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데기 앞에서 주름잡기?

토박이와 함께 한 공주역사트레킹

 

 

이번 트레킹 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데...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다고, 이거 괜히 공주토박이 앞에서 망신당하는 거 아니야?’

 

역사트레킹을 진행하다보면 흥미로운 에피소드들이 톡톡 튀어나옵니다. 제 리딩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중간에 집에 가버리는 분. 그것도 아무런 말씀도 없이... 험한 서울 성곽길을 걷는데 하이힐을 신고 오신 분. 트레킹에는 관심이 없고 이성의 연락처를 얻는 데만 혈안이 되신 분 등등...


몇 해 전, 가을경에 행했던 공주역사트레킹에서도 재미난 에피소드가 있었습니다. 바로 공주 토박이 분이 참가를 했던 것입니다. 그것도 공주 시청에서 근무하는 분이 참가를 한 것입니다. 좀 긴장이 되더군요. 괜히 밑천이 드러날까 조마조마하기까지 했습니다.

 





* 우금티. 우금티에 쓰러져 있는 조형물. 원래는 서 있었는데 지금은 쓰러져 있다. 120여 년 전, 우금티에서 쓰러져 갔을 농민군들의 모습이 겹쳐져서 그런지, 보고 있으면 마음이 애잔해진다.






 

토박이에게 선수를 빼앗기다!

 

공주역사트레킹의 시작점은 공산성입니다. 동학농민전쟁 당시 전봉준 부대가 가고자 했던 성이 바로 공산성입니다. 공주성이 공산성이라는 것이죠.


현재의 공산성 일대는 삼국시대부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475년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현 공주)으로 천도했을 때 이곳은 왕성이었고, 536년 사비(현 부여)로 천도했을 때는 북방성으로 불리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당나라 소정방에 의해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백제가 역사속으로 사라졌을 때, 의자왕이 있던 곳도 사비성이 아닌 바로 이곳 공산성이었습니다.


공산성의 현재 모습은 조선 후기 시대에 그 틀이 잡혔습니다. 임진왜란의 영향으로 인해, 1602년 충청감영이 충주에서 공주로 이전했고, 그에 따라 공산성도 개·보수가 이루어졌습니다.





* 진남루: 공산성 진남루. 남쪽에 위치해 있다.





매표소가 있는 금서루 부근에서 이런 기본적인 설명을 하며 서쪽 성곽을 둘러갔습니다. 서쪽 성곽에서는 멀리 황새울이라는 천주교 성지가 보이는데 그 지점에 다다랐을 때 공주토박이 참가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기 건너편 십자가 표시 보이시죠? 저기가 황새울이라는 곳인데요. 저기서 천주교 신자가 많이 죽었어요. 그래서 황새울 성지로 불러요.”


! 그건 제가 설명하려고 했는데...”

 

선수를 빼앗긴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시선을 되찾아오기 위해 서둘러 첨언을 했습니다.

 

저 건너편에 공주 감영이 있어서 그랬어요. 사실 천주교 신자가 가장 많이 희생된 곳은 여기 공주라고 하더군요. 감영이 있어 충청지역의 천주교도들이 여기로 다 붙잡혀 온 거에요. 그래서 희생이 컸던 거고요.”

 

염려했던 일이 발생했지만 그럭저럭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식은땀 한 방울을 흘리며 서둘러 쌍수정(雙樹亭)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 산책로: 공산성 산책로.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기... 참 힘드네!

 

1624년 인조는 이괄의 난을 피해 공산성으로 파천(播遷:임금이 도성을 떠나 피난을 하는 일)했습니다. 인조는 성 안에 있는 나무 두 그루 아래에서 반란이 진압되길 간절히 기원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이괄이 부하의 배신으로 참수됐다는 소식에 기뻐하며 그 나무 두 그루(쌍수)에 정삼품의 작위(통훈대부)를 내립니다.


