 올라갈 수 있습니다. 내부에는 인조반정 때 공을 세운 인사들의 이름을 적은 나무판이 걸려 있습니다. 이 판은 문루를 세울 때 같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 창의문: 창의문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청소년 트레킹 팀.





 

 

펀딩비를 미리 당겨쓰다!

 

트레킹 팀은 창의문을 통과할 때 천장화를 바라보면서 이동했습니다.

 

저 그림이 뭘로 보이세요?”

봉황 아니에요?”

주작이요. 주작.”

 

! 봉황에 주작까지 나왔습니다만 정답이 아니었습니다. 정답은 닭이었습니다. 이 일대가 풍수적으로 지네의 기운을 가졌다하여 천적인 닭을 창의문에 그려 넣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창의문 밖인 부암동 일대가 치킨으로 유명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청소년들과 함께 한 인왕산 역사트레킹은 무사히 종료가 되었습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점심시간이 넘었더군요. 그냥 그렇게 헤어지기는 아쉬웠습니다. 배도 고프고.


그래서 제가 점심을 쏘기로 했습니다. 제 사비를 쓸까 하다가 스토리펀딩비를 당겨 쓰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유익하게 역사트레킹을 하려고 펀딩을 받고 있는 거잖아요. 그 목적에 맞게 지출이 됐다면 후원금을 미리 당겨쓴다고 해도 후원자분들이 너그러이 이해해 주실 거라 생각합니다.

 

 

 

인왕산 역사트레킹

 

1. 코스: 광통교 사직단 단군성전 수성동계곡 윤동주문학관 창의문

 

2. 이동거리: 7km

 

3. 예상시간: 3시간(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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