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금티에서 갑오년, 그날을 떠올리다!

 

공주역사트레킹 2편

 

14.10.31 09:39  최종 업데이트 14.10.31 09:39

 

 

 

 

 

 

 

 

 
▲ 우금티 우금티에 쓰러져 있는 조형물들. 피눈물을 흘리며 쓰러져 간 동학농민군들의 모습과 겹쳐져, 좀 서글퍼 보인다. 올해 여름에 촬영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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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직이든 수평이든, 장염 걸린 사람에게는 힘들다

 


공산성 탐방을 마친 트레킹 팀은 중동성당을 지나 본격적인 도보여행에 나섰다. 옛 공주 읍내는 분지형 구조를 가지고 있다. 시가지를 두고 둥글게 산들이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다. 그런 지형을 기반으로 도보 여행길을 개척했기에 해변가나 강변을 걷는 길보다는 좀 험하다. 본격적인 등산보다는 덜해도 급경사가 있는 구간이 몇몇 있다는 것이다.

등산이 수직적인 개념이라면, 트레킹은 수평적인 개념이다. 하지만 트레킹도 지형을 타고 가야하기에 일정 부분에서는 수직적으로 올라가야 할 때가 있다. 반대로 등산도 봄소풍 가듯 평평한 길을 걸을 때도 많다.

개념 정의에서는 수직과 수평으로 나누어지지만 지형이라는 구체적인 물리적 공간에서는 중첩되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는 것이다. 실제로 필자가 베이스 캠프로 삼고 있는 관악산 둘레길의 경우,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등산로였다. 그런데 걷기 열풍을 타고 '둘레길'로 변신을 하게 됐다.

하지만 이런 지형적, 개념적 정의들도 컨디션이 좋을 때나 귀에 들어올 것이다. 장염 때문에 배앓이를 하는 사람에게 수직이든 수평이든 힘든 것은 매한가지 일 테니까. 그랬다. 본격적인 트레킹에 나서게 되니 공주토박이 분보다는 장염에 걸린 분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장염 특성상 아무것도 먹을 수 없지 않은가? 공복인 상태로 장시간 걸으면 자칫 탈진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 분을 돌려보낼 수도 없었다. 자신은 완주를 할 수 있다고 강하게 의사표시를 했기 때문이다. 또 나름대로 아웃도어 활동을 꾸준히 해왔다고 해서 그분의 뜻을 존중하기로 했다.

 

 





 

 
▲ 금학생태공원 금학생태공원에서 우금티로 향해가는 역사트레킹 팀. 가는 도중에 밤송이 '지뢰밭'을 지나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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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송이 '지뢰밭'을 지나 우금티로...

 


가는 중간 중간에 우금티와 관련된 설명을 했다. 1894년 갑오년에 있었던 국내 정세, 청나라의 파병을 빌미로 국내로 출병한 일본군, 청나라와의 전쟁 중이라 후방지역의 '준동'을 심각하게 판단했던 당시 일본 정부, 일본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청나라 폐잔병들 일부가 동학농민군에 합류했다는 사실 등등...

우금티로 향해가는 의미를 확실히 전달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다. 참가자들 중에는 이미 동학농민전쟁과 우금티에 대해서 알고 있는 분들도 있었고, 처음 듣는 듯 생소한 눈빛을 보내는 분들도 있었다.

이미 그 관련 내용을 알고 있든, 아니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우리가 공산성을 출발하여 우금티로 가는 것이었고, 그곳에서 120년 전의 사건을 떠올려 보는 것이었다. 이렇게 의미심장한 다짐을 하고 나섰다.

하지만 의외의 복병(?)을 만났다. 밤송이가 바로 그것이다. 우금티 부근도 밤나무가 지천으로 깔려 있어 그런지 가는 곳마다 밤송이들이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밤송이가 너무 많아 이동이 쉽지 않을 정도였다. 얼마나 독한지(?) 신발 사이로 가시가 쑥쑥 들어올 정도였다. 선두에 선 필자는 이렇게 외쳤다.

"조심하세요. 지뢰밭이에요. 밤송이 지뢰밭!"

유독 장염에 걸린 참가자 분이 가장 많이 밤송이에 찔렸다. 트레킹화가 아닌 가벼운 신발을 신고 와서 그랬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했던 건, 밤송이 지뢰밭 통과 이후부터 그 분이 복통을 호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발에 가시가 찔리면서 복통이 완화된 것인가?

이런 우여곡절 끝에 역사트레킹 팀은 우금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장염으로 고생한 분도 무사히 완주를 해주셨다. 공주토박이 분은 '공주 사람도 모르는 길을 개척하고 안내해 주셔서 고맙다'고 말해주었다. 모두 다 완주를 해주고, 저런 칭찬을 들으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 우금티 우금티. 올해 여름에 촬영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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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금티에서 갑오년, 그날을 떠올리다!

 


우금티에 도착해서는 주위 지형을 가리키며 설명을 했다. 일본군의 기관총이 어디에 배치됐는지 또한 농민군들이 어느 방면에서 올라왔는지, 하는 것들을 알려주었다. 농민군들은 실제로 정상부가 아닌 고개 아래에서 희생을 많이 당했는데 높은 지대를 선점하고 있던 연합부대가 기관총과 화포를 난사해서 그렇게 됐다고 말해주었다. 현장성을 살려 책에서는 풀어낼 수 없는 것들을 설명하려고 나름대로 애썼다. 물론 그런 설명들이 제대로 전달됐는지는 잘 모를 일이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었다. 참가자들이 이번 트레킹을 단순히 소비(?) 하지 않고 그 이상의 대화를 나누었다는 점이다. 우금티 고개에 있는 조형물들, 처음에는 곧추 세워져 있었으나 지금은 쓰러져 있는 조형물들이 동학농민군처럼 느껴져 마음이 애잔하다고, 표현한 참가자가 있었다. 또한 이런 식으로 대화가 확장되기도 했다.