이후 영조 11, 그 자리에 정자가 세워졌으니 이것이 바로 쌍수정입니다. 처음에는 삼가정이라고 불렸으나 이후 쌍수정이 되었고, 오늘에 이르고 있지요. 한편 이런 스토리텔링 때문인지 공산성은 조선시대 쌍수산성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쌍수정에 대한 대략적인 이야기를 하고 금강이 보이는 성의 북면으로 이동을 하려고 할 때였습니다. 인조와 관련된 설명을 하나 더 준비를 했는데 기억이 안 났습니다. 무슨 떡 이름이었는데 기억이 안 나서 그냥 북면 쪽으로 이동을 하려 했습니다. 찜찜한 마음을 뒤로 하고 선두로 나서는데 뒤쪽에서 그 떡 이름과 그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더군요.

 

인조가 이곳에 와서 6일 동안 머물렀는데 인근에 사는 임씨 집안사람이 떡을 받쳤데요. 인조는 그걸 맛있게 먹었고요. 당연히 그 떡 이름을 물어봤겠죠. 그런데 이름이 없던 거에요. 그래서 이후에 임씨 집안에서 만든 맛있는 떡이라고 해서 인절미가 된 거라고 하더군요.”

 

또 그 토박이 분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못한 설명을 그 분이 직접 대신해주었습니다. 저는 멋쩍은 나머지 서둘러 입을 열었습니다. 그래도 명색이 역사트레킹 마스터 아닙니까!

 

“‘변화돼서 결국 인절미가 된 거에요. 그나저나 갑자기 인절미가 땡기네...”

 

괜히 애꿎은 인절미 타령을 하며 그 순간을 벗어났습니다. 역시 토박이 앞에서 해당 지역을 설명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번데기 앞에서는 주름을 잡는 게 그렇게나 힘들 줄이야!

 

 





* 임류각: 공산성 임류각. 백제 동명왕 시대 건축물이다. 1980년대 복원한 것이다.






 

공산성을 떠나 우금티로 향하는 길

 

공산성 탐방을 마친 트레킹 팀은 중동성당을 지나 본격적인 도보여행에 나섰습니다. 옛 공주 읍내는 분지형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시가지를 두고 둥글게 산들이 둘러싸고 있는 모습입니다. 공주 분들은 이를 두고 공주대간이라고 부르더군요

 

그렇게 공주대간을 타고 가는 중간에 우금티와 관련된 설명들을 간략하게 했습니다. 1894년 갑오년에 있었던 국내정세, 청나라의 파병을 빌미로 국내로 출병한 일본군, 청나라와의 전쟁 중이라 후방지역의 준동을 심각하게 판단했던 당시 일본 정부, 일본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청나라 폐잔병들 일부가 동학농민군에 합류했다는 사실 등등...


우금티로 향해가는 의미를 확실히 전달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입니다. 참가자들 중에는 이미 동학농민전쟁과 우금티에 대해서 알고 있는 분들도 있었고, 처음 듣는 듯 생소한 눈빛을 보내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 금학생태공원. 금학생태공원을 걷고 있는 트레킹팀.






이미 그 관련 내용을 알고 있든, 아니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건 우리가 공산성을 출발하여 우금티로 가는 것이었고, 그곳에서 120년 전의 사건을 떠올려 보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의미심장한 다짐을 하고 나섰습니다.


하지만 의외의 복병(?)을 만났습니다. 복병은 바로 밤송이들이었습니다. 공주역사트레킹을 행했을 때가 가을경이어서 그랬던 것입니다. 밤 막걸리에서 보듯, 공주는 밤의 고장 아닙니까? 우금티 부근도 밤나무가 지천으로 깔려 있어서 그런지, 가는 곳마다 밤송이들이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밤송이가 너무 많아 이동이 쉽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얼마나 독한지(?) 신발 사이로 가시가 쑥쑥 들어올 정도였지요. 선두에 선 저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조심하세요. 지뢰밭이에요. 밤송이 지뢰밭!”

 

밤송이 지뢰밭을 지나 우여곡절 끝에 트레킹 팀은 우금티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 우금티터널: 우금티 아래를 지나고 있는 우금티 터널.





 

우금티에서 갑오년, 그날을 떠올리다!

