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악산 정기 아래~

 

관악산이 올려다 보이는 지역에서 초중고를 모두 다녔다. 그래서인지 약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든 교가에 ‘관악산 정기 아래’라는 구절이 들어가 있었다. 마치 누구 한 사람이 작사한 것처럼 모두 다 ‘관악산 정기 아래~’였다. 그때는 그런 교가가 우스웠고 한편으로는 싫었다. 학창시절 12년 동안 조회시간만 되면...

 

‘도대체 관악산과 내가 무슨 상관인가? 관악산의 정기가 시험 문제에 나오기라도 하던가?’

 

그런데 지금은 보시다시피 관악산에 있는 낙성대 탐방기를 작성하고 있다. 필자에게 관악산은 중요한 존재가 됐던 것이다. 정기가 있는지 없는지는 입증할 수 없으나 어쨌든 관악산은 필자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베이스캠프 같은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럼 교가대로 된 것인가?

 

 

● 서울의 남주작, 관악산

 

누구나 다 동의하듯이 서울의 으뜸산은 북한산이다. 그럼 그 다음 순번은 어느 산일까? 당연히 관악산(冠岳山)이다. 한강 이북에 북한산(837m)이 버티고 있다면 이남에는 관악산(632m)이 굳건히 자리를 잡고 있다. 가까이에 있는 청계산이 618미터로 그 아성에 도전해보지만 역시 관악산의 관록에는 당해낼 수가 없다.

 

조선이 건국된 후 관악산은 북한산과 함께 외사산(外四山)이 되었다. 한자에서도 보이듯 외사산은 서울 외곽을 두르고 있는 4개의 산을 말한다. 남쪽 관악산, 북쪽 북한산, 동쪽 아차산, 서쪽 덕양산이다. 덕양산은 좀 낯선 이름일지 모른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고개를 끄덕이실 것이다. 행주산성.

 

그렇게 한양의 남쪽 외곽에 자리잡은 관악산은 주작이 되었고, 북한산은 북쪽의 현무가 되었다. 그 위상에 맞는 옷을 입은 것이다. 참고로 서울의 좌청룡은 낙산이고, 우백호는 인왕산이다. 낙산은 이화동 벽화마을을 품고 있는 작은 산이다. 낙산공원으로 유명한 그 산이다.

 

 

 

 

 

* 안국사

 

 

 

 

 

 

 

● 별이 떨어진 곳, 낙성대

 

서론이 길어졌다. 본격적으로 관악산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인 낙성대((落星垈)와 관련된 이야기를 해보자.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라는 뜻의 낙성대는 강감찬 장군의 생가이다. 서울 남부권에서 학창시절을 보내셨던 분들은 소풍 때문이라도 낙성대 인근을 몇 번 가보셨을 것이다. 필자도 여러 번 가봤다.

 

강감찬 장군의 집안은 호족이었다. 5대조인 강여청이 경주에서 관악산 아래로 이주를 해왔던 것이다. 지금이야 낙성대가 있는 곳이 서울시 관악구이지만 예전에는 금주(衿州)로 불렸었다. 옆 동네인 금천구(衿川區)에 옛 지명의 흔적이 남아있다.

 

강감찬의 아버지는 강궁진이었는데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를 건국하는데 일조를 했고, 그에 따라 삼한벽상공신이 되었다. 이렇듯 강감찬 장군은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강감찬 장군과 관련해서는 꽤 많은 설화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일단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는 낙성대부터 그렇다.

 

- 어떤 사신이 어두운 밤에 금주 일대를 거닐고 있었다. 이때 하늘에서 큰 별이 떨어졌고, 사신은 별이 떨어진 집에 찾아가게 됐는데 마침 그 집의 부인이 아이를 낳은 것이다. 이에 사신은 아이를 데려가 길렀는데 그 아이가 바로 강감찬이었다.

 

뻥이다. 말 그대로 설화일 뿐이다. 감히 누가 삼한벽상공신의 아들을 몰래 빼돌리겠는가. 또 이런 설화도 있다.

- 당시 삼각산(북한산) 일대에 호랑이가 자주 출몰하여 호환 피해가 극에 달했다고 한다. 이에 한양부 판관이 된 강감찬이 부적을 써서 두 명의 승려에게 전하며, ‘무리를 이끌고 가라’라고 명했다. 이에 승려는 호랑이로 변한 후 사라졌고 이후 호랑이에 의한 피해도 사라졌다고 한다.

 

이것도 역시 설화일 뿐이다. 부적을 알아먹는 호랑이가 있을까? 더군다나 강감찬이 관직에 있을 때는 한양부라는 명칭이 없었다. 남쪽의 서울이라는 남경(南京)이 등장할 때가 1067년(문종21)이었다. 강감찬은 서기 948년에 태어나서 1031년에 돌아가셨다.

 

이외에도 강감찬 장군과 관련된 설화들은 상당하다. 84세에 돌아가셨으니 그 당시 기준으로는 엄청나게 장수를 하셨다. 그래서 신선이 되어 하늘로 승천했다는 이야기까지 있을 정도다. 이렇게 민간설화들이 많다는 것은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의 강감찬 장군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낙성대 3층 석탑

 

 

 

 

 

 

 

 

* 낙성대 3층 석탑: 기단과 1층 탑신을 확대해보았다. 기단과 1층 탑신 사이에 괴임돌이 보인다. 기단부는 간극이 보이는 등 정교해보이지 않는다.

 

 

 

 

 

 

 

● 낙성대3층 석탑

 

일단 먼저 생가터를 탐방해보자. 현재 생가터는 주택가 한복판에 있는데 딱히 주목할 만한 문화재가 있지는 않다. 생가터임을 알리는 유허비와 오래된 향나무가 탐방객을 맞이할 뿐이다. 하지만 이곳이 오리지널 낙성대이다. 별이 떨어진 곳이다.