"요즘 세대들은 우리 역사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을 안 하는 것 같아요."
"이런 아픔의 역사들을 많이 알아야 하는데... 아는 사람만 아는 것 같고요."
"정치도 그래요. 젊은 사람들이 좀 많이 관심을 가져야 할 텐데요."


우금티에서 이런 대화들이 오갔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저 뿌듯할 따름이다. 리딩자로서 보람을 느꼈다. 앞서 언급했듯이 올해는 동학농민혁명이 발생한 지 120주년이 되는 해이다. 60년이 한 갑자이니 120년이면 두 갑자가 되는 것이다.

 

 



 

 
▲ 우금티 우금티에 선 역사트레킹 팀. 그곳에서 갑오년을 떠올렸다. 단순히 트레킹을 소비(?)했던 것이 아니라 발전적이고 확장된 이야기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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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11월 초에는 우금티 추모제가 개최된다. 프랑스 대혁명에 비견되는 동학농민혁명의 의미를 고찰해 볼 수 있는 좋은 시기가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내외적으로 진지한 숙고의 시간을 방해하는 사건과 발언들이 넘쳐난다. 그 중에서 요즘 가장 '인상적인 발언'은 이인호 KBS 이사장이 해주었다.

"김구는 대한민국 건국 공로자가 아니다.(10월 22일, 한국방송 국정감사)"
"(조부는) 유학의 세를 늘려가기 위해 타협하면서 사신 것이다. 그런 식으로 친일을 단죄하면 일제시대 중산층은 다 친일파다.(9월 9일,<한겨레신문>과의 전화통화)"


자신의 조부를 구명하고자 김구 선생까지 매도하는 사람이 KBS 이사장 자리에 앉아 있다. 이렇듯 '친일매국'의 후손들은 요직에 앉아 느긋하게 부모세대들의 친일에 대해 항변하고 있다.

상황이 이러한데 무슨 일본의 군국주의 침탈에 대해 왈가불가 하는가? 일본 아베 정권의 과거사 부정과 친일파 후손들의 항변이 서로 맥락이 다른 것인가? 이인호 같은 사람이 KBS 이사장 자리를 꿰차고 있는 한,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정부비판은 그저 쇼에 불과할 뿐이다. 그저 보여주기 위한 쇼!

우금티에서 돌아가신 영령들은 그런 쇼를 보고 어떤 생각을 가지실까? 혹시 이런 말씀들을 하지 않을까?

"아이고~ 재미없다!"

 

 

 



덧붙임
<공주역사둘레길>은 아직 정식으로 개통되지 않은 길입니다. 내년 봄을 목표로 표식 작업을 완성한 후 개통할 예정입니다. 제 사비를 털어서 표식 작업을 해볼까 하는 생각도 있지만, 더 많은 이들과 함께 하기 위해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자금을 마련할 생각입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과 애정 부탁드립니다!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우금티와 공산성을 이어서 걷다! 공주역사둘레길 탐방기

 

공주역사트레킹 1편

 

14.10.28 11:36 최종 업데이트 14.10.28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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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성 공산성 성곽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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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금티-공산성을 연결하여 사람들과 걷고 싶었다

 


필자는 올해 초에 세웠던 계획 중 하나를 성공적(?)으로 실행했다. '2014년 버킷리스트' 중에 한 가지를 달성한 것이다. 작심삼일로 깨진 계획들을 보며, 항상 뒷맛이 개운치 않은 연말을 맞이했는데 올해는 나름대로 흡족하게 제야의 종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필자는 충남 공주에 있는 우금티와 공산성을 연결하는 도보여행길을 개척하고, 그 길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걸어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동학농민군들이 그토록 넘고자 했던 우금티 고개와 그토록 가고자 했던 공주성(공산성)을 하나의 선으로 이어, 사람들과 함께 트레킹을 해보고자 했던 것이다.

제주올레와 지리산둘레길 등, 이미 600개가 넘는 도보여행길이 있음에도 굳이 '우금티-공산성' 구간을 새로 연결하고자 했던 건 사명감 때문이었다. 사실 필자는 도보여행을 하고, 트레킹 코스를 개척하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다. 달리 말하면 도보여행만큼은 남들보다 더 잘할 자신이 있다는 뜻이다.

그런 재능을 살려 동학농민혁명의 뜻을 기리고자 했다. 문인들이 시나 소설로, 예술인들이 춤이나 노래로 갑오년의 정신을 계승했듯이 필자는 도보여행길을 만들어 그날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했다. 농민군들이 가고자 했던 길을 트레킹을 통해 직접 걸어보는 것도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기리는 나름의 방식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도보여행자들이 역사의 한 장면을 걸을 수 있게, 우금티-공산성 구간을 하나로 연결하는 것이 필자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사명감은 '공주역사둘레길'로 결실을 맺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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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남루 공산성 금남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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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사다마? 시작부터 이상 징후가...

 


지난 10월 18일. 역사트레킹 팀은 서울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공주 공산성에 도착했다. 트레킹을 하기에 '딱'인 날씨였다. 가을 햇살이 좀 강한 것 외에는 활동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아웃도어에서 날씨가 좋으면 반은 먹고 들어간다는데...

하지만 청명한 가을 하늘과 달리 필자의 머릿속은 잿빛이었다. 트레킹 시작부터 좀 이상 징후가 있었기 때문이다. 참가자 중에 한 명은 충남 공주 토박이였고 또 다른 참가자는 시작부터 복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장염에 걸렸던 것이다. 그 참가자는 공주 시내에 있는 병원에까지 다녀왔다.