 

우금티에 도착해서는 주위 지형을 가리키며 설명을 했습니다. 일본군의 기관총이 어디에 배치됐는지 또한 농민군들이 어느 방면에서 올라왔는지, 하는 것들을 알려주었습니다. 농민군들은 실제로 정상부가 아닌 고개 아래에서 희생을 많이 당했는데 높은 지대를 선점하고 있던 연합부대가 기관총과 화포를 난사해서 그렇게 됐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현장성을 살려 책에서는 풀어낼 수 없는 것들을 설명하려고 나름대로 애썼지요. 물론 그런 설명들이 제대로 전달됐는지는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었습니다. 당시 참가자들이 트레킹을 단순히 소비(?) 하지 않고 그 이상의 대화를 나누었다는 점입니다. 우금티 고개에 있는 조형물들, 처음에는 곧추 세워져 있었으나 지금은 쓰러져 있는 조형물들이 동학농민군처럼 느껴져 마음이 애잔하다고, 표현한 참가자가 있었습니다. 또한 이런 식으로 대화가 확장되기도 했습니다.

 

요즘 세대들은 우리 역사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을 안 하는 것 같아요.”

이런 아픔의 역사들을 많이 알아야 하는데... 아는 사람만 아는 것 같고요.”

정치도 그래요. 젊은 사람들이 좀 많이 관심을 가져야 할 텐데요. 투표날에 놀러가지 말고요.”

 

우금티에서 이런 대화들이 오갔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저 뿌듯할 따름이었지요. 리딩자로서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 맛에 역사트레킹을 하는 것이겠죠.

그렇게 하여 공주역사트레킹은 잘 종료가 됐습니다. 트레킹을 마친 후 그 토박이 분이 제게 이런 말을 하더군요.

 

공주 사람도 잘 몰랐던 길을 안내해 주셔서 감사해요. 오랜만에 엄청 걸었네요. 힘들어도 재밌었어요.”

 

공주 토박이 분에게 그런 칭찬의 말을 들으니 정말 기분이 좋더군요. 코스를 잡기 위해서 100km 이상을 탐방을 했었는데 그게 물거품이 되지 않았으니까요. 중간에 뱀들과 사투(?)를 벌이며 탐방했던 게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초반에는 좀 스텝이 꼬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번데기 앞에서 제대로 주름을 잡아본 하루였습니다.

 

 



* 우금티: 우금티 조형물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트레킹팀.




 

공주 역사트레킹

 

1. 코스: 공산성 중동성당 금학생태공원 우금티

 

2. 이동거리: 11km

 

3. 소요시간: 4시간 30분 정도(휴식시간 포함)

 

4. 난이도:












 

 

 

 

 

 

 

 

▲ 우금티 대나무로 만든 조형물들이 쓰러져 있다.

우금티를 넘지 못하고 쓰러진 동학농민군들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편치 않다.

 

 

 

 

 

 

 

                                                       우금티 고개에서 족구 한 판?  ___2편

 

 

 

 

 

---> 1편에 이어

 


황량한 우금티 벌판, 어떻게 채울까

1894년 11월. 동학농민군은 우금티에서 관군과 일본군 연합부대에 의해 크게 패배했다. 당시 동학농민군은 연합부대보다 병력이 훨씬 더 많았다. 하지만 죽창을 든 동학군은 개틀링 기관총 등 최신무기로 무장한 연합부대 앞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지고 만다. '우금티 전투'가 아닌'우금티 학살'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동학농민군들은 엄청난 희생을 치렀던 것이다.

우금티 전투는 갑오동학농민전쟁의 최정점에 위치한 '하이라이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농민군의 역량이 총집결하여 대규모 전투를 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농민군은 패배했고, 뒤이어 전봉준도 사로잡혀 한성으로 압송된다. 이렇게 갑오년의 뜨거운 함성이 메아리치는 우금티. 하지만 그 우금티를 바라보는 필자는 좀 엉뚱한 생각부터 들었다.

'음 여기서 족구 한 판 뜨면 재밌겠군!'