 

하지만 우리가 낙성대로 알고 있는 곳, 필자가 소풍을 갔던 곳은 생가터에서 약 300미터 떨어진 곳인 안국사(安國祠)이다. 사당사(祠)에서도 보이듯 안국사는 강감찬 장군을 기리는 사당이다. 이 일대를 낙성대 공원이라고 부르는데 우리는 이곳을 낙성대라고 착각한다. 안국사는 장군이 거란을 물리치고 받은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이라는 호를 따서 이름을 지은 것이다.

 

안국사의 외삼문을 지나면 낙성대3층 석탑이 탐방객들을 맞이한다. 낙성대3층 석탑은 약 4.5미터에 달하는데 사찰이 아닌 공간에서 이렇게 큰 석탑을 볼 수 있다는 게 흥미롭다. 임진왜란 때 위쪽인 상륜부를 비롯한 탑 일부가 훼손됐다고 하니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훨씬 더 우람하고 아름다웠을 것이다. 이 탑은 강감찬 장군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백성들이 사리탑 형식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13세기경에 만들어졌다고 하니 800년 이상 관악산의 정기를 받았다는 뜻이 된다.

 

석탑은 사찰에서 신앙의 대상으로 건립되는 게 아닌가? 그런데 장군을 위해 큰 석탑이 만들어졌다는 건, 당시 고려 사람들이 강감찬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원래 이 탑은 앞서 언급한 생가터에 있었다. 그러다 1974년 안국사가 세워진 후, 현재의 자리로 이동을 했다.

 

“이 탑이 몇 층일까요?”

“4층 아니에요?”

“땡! 3층입니다. 하단에 큰 네모 부분은 기단입니다. 기단은 층수로 안 쳐줘요. 탑의 층수 맞추기가 아리송하면 저기 옥개석의 개수를 세어보세요. 옥개석 개수가 층수에요. ”

 

옥개석은 지붕처럼 탑신을 덮어주는 부분을 말한다. 어쨌든 낙성대3층 석탑은 탑신에 비해 아주 거대한 기단부가 인상적이다. 가까이 가서 볼 수 있으니 꼼꼼히 관찰해보자. 1층 탑신에 적혀 있는 姜邯贊落星垈(강감찬낙성대)라는 각자도 잘 살펴보자. 탑에 대해서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기단석과 1층 탑신 사이에 별도로 올린 괴임돌을 잘 한 번 살펴보자. 그렇게 괴임돌 처리를 한 석탑을 쉽게 볼 수 없기 때문이다.

 

 

 

 

 

 

* 기마상: 말은 역동적으로 잘 표현됐는데 장군님의 다리가...

 

 

 

 

 

 

 

● 강감찬 장군을 만나다!

 

이제 내삼문을 지나 강감찬 장군의 영정을 친견하러 간다. 잘 알려지다시피 강감찬 장군은 거란과의 항쟁에서 큰 공훈을 세웠다. 그런 장면들을 그림으로 담아 장군의 영정과 함께 걸어두었다. 

 

고려는 개국 초부터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과 대립각을 세웠다. 이에 거란은 993년(성종12) 1차 침입, 1010년(현종1) 2차 침입, 1018년(현종9) 3차 침입 등 세 번에 걸쳐 고려를 침략했다. 강감찬 장군은 3차 침입 때 상원수가 되어 최전방 사령관으로 전쟁에 임하게 됐는데 이때가 70세였다. 대단한 노익장이 아닐 수 없다. 이후 이야기는 잘 아실 것이다. 장군이 이끄는 고려군은 귀주에서 거란군을 전멸에 가깝게 몰살시킨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귀주대첩이다.

 

강감찬 장군의 영정을 보신 후 건물 뒤편 후원으로 잠시 눈을 돌려보자. 울타리 넘어 보이는 숲이 아주 울창하다. 후원은 가을에 가면 더 좋다. 형형색색의 단풍들이 눈을 즐겁게 해주기 때문이다. 필자도 낙성대 역사트레킹을 주로 가을에 행했었는데 그때 트레킹팀과 함께 가을 단풍사진을 찍었었다.

 

공원 앞에 있는 강감찬 장군의 기마상도 꼭 보고 가자. 말이 아주 역동적으로 잘 표현됐다. 적토마같다. 그에 비해 장군의 발은 너무 짧게 표현했다. 너무 숏다리다.

 

이렇게하여 낙성대 탐방이 종료가 됐다. 끝내기 전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 계속 강감찬 ‘장군’이라고 표현을 했는데 정말 장군이 맞으신가? 정확히 강감찬은 문신 출신이다. 983년(성종2)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를 하셨다. 한마디로 문무를 겸비하셨던 것이다.

 

뒤쪽에 늠름하게 서있는 관악산이 듬직해 보인다. 낙성대공원 일대를 탐방하다보면 관악산의 정기가 자연스럽게 체화되는 느낌이다. 오랜만에 교가 한 번 부르면서 관악산의 정기 좀 느껴볼까?

 

 

 

 

 

 


 

 

 

 

 

■ 낙성대

1. 코스: 낙성대역 ▶ 생가터 ▶ 안국사(낙성대공원) ▶ 잣나무숲

2. 가는법: 지하철 2호선 낙성대역에서 하차한 후 인헌초등학교 방면으로 이동하면 생가터에 닿을 수 있음. 이후 낙성대공원으로 이동함.

3. 같이 가면 좋을 곳: 잣나무숲 ☞ 안국사 외곽부에 자리함. 느긋하게 삼림욕을 하기에 좋음.

 

 

 

 

 

 

* 낙성대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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