'호사다마인가? 이번 트레킹 성사를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데...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다고, 이거 괜히 공주토박이 앞에서 망신당하는 거 아니야? 그건 그렇다고 해도 장염에 걸린 참가자는 어쩌지... 미리 구급차 길이라도 봐둬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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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트레킹 참가자 공산성 성곽을 걷고 있는 참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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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역사둘레길'의 시작점은 공산성이다. 현재의 공산성 일대는 삼국시대부터 중요한 전략적으로 요충지였다. 475년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현 공주)으로 천도했을 때 이곳은 왕성이었고, 536년 사비(현 부여)로 천도했을 때는 북방성으로 불리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당나라 소정방에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백제가 역사속으로 사라졌을 때, 의자왕이 있던 곳도 사비성이 아닌 바로 이곳 공산성이었다. 공산성의 현재 모습은 조선 후기 시대에 그 틀이 잡혔다. 임진왜란의 영향으로 인해 1602년, 충청감영이 충주에서 공주로 이전했고, 그에 따라 공산성은 개·보수가 이루어졌다.

매표소가 있는 금서루 부근에서 이런 기본적인 설명을 하며 서쪽 성곽을 둘러갔다. 서쪽 성곽에서는 멀리 황새울이라는 천주교 성지가 보이는데 그 지점에 다다랐을 때 공주토박이 참가자가 이런 말을 했다.

"저기 건너편 십자가 표시 보이시죠? 저기가 황새울이라는 곳인데요. 저기서 천주교 신자가 많이 죽었어요. 그래서 황새울 성지로 불러요."
"앗! 그건 제가 설명하려고 했는데..."

선수를 빼앗긴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시선을 되찾아오기 위해 서둘러 첨언을 했다.

"저 건너편에 공주 감영이 있어서 그랬어요. 사실 천주교 신자가 가장 많이 희생된 곳은 여기 공주라고 하더군요. 감영이 있어 충청지역의 천주교도들이 여기로 다 붙잡혀 온 거예요. 그래서 희생이 컸던 거고요."

염려했던 일이 발생했지만 그럭저럭 위기를 모면했다. 식은땀 한 방울을 흘리며 서둘러 쌍수정(雙樹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금강 공산성에서 바라본 금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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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데기 앞에서 주름잡기, 참 힘드네

 



 

1624년 인조는 이괄의 난을 피해 공산성으로 파천(播遷:임금이 도성을 떠나 피난을 하는 일)했다. 인조는 성 안에 있는 나무 두 그루 아래에서 반란이 진압되길 간절히 기원했다고 한다. 그러다 이괄이 부하의 배신으로 참수됐다는 소식에 기뻐하며 그 나무 두 그루(쌍수)에 정삼품의 작위(통훈대부)를 내린다.

이후 영조 11년, 그 자리에 정자가 세워졌으니 이것이 바로 쌍수정이다. 처음에는 삼가정이라고 불렸으나 이후 쌍수정이 되었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이런 '스토리텔링' 때문인지 공산성은 조선시대 '쌍수산성'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쌍수정에 대한 대략적인 이야기를 하고 금강이 보이는 성의 북면으로 이동을 하려고 할 때였다. 인조와 관련된 설명을 하나 더 준비를 했는데 기억이 안 났다. 무슨 떡 이름이었는데 기억이 안 나서 그냥 북면 쪽으로 이동을 하려 했다. 찜찜한 마음을 뒤로 하고 선두로 나서는데 뒤쪽에서 그 떡 이름과 그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인조가 이곳에 와서 6일 동안 머물렀는데 인근에 사는 임씨 집안사람이 떡을 받쳤대요. 인조는 그걸 맛있게 먹었고요. 당연히 그 떡 이름을 물어봤겠죠. 그런데 이름이 없던 거예요. 그래서 이후에 임씨 집안에서 만든 맛있는 떡이라고 해서 인절미가 된 거라고 하더군요."

또 그 토박이 분이었다. 이번에는 필자가 못한 설명을 그 분이 직접 대신해주었다. 필자는 멋쩍은 나머지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래도 명색이 역사트레킹 마스터 아닌가!

"'ㅁ'이 'ㄴ'변화돼서 결국 인절미가 된 거예요. 그나저나 갑자기 인절미가 땡기네..."

괜히 애꿎은 인절미 타령을 하며 그 순간을 벗어났다. 역시 토박이 앞에서 해당 지역을 설명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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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동성당 공산성 다음 코스가 바로 이 중동성당이다. 중동성당은 1937년도에 완공된 유서가 깊은 성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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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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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금티 고개에서 족구 한 판?

[주장] 우금티에 동학농민군들의 동상을 세우자

14.07.07 11:13l최종 업데이트 14.07.07 11:50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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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성 공산성 진남루. 진남루는 삼남길과 연결된다. 이 길을 따라가면 논산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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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성 공산성 금서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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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공주는 경북 경주와 마찬가지로 땅만 파면 유물이 쏟아져 나오는 곳이다. 그만큼 공주는 도시 자체가 '지붕 없는 박물관'이다. 공산성, 우금티, 무령왕릉, 석장리 유적, 황새울 성지 등등… 이들 중에서 무령왕릉을 제외하고 사람들에게 가장 친숙한 곳은 공산성과 우금티일 것이다. 실제로 이 두 장소는 공주를 대표하는 곳이다.


한편 공산성과 우금티는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 관계에 대해서 알아보자.  

 



웅진성에서 산성공원까지, 공산성의 이름 변천사

앞으로는 금강이 흐르고 있고, 뒤로는 크고 작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현재의 공산성 일대는 삼국시대부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475년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현 공주)으로 천도했을 때 이곳은 왕성(王城)이었고, 536년 사비(현 부여)로 천도했을 때는 북방성으로 불리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660년, 당나라 소정방에 의해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백제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 때, 의자왕이 있던 곳도 사비성이 아닌 바로 이곳 공산성이었다. 당나라가 옛 백제땅에 세운 웅진도독부가 있던 곳도 공산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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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성 공산성은 산성트레킹을 하기에 제격인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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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시기 공주는 신라 9주의 하나인 웅천주였고, 공산성의 이름도 웅천성으로 바뀌게 된다. 공산성이 지금과 같은 '공산성'으로 불리게 된 것은 고려시대 때부터였다. 940년(태조 23년)에 지방제도를 정비하게 되는데 웅천에서 공주(公州)로 명칭이 바뀌게 된 것이다.