역사적인 장소를 두고 너무 불경한 말을 한 것인가? 사실 필자는 공주여행에서 우금티를 따로 추천하지 않는다. 왜? 너무 한적하기 때문이다. 우금티에 올라서면 이곳이 역사적인 장소가 맞나, 할 정도로 황량함이 몰아친다. 그 흔한 비석조차 없다. 예전에 세워졌던 조형물들은 쓰러져 있고, 여름이면 그 사이를 잡초들이 파고 들어가 무성하게 피어난다. 잡초가 파고 들어간 조형물들을 보고 있자니 그저 안타까움만 더 커질 뿐이다. 우금티를 넘지 못하고 쓰러진 농민군들의 모습이 떠올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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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금티 대나무를 엮어 만든 조형물들은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 사이로 잡풀들이 파고 올라왔다. 피눈물을 흘리며 쓰러져 갔을 동학농민군들의 모습이 연상되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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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혁명군위령탑 동학농민 혁명과 잘 어울리는 탑인가? 한편 이 탑은 건립된지 40년이 넘어서 그런지 무척 낡아보인다. 탑두의 빨간 벽돌은 그런대로 잘 붙어 있지만 탑신 부분의 벽돌은 제거가 됐고, 그 부분이 흉터처럼 남아있다. 좀 흉해 보인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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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고개 아래쪽에 세워진 동학혁명군위령탑은 더 형편없어 보인다. 유신시대에 건립된 탑이라 그런지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담아낼 수 있을지 의구심부터 앞서는 게 사실이다. 또한 건립된 지 오래되어 그런지, 탑이 무척 낡아 보이기까지 한다. 실제로 탑신 중간의 벽돌이 떨어져 나가 흉해 보인다.

현재 우금티를 가장 명징하게 드러낸 조형물(?)은 바로 우금티 터널이다. 2006년에 개통된 우금티 터널은 국도 40호선의 4차선 확장 반대 투쟁의 산물로 등장하였다. 우금티를 가로지르던 기존 2차선 도로가 4차선으로 확장되면, 우금티 고개는 원형이 손상될 게 뻔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당시 공주지역 시민단체들은 도로 확장 반대를 주장하며 대안으로 터널형식을 제안하였고, 그것을 관철시켰던 것이다.

터널이 개통되었고 그 위로는 작은 벌판이 생겨났다. 일명 '우금티 벌판'. 하지만 앞서도 언급했듯이 이곳은 그저 황량한 벌판일 뿐이다. 족구가 하고 싶어지는 그런 벌판인 것이다.

이 황량한 우금티 벌판을 무언가로 채워야 하지 않겠나? 언제까지 이런 역사적인 장소를 그저 쓸쓸한 공간으로 남겨둘 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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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금티 터널 현재 우금티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이 우금티 터널이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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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한 가지 제안을 해본다. 이 우금티 벌판에 돌로 만든 튼튼한 석상 조형물을 올려놓아 보자는 것이다. 큰 동상을 하나 세우자는 것이 아니다. 우금티를 못 넘은 동학농민군의 한을 담아 사람 크기의 동상들을 여러 개 세워보자는 것이다.

그렇게되면 진시황의 병마용으로 보일 수 있는 동학농민군 동상들이 우금티 벌판을 '점령'하게 되는 것이다. 목숨을 걸고 넘고자 했던 우금티 고개를 돌이 되어서나마 넘게 되는 것이다.

역사는 책에서 배우는 것보다 직접 현장에 가서 배우는 것이 가장 좋다. 공산성이든 우금티든 한번 떠나보자. 공산성에서는 즐겁게 산성 트레킹을 해보고, 우금티에서는 갑오년 동학농민군의 결기를 느껴보자. 공산성에서는 백제시대를 떠올려 보고, 우금티에서는 구한말의 상황을 되새겨보자.

그렇게 살아있는 역사 지식을 쌓다보면 머릿속이 튼튼해지는 걸 느낄 수 있을 것이다.

ps. 다음 편에는 공산성과 우금티를 직접 연결하여 트레킹을 할 수 있는 일명 '공주역사둘레길'에 대한 기사를 작성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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