이때 비로소 공산성(公山城)이라는 지금의 이름을 얻게 된다. 공(公)자형 산에 성이 축조됐다고 하여 공산성이 된 것이다. 공산성이 자리잡은 산은 '공산'이다. 변산반도의 '변산'처럼 '공산'도 한 글자 산이다.

공산성의 현재 모습은 조선시대에 그 틀이 잡혔다고 볼 수 있다. 1602년 충청감영이 충주에서 공주로 이전했다. 이후 공주는 호서지방의 중심 고을이 되었고 공산성은 개·보수가 이루어졌다. 토성(土城)이었던 공산성이 튼튼한 석성(石城)으로 축조된 것도 조선시대였다.

한편 1624년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공산성으로 피신을 왔는데 그 이후로는 '쌍수산성(雙樹山城)'이라는 이름을 얻기도 했다. 인조는 성 안에 있는 나무 두 그루 아래에서 반란이 진압되길 손꼽아 기다린다. 그러다 이괄이 부하의 배신으로 참수됐다는 소식에 기뻐하며 그 나무 두 그루(쌍수)에 정삼품의 작위를 내린다. 그리하여 '쌍수산성'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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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성 금강에서 바라본 공산성 만하루. 파란색 천이 씌워져 있는 것으로 보아 공사중임을 알 수 있다. 이 사진은 2013년 11월 경에 찍은 사진이다. 필자가 올해 6월에 공산성을 방문했을 때도 만하루 일대는 공사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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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에는 공산성에 공원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곳에서는 각종 체육대회나 야유회가 개최되었다. 그래서 일제시대에는 산성공원(山城公園)으로 불리기도 했다. 일제가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만들어 조선의 궁궐을 격하시켰듯 공산성에 공원을 만들어 그 위엄을 깎아내렸던 것이다.


공산성이 수많은 이름을 가졌다는 것은 그만큼 그 성을 둘러싼 역사가 '드라마틱' 했다는 뜻일 것이다. 현재의 공산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수순을 밟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성벽 일부가 내려앉아 등재까지는 가시밭길이다.

 



공주성, 동학농민군들이 가고자 했던 그 성

왕성, 웅천성, 쌍수산성 등등… 지금까지 공산성과 관련된 수많은 다른 이름들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여기에 한 가지 빠진 명칭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공주성이다.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 1894년 10월.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들은 논산을 출발하여 기세등등하게 북상하고 있었다. 그들이 점령하고자 했던 곳은 공주성이었다. 그렇다. 지금의 공산성인 공주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진격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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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금티 우금티전투가 있었던 우금티. 사진에서도 보이듯 무척 황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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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도 언급했듯이 당시 공주는 감영이 있던 충청지방의 중심지였다. 감영은 관찰사가 주재하던 곳으로 지금으로 치면 도청(都廳)소재지이다. 조선시대 크고 작은 변란이 있었지만 이괄의 난을 제외하고는 한 도(道)의 감영이 함락된 적은 없었다.


그래서 1894년 4월 27일, 동학농민군들이 전주성을 함락시켰을 때 조선 정부는 깜짝 놀라 '멘붕'에 빠졌다. 하지만 당시 조선정부는 이를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결국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을 한다.

청나라는 조선정부의 공식적인 파병 요청을 받고 아산만에 출병을 한다. 이에 일본도 텐진조약을 빌미삼아 인천으로 군대를 급파하게 된다. 그나마 청나라는 출병 요청을 받았다지만 일본군은 왜 우리 땅에 들어왔나? 들어왔으면 전주성이 있는 남도로 진격을 해야지, 왜 인천으로 향했단 말인가?

뚱딴지같은 일본의 출병은 6월 하순에 있은 경복궁 점령으로 본색이 드러나게 된다. 그들은 조선사회의 평안을 위해 이 땅을 밟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평화유지군'이 아니라 그저'침략군'이었을 뿐이다. 경복궁 점령 이후, 아산만 풍도 앞바다에서 청나라군을 기습하여 청일전쟁을 벌인 것을 보면 그 침략야욕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과 뒤이어 발발한 청일전쟁에 대해 동학농민군은 크게 반발했다. 그래서 2차 봉기에 나서게 됐고 공주성을 점령하기 위해 북상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는 우금티에서 관군(3천명)과 일본군(2천명)의 연합부대와 맞서게 된 것이다.

 

 

 

 

 

 

 

 

 

 

 

 

 

 

 

 공주역사둘레길  

 

● 트레킹을 하며 공주의 역사를 탐방하다! 

 

 

 

 

 

 

 

 

 

지난 6월 하순경에 충남 공주를 일주일동안 방문을 했습니다. 작업실(?)이 있어 전에도 충남 공주는 자주 방문을 했었지만 이번에는 좀 특별한 작업을 행하기 위하여 일주일 정도 머무르게 되었답니다.

 

무슨 작업이었냐고요? 공주에 새로 역사트레킹 코스를 하나 개설하는 작업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임무는 성공적으로 완료가 됐답니다. 즉 새로운 역사트레킹 코스가 하나 더 추가된 셈입니다.

 

사실 충남 공주도 경북 경주와 마찬가지로 땅만 파면 유물이 솓아져 나오는, 그런 고장입니다. 역사와 전통의 고장이라는 것입니다. 공산성, 무녕왕릉, 석장리 유적, 우금티, 금강 등등... 금강을 끼고 있는 공주지역은 삼국시대부터 중요한 요충지였습니다. 조선시대에는 관찰사가 주재한 곳이기도 합니다. 동학농민군들이 우금티를 넘으려고 시도한 것도 공주성을 함락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1937년, 대전으로 도청이 이전하기 전까지 충남도청이 있던 곳도 충남 공주였습니다.

 

 

 

 

 

 

 

 

 

 

 

 

 

공주는 이렇게 고대부터 근현대까지 역사유적이 풍부하게 남아 있는 곳입니다. 반가운 것은 그런 유적들이 도심에서 가깝게 위치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 착안하여 이번에 일명 <공주역사둘레길>이라는 트레킹 코스를 개설해보았습니다. 아직 갓 태어나서 제대로 자리를 잡지는 못했지만 이 길은 풍부한 역사적 스토리텔링을 품고 있는데다 풍광까지 일품이어서, 많은이들에게 사랑을 받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 길을 개척하고자 일주일 동안 100km 이상의 거리를 걸었습니다. 갔던길 다시 가고, 왔던 길 돌아오고, 그러다 길도 잃어 버리고... 그렇게 시행착오를 겪다보니 좋은 길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물론 이 공주역사둘레길도 없던 코스를 제가 직접 땅파고, 롤러질을 해서 개척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길의 일부 구간은 공주대간이라고 불리는 등산로를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기존의 등산로를 잘 이용하여 역사트레킹 코스를 개설한 것입니다.

 

공주역사둘레길을 통해, 예전에는 개별적으로 방문했던 공산성과 우금티를 트레킹을 통해 한 번에 갈 수 있게 됐습니다. 조금 길이가 길기는 하지만 공산성과 우금티를 트레킹을 통해 탐방하는 것 자체가 무척 매력적이지 않습니까?

 

 

아래는 공주역사둘레길의 세부구간입니다. 약 14km 정도 되고, 이동시간은 5시간 정도 소요될 것으로 보여집니다.

 

 

충남 관광안내판(신관동 고속버스터미널) ▶ 금강수변 ▶ 금강교 ▶ 공산성 ▶ 중동 성당

▶ 충청남도 역사박물관  ▶ 영명교 ▶ 소나무숲길 ▶ 삼문사 ▶ 감시초소 ▶ 금학생태공원 ▶ 우금티 ▶ 웅진동 ▶ 송장배미

 

 

 

 

 

 

 

 

 

 

 

 

 

 

 

 

 

 

 

 

 

 

 

 

 

 

 

 

 

 

 

 

 

 

 

 

 

 

 

 

 

 

 

 

*공산성

 

 

 

 

 

*공산성:진남루

 

 

 

* 우금티: 우금티터널

 

 

 

* 코스명: 공주역사둘레길

 

 

 

* 이동경로: 금강교 ▶ 공산성 ▶ 중동 성당 ▶ 충청남도 역사박물관 ▶ 영명교 ▶ 소나무숲길 ▶ 삼문사 ▶ 감시초소 ▶ 금학생태공원 ▶ 우금티 ▶ 웅진동 ▶ 송장배미

 

 

 

 

* 역사유적:

1. 공산성: 백제의 수도였고, 조선시대까지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공산성에 대한 설명

2. 중동성당과 영명학교: 공주지역의 근현대유적 중심으로 설명

3. 우금티과 송장배미: 동학농민전쟁에 대한 설명.

 

 

 

 

* 특징: 고대 유적부터 근현대 유적까지, 트레킹을 통해 답사여행을 할 수 있다. 더불어 공주지역에 숨겨져 있는 아름다운 자연을 만끽할 수도 있는 명품트레킹 코스다.

 

 

 

 

* 이동거리: 약 14km

 

 

 

 

* 예상 소요시간: 약 5시간 (공산성 탐방, 휴식시간 포함)

 

 

 

 

* 난이도: 중 ☞ 일부 구간은 공주대간이라고 불리는 산길을 이용함. 경사도가 있는 구간도 있음.

 

 

 

 

* 방향찾기(표식물): 없음. 차후 표식작업 진행 예정.

 

 

 

 

* 이용불가 계절:

 

 

 

 

* 특이사항: 트레킹 중간에 고라니 같은 산 짐승들을 만날 수 있음. 주의를 요망함.

 

 

 

 

* 교통편:

1. 충남 공주는 서울고속버스터미널 기준으로 1시간 40분 정도 소요됨.

2. 공주역사둘레길은 IN과 OUT이 시내권에서 이루어짐. 그래서 트레킹 종료시 터미널로 이동하는 것이 용이함.

 

 

 

* 후기:

 

 

 

 

 

* 중동 성당

 

 

 

 

 

* 영명학교

 

 

 

 

*측우기: 충청남도 역사박물관

 

 

 

 

* 산길: 금학생태공원 가는 길

 

 

 

 

 

* 금학생태공원

 

 

 

 

 

* 우금티

 

 

 

 

 

 

* 소나무 숲길

 

 

 

 

 

 

 

 

 

 

*우금티

 

 

 

 

 

 

 

 

 

* 우금티

 

 

 

 

 

 

 

 

 

 

 

 

 

 

 

 

우금티에 세워진 동학 장승들

- 우금티 장승제이야기

 

14.02.19 14:09l   최종 업데이트 14.02.19 14:09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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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금티 장승제 금강 풍물패가 사물놀이를 하고 있다. 한편 왼쪽 장승은 웨이브가 져서 무척 독특한 형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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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금티 실제로 동학군들이 살육을 당한 곳은 우금티 고개 아래쪽이다. 사진에서 버스와 트럭이 다니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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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으로 불리는 장승은 마을 입구와 같이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곳에 세워졌다. 역병 같은 액운을 막고, 마을의 무사태평을 기원하기 위해 세웠던 것이다. 즉 장승은 마을의 수호신이자 지킴이였던 것이다. 

하지만 공주 우금티 고개에 세워지는 장승들은 그런 교과서적인 의미의 장승들과는 '임무'면에서 차이가 있었다. 왜? 우금티는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동학군들이 결사항전을 벌인 역사적인 장소이기 때문이다. 동학군들의 한, 민초들의 한이 서려 있는 곳이기에 그곳에 세워지는 장승들도 남다른 '스토리'를 갖게 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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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승 장승작업은 나무 껍질을 벗기는 것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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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김작업 장승의 얼굴과 복부 부분의 틀을 잡기 위해 전기톱으로 깎고 있다. 장승은 남녀 쌍으로 제작하기에 사진에서처럼 동시 작업을 할 수 있다. 사진 오른편에서 나무 껍질을 벗기고 있는 사람들은 공주대학교 학생들이다. 공주대 이명희 교수는 교학사 역사교과서 집필에 참여해 식민지 근대화를 역설했지만 정작 나이 어린 공주대 학생들은 우금티에서 동학 정신을 기리는 장승을 깎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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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16일, 충남 공주시 우금티 고개에서는 우금티 장승제가 거행됐다. 우금티 장승제는 공주민주단체협의회와 우금티 기념사업회가 주관하는 행사로 매년 정월대보름 주간에 열렸다. 벌써 20년이 넘는 유서 깊은 제례라고 한다.

장승제라고 해서 매년마다 장승을 세우지는 않았다. 그렇게 장승을 깎지 않았던 해는 제례만 드렸다고 한다. 제례를 통해 공주 지역의 무사태평과 함께 동학 정신을 기렸던 것이다.

다른 지역에서는 시간상의 한계 때문에 미리 제작된 거대한 장승이 세워지는 것으로 장승제가 진행된다. 하지만 우금티 장승제에서는 현장에서 장승이 직접 제작되어 참관객들의 시선을 끌었다. 또한 참관객들이 장승 제작에 직접 손발을 보태기도 했다. 필자도 힘을 보탰다. 땔감을 날랐고, 다듬기 작업도 했다. 하지만 크게 일한 티가 나지 않았다. 역시 내가 잘하는 걸 해야지!

'그래서 내가 지금 이 기사를 쓰고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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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승 역시 공주대학교 학생이 글씨가 새겨지는 부분을 다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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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승 윤여관 우금티기념사업회 집행위원장께서 끌과 망치로 장승의 얼굴 부분을 정교하게 입체화 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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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 제작의 첫 단추는 나무껍질 벗기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장승에 쓰이는 나무는 밤나무와 같은 목질이 단단한 것들이 선호되지만 일반적으로는 야산에서 구하기 쉬운 소나무가 주로 쓰인다. 껍질이 제거되면 나무는 '알몸'을 드러낸다. 이제 본격적인 장승 제작이 시작되는 것이다.

몸통이 매끈하게 드러난 목재에 전기톱을 이용하여 기본스케치를 하는 것이 두 번째 작업이다. 얼굴 부분과 글씨가 새겨질 복부 부분에 기본스케치를 하게 된다. 이후 얼굴 부분과 몸통부분은 좀 다르게 작업된다.   

얼굴 부분은 끌과 망치로 깎아내는 작업을 하게 된다. 마치 조각가가 조각을 하듯이 정교화 작업을 하는 것이다. 복부 부분은 낫으로 다듬기 작업을 한다. 글씨가 새겨질 곳이기 때문에 평탄하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 이런 것들이 세 번째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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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승 장승의 밑둥을 불로 그슬리고 있다. 밑둥은 흙 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쉽게 부식될 수 있다. 그래서 목질의 내구성을 강화시킬 목적으로 밑둥 부분을 불로 그슬린다. 사진 중앙에 마스크를 쓰고 있는 사람이 한준혜 공주민주단체협의회 집행위원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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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승 장승의 복부에 글을 적는다. 보통의 장승들에는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이란 글씨들이 새겨지지만 우금티 장승들은 좀 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문구들이 쓰여진다. 그래서인지 음각을 하지 않고 즉석에서 먹으로 글씨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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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는 나무 밑동을 불로 그슬리는 것이다. 밑동 부분은 땅 속에 묻히기 때문에 쉽게 부식될 수 있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불로 그슬리는 것이다. 그렇게 불로 그슬리면 목질이 단단해지고, 벌레들이 덜 침투하게 된다. 

이제 글씨를 새기는 작업이다. 칼로 음각을 새기고 그 위에다 먹칠을 하는 것이 정석이다. 하지만 우금티 장승들은 음각을 하지 않고 그냥 먹으로 글씨를 적었다. 왜? 우금티 장승들은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같은 통상적인 문구를 가진 장승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지막 작업은 장승 세우기였다. 미리 준비한 솟대와 함께 장승을 세우는 것으로 장승 작업은 종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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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승세우기 예전에는 직접 삽으로 땅을 파서 장승을 세웠지만 요즘은 포클레인으로 땅을 파고 장승을 세운다. 이렇게 하여 장승제작과 장승세우기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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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승제 장승세우기가 끝나고 이제 제례가 시작됐다. 우금티기념사업회 이원하 사무국장이 제례의 사회를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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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보듯 장승 세우기는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다. 마을 공동체가 움직여야 가능한 작업이다. 그렇게 마을 주민들의 공동의 염원과 기원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장승들이 떡~하고 마을 앞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해보시라. 얼마나 든든하겠는가? '세콤'이 달린 것보다도 훨씬 더 든든할 것이다.

우금티 장승들에는 '시민교통노조화합'과 '살림·나눔·모심' 같은 문구들이 새겨졌다.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과 같은 일반적인 문구들이 아니라 지역 단체들의 염원과 기원이 새겨졌던 것이다. 현안에 맞춰 더 디테일한 문구들이 장승에 새겨진 것이다.

그렇게 하여 우금티에는 한 쌍의 장승들이 더 자리 잡게 되었다. 120년 전, 못다핀 동학군들의 열망이 서려있는 우금티에 농민군들의 뜻을 이어받은 장승들이 더 세워지게 된 것이다. 그렇게 동학군들의 장승들이 더해지니 우금티가 든든해 보였다.  

장승제가 무사히 끝난 후, 필자도 나름대로 장승에 새겨질 문구를 떠올려보았다. 만약 필자에게 먹과 붓이 주워졌다면 이런 문구를 새겨 넣었을 것이다.

'친일매국노 교과서 축귀'
'국정원 댓글 조작 축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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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승 한쪽편만 있던 장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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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승 왼쪽에 새로운 장승이 세워졌다. 우금티 고개가 더 든든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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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동학군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청나라와 일본은 기어코 조선땅에 군대를 파병하게 된다. 앞서 언급한대로 청나라는 조선 정부의 파병 요청을 받고 진압군을 보냈다. 이에 일본도 텐진 조약을 빌미 삼아 조선땅에 군대를 급파하게 된다. 청나라야 요청을 받았다지만 일본군의 파병은 뚱딴지같은 처사였다. 조선 정부의 공식 파병 요청도 없었을 뿐더러 전주화약 이후에 조선 땅에 들어 왔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들은 남부지방이 아닌 한성으로 진격을 했다. 동학도들이 한성에다 집강소를 차린 것도 아닌데.

그랬다. 일본군들은 이미 그릇된 야욕을 품고 조선땅을 침략했던 것이다. 그래서 1894년 6월 하순에 경복궁을 공격했고, 곧이어 청나라와 청·일 전쟁을 벌이게 된다. 이런 거듭된 일본의 침략 야욕에 동학군들은 크게 반발하며 본격적인 항일 투쟁에 나서게 된다. 그들은 전열을 가다듬고 충청도 공주로 진격을 하게 된다. 당시 공주는 충청 감영이 있던 곳으로 호서 지방의 중심지였다. 공주성을 함락시킨다면 호서 지방도 동학군들의 세력 범위 안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공주성으로 나아가려는 동학군과 이를 진압하려는 관군, 일본군 사이에 큰 전투가 벌어지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우금티 전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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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농민운동 겉면에는 주제가 나가고, 날개를 들어 안쪽을 보면 그 주제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기재된 작품. 충남 천안여고 역사동아리 학생들이 제작한 것이다. 역시 여고생들이 제작해서 그런지 꼼꼼함이 돋보였다. 설명 부분에 기재된 내용도 상당히 심도가 있었다. 웬만한 성인들도 잘 모를 수 있는 역사적 사실들을 충실히 잘 기재하였다. 우리 청소년들이 역사를 잘 모른다고 걱정들을 하시는데 이런 작품들을 보면 오히려 자기 자신을 책망할지 모른다. '읔, 고딩들보다 내가 더 모르네...'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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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은 죽창으로 무장했던 동학군들에게 개틀링 기관총과 야포를 난사했다. 일본군과 관군의 우수한 화력 앞에 동학군은 속수무책 당하고 말았다. 약 1만 5000명 정도 되는 동학농민군들이 우금티에서 비통한 최후를 맞았고 동학군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심대한 타격을 입게 됐다.

당시 일본은 동학군의 진압에 심혈을 기울였다. 우금티 전투가 일어날 무렵, 일본군은 청·일 전쟁 중이었는데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와 요동반도를 공략하고 있었다. 그래서 동학군의 봉기를 후방을 교란하는 심각한 사태로 판단하고 무자비하게 진압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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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 공주대 교학사 역사교과서 파동으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 중 하나는 공주대가 아닐까? 저자 중에 한 사람인 이명희 교수가 공주대 역사교육과에 재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더군다나 이 교수는 총대를 매듯 이번 사태에서 선봉장 역할을 하고 있으니, 그 비판의 화살이 이 교수를 넘어 공주대 전역으로까지 퍼져나가는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을지 모른다.

그런 면에서 공주대 재학생들과 졸업생들은 무척 억울했을지도 모른다. 자기와는 관계 없는 인물 때문에 괜히 자신들까지 도매급으로 팔려나갔으니까. 하지만 걱정마시라! 필자가 만나본 공주대 역사교육과 재학생들은 패기가 넘쳤고, 무척 똘똘했다. 도매금으로 팔려나갈 인물들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학생들이 교수보다 더 낫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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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보다 학생들이 더 낫네

본격적인 우금티 추모제에 앞서 사전 행사인 역사 축제가 공주대학교 산학협력관에서 개최됐다. 공주대학교? 혹시 교학사 역사교과서의 주요 필진 중의 한 명인 이명희 교수가 재직하고 있다는 그곳?

그렇다. 교학사 교과서 문제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냈던 이명희 교수는 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에 재직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번 역사 축제는 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 재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프로그램을 총괄하고 있었다. 단순히 장소 제공을 넘어 전체 진행을 주도적으로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금티 역사축제는 충남 관내에 있는 고등학생들이 직접 제작한 작품 전시와 소극장에서 펼쳐지는 발표회, 두 축으로 이루어졌다. 꼼꼼한 손길로 제작된 전시물들에는 동학뿐만 아니라 독도, 위안부 강제 동원 같은 다양한 문제들이 담겨져 있었다. 작품 의도가 무엇이냐는 필자의 물음에 학생들은 똑 부러지는 설명도 잊지 않았다. 해당 내용을 제대로 숙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당찬 모습에 '요즘 애들은 역사를 너무 모른다'고 몰아세우는 편에 섰던 한 사람으로서 좀 부끄럽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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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넋전 넋전을 직접 땅에 꽂고 있는 청소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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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교학사 역사교과서 파동으로 인해 공주대학교는 본의 아니게 큰 불똥을 맞게 됐다. 선봉장(?) 역할을 맡고 있는 이명희 교수가 목소리를 높이면 높일수록 애꿎은 공주대학교의 재학생·졸업생·교수들까지 도매금으로 묶여 질책을 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자가 만나본 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 학생들은 무척 합리적이었고 쾌활한 젊은이들이였다. 해당 학과의 교수 한 명 때문에 다수의 청춘들이 싸잡혀서 욕을 먹는다? 이거 정말 불합리하지 않은가?

우금티 추모제는 오후 3시 우금티 고개에서 행해졌다. 참가자들이 죽은이의 넋이 담겨져 있는 넋전이라는 종이 인형을 제단 앞쪽에 꽂으면서 추모제는 시작됐다. 추모제는 해원무 공연, 사물 놀이 공연 등으로 이어졌는데 전체적으로 규모가 작게, 조촐하게 치러졌다. 공동집행위원장인 지수걸 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는 이런 인사말을 했다.



"여기서 북쪽으로 3km 정도만 올라가면 금강이 나옵니다. 만약 동학군들이 우금티를 넘고, 금강을 건넜다면 세상은 어떻게 변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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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금티 추모제례 119년 전 우금티 고개에서 유명을 달리한 동학농민군들의 넋을 달래는 추모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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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변했을 것 같다. 적어도 일제강점이라는 치욕적인 역사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면 분단도 없었을 것이다. 역사에 가정이란 그저 허무한 일이라지만 그래도 이런 유쾌한 상상력은 삶에 활력을 가져다줄지 모른다.

 

 

 

 

 

 

 

 

 

 

 

 

'교학사' 이명희 교수, 공주대 제자들에게 배우시길

공주에서 '우금티 전투' 추모제례·역사축제 열려

13.11.06 13:47l최종 업데이트 13.11.06 15:42
곽동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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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 작은 외계인? 이것은 넋전이다. 넋전은 죽은이의 넋을 담은 종이 인형을 말한다. 이 넋전에는 우금티 전투에서 비통하게 눈을 감은 동학농민군들의 혼이 담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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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금티 캐릭터 이제 동학농민전쟁 기념식도 정형적인 틀에서 벗어나 젊은층의 참여를 이끌 수 있는 방식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런 캐릭터 이벤트는 청년층에 대한 참여와 관심을 이끌 수 있다. 한편 위의 캐릭터에 새겨진 초코릿 복근이 무척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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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금티냐, 우금치냐

지난 10월 27일. 옛 백제의 도읍이었던 충청남도 공주시에서 작지만 의미 있는 행사가 하나 개최됐다. 119년 전 공주 우금티에서 비통한 최후를 맞은 동학 농민군들에 대한 추모 제례와 역사 축제가 행해진 것이다.

일단 용어 정리가 필요하겠다. '우금치'는 알겠는데 '우금티'는 무엇이냐고 반문을 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또 '치'나 '티'나 비스무리한데 굳이 왜 우금티를 내세우냐고 물으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고개를 뜻하는 순수한 우리말은 '티'나 '재'였다. 칡이 많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충북 충주의 '갈티고개', 노루들이 출몰한다는 경북 봉화의 '노루재'가 그 좋은 예일 것이다. 하지만 일제는 고개를 뜻하는 우리말에도 왜곡의 씨앗을 뿌려 놓았다. 일제는 지도를 제작하면서 고개마다 이름을 붙였는데 고개를 뜻하는 한자 '티'자가 없었기에 손쉬운 대로 '언덕 치(峙)'자를 가져다 붙였다고 한다. 그래서 '우금티'가 '우금치'로 개명된 것이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 때문인지 공주 지역에서는 우금치가 아닌 우금티로 더 많이 불리고 있었다.

옛 고지도를 살펴보면 '언덕 치(峙)'를 쓴 지명들이 적지 않게 나타난다. '곰치재'나 '웅치' 같은 곳들이 그런 곳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굳이 우금티라는 명칭을 소리 높여 부른다고 오히려 질책을 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금티가 어떤 곳인가?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동학농민군들이 학살에 가까운 몰살을 당한 곳이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이 결합되었기에 '우금치'가 아닌 '우금티'로의 제 이름 찾기는 분명 의미가 있는 발걸음으로 평가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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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수걸 교수 지수걸 교수는 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 학과장이자 이번 <우금티 추모제례 및 역사축제>의 공동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얼마전 같은 학과에 있는 이명희 교수의 <교학사 역사교과서>에 대한 비판을 꼼꼼하게 담은 성명서를 발표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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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4년 11월, 공주 우금티 고개


그럼 119년 전인 1894년에 도대체 우금티에서는 무슨 일이 발생했는가? 아시는 분들도 많겠지만 모르시는 독자들을 위해 부연 설명을 해보겠다. 황토현 전투에서 승리한 동학군은 그 기세를 몰아 정읍을 점령하고 전주로의 진격을 결행한다.

전주가 어떤 곳인가? 당시 전주는 전라도의 핵심 지역으로 관찰사의 소재지였다. 한마디로 전라도의 심장부가 동학군에 의해 점령되었던 것이다. 이에 당황한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구원 요청을 한다. 이에 외국 군대의 국내 입성에 대한 빌미를 주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들이 모아져 동학군과 정부 사이에 전주화약(6월 11일)이 맺어졌다.     

전주화약 이후 동학군의 세력 범위에 있던 지역은 점차 안정화를 찾아갔는데 그 중심에서는 집강소 제도가 있었다. 동학농민군이 휩쓸고 간 지역은 치안과 행정이 마비됐는데 어쩌면 이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동학군의 대척점에 서 있던 사람들이 누구였는가, '가렴주구'를 행한 장본인들이 누구였는가를 생각해보면 쉽게 유추가 될 것이다. 동학군에 의해 탐관오리들이 처형됐으니 해당 고을의 치안과 행정은 마비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에 전봉준과 전라도 관찰사 김학진은 전라도 지역의 안정화를 도모하고자 민간자치 기구를 설치하기로 합의한다. 그렇게 하여 탄생된 것이 바로 집강소였다. 집강소는 자치 기구였으나 사실상 지방행정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실질적인 지역 통치기구로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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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뚜껑으로 만든 우리나라 우리나라 외교에서 쟁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병뚜껑에 기재하여 제작한 병뚜껑 한반도. 충남 예산 여고 학생들이 급우들과 함께 만든 작품이다. 독도나 위안부를 적은 병뚜껑이 많이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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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인가요? 아닙니다. 저것은 넋전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죽은 자의 넋을 담은 종이 인형입니다.

그럼 저 넋전들에는 어떤 죽은이들의 혼이 스며 들어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아래 현수막 문구에도 나와 있듯이

119년 전, 충남 공주 우금티 전투에서 유명을 달리한 동학 농민군들의 넋이 담겨져 있답니다.

10월 27일 우금티 고개에서 개최된 <2013년 우금티 추모제례 역사축제>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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