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걷는 역사트레킹 2편>

 

 

역사트레킹 리딩을 하다보면 여러 가지 불만 섞인 지적을 받게 된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이다보니 필자에게 쏟아내는 욕구들도 다양했던 것이다. 역사트레킹을 시작하면서 팔자에도 없는 욕을 먹게 될 거라는 건 각오를 했다. 하지만 서로가 충돌하는 욕구들을 쏟아낼 때는 참 난감해진다.

 

- 코스의 물리적 난이도가 너무 높다 혹은 너무 낮다

- 이동 속도가 너무 빠르다 혹은 너무 느리다

- 해설의 수준이 너무 높다 혹은 너무 낮다

- 막걸리를 못 마시게 해서 너무 싫다

 

일부 수강생분들 중에는 엄청난 여행 경력을 가지고 계시는 분들이 있다. 엄청난 등산 경력을 가지고 계신 분들도 있다. 그런 베테랑들에게 역사트레킹은 성이 안 찰 수도 있다. 7~8km 밖에 되지 않는 구간을 4시간에 이동을 하니 그 분들이 보기에 너무 느린 것이다. 평지 기준으로 보통 성인이 한 시간에 4km 정도를 이동하니 그 분들은 2시간 남짓이면 해당 코스를 완주할 수 있는 것이다.

 

“역사트레킹은 테마를 따라가는 느림보 트레킹입니다. 소걸음 걷듯이 아주 느긋하게 소풍 맞은 아이들처럼 그렇게 재밌게 걸을 겁니다.”

 

이렇게 사전에 계속 안내를 하지만 ‘너무 느리다’라는 컴플레인은 꾸준히 제기됐다. 그런 컴플레인을 제기했던 분들은 다음번 강의에서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그 불만이 다는 아닐 거다. 아무래도 막걸리를 못 마시게 해서 그런가...

 

 

 

 

 

 

* 이말산의 봄

 

 

 

 

 

 

● 이름도 독특한 이말산

 

이번에는 삼천사 역사트레킹을 소개한다. 삼천사 역사트레킹은 이말산(莉茉山)에서 시작된다. 이말산은 3호선 구파발역에서 바로 올라갈 수 있는 곳인데 산이라고 칭하지만 작은 언덕배기에 불과하다. 해발이 겨우 132미터 정도니까. 구파발역 옆에 있는 통일로를 건너가면 앵봉산으로 갈 수 있는데 앵봉산 남쪽에는 유명한 서오릉이 자리를 잡고 있다. 반대로 구파발역에서 이말산을 계속 타고 가면 북한산 서쪽편이 나온다. 즉 이말산은 앵봉산과 북한산의 중간에 있는 작은 산이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말산은 이름이 참 독특하다. 명칭이 독특해서인지 동명이산도 없다. 실제로 검색을 해봐도 구파발 이말산이 유일하다. 그럼 이말(莉茉)은 무슨 뜻일까? 재스민을 한자로 풀면 '이말'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이말산은 재스민이 만발한 산이라는 뜻이다. 이말산에 재스민이 많이 피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 산에는 무언가가 확실히 많다. 그것이 무엇이냐? 바로 무덤이다.

 

특히 이말산에는 내시를 비롯한 궁인들의 무덤들이 군집을 이루고 있다. 북한산의 지산인 이말산은 한양도성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지만 성저십리 밖이라 무덤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성저십리(城底十里)는 도성에서 십리(4km)까지의 거리를 뜻하는데 성저십리까지는 무덤을 쓰지 못하게 했다. 북한산의 서쪽에 자리 잡고 있는 이말산은 해발이 높지 않은 산이라 무덤을 쓰기에 적당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의주로를 따라 비교적 편하게 당도할 수 있었으니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의주로는 지금의 통일로다.

 

삼천사 역사트레킹은 이전에 소개한 <진관사 역사트레킹>과 여러 면에서 겹쳐진다. 동쪽편과는 다른 북한산 서쪽편의 이야기, 거기에 잠들어 있는 궁궐사람들의 이야기 등등... 실제로 진관사와 삼천사는 북한산 응봉을 사이에 두고 서로 자리를 잡고 있다. 두 사찰 사이의 직선거리가 1km도 안 될 정도로 아주 가깝다. 그러니 이번편 삼천사 역사트레킹과 <진관사 역사트레킹>을 교차해서 살펴보시면 더욱더 좋을 것이다.

 

 

 

 

 

 

* 이말산: 주인을 잃은 석물들이 방치되어 있다.

 

 

 

 

 

 

● 죽어서까지 서럽다

 

거대한 암봉들이 우뚝우뚝 서있는 북한산은 골산(骨山)의 면모를 보인다. 이와 달리 해발 130미터 정도의 이말산은 육산(肉山)이라고 할 수 있다. 푸근한 동네 뒷산 같은 이미지와는 달리 현재 이 산의 무덤들은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있다. 쓰러진 문인석, 뒹굴고 있는 묘비, 잘려나간 망주석 등등... 자신들의 '씨앗'을 남길 수 없었던, 그래서 후손들을 둘 수 없었던 내시들이었기에 그런 황량함이 더 애절하게 느껴진다. 물론 예전 내시들 중에는 양자를 드려 자신의 제사를 받들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양자도 후손을 둘 수 없는 이들이었기에 그 한계가 분명했던 것이다.

 

후손이 없는 무덤은 버려진 것과 다를 바 없다. 봉분은 깎여 나가 평평해지고, 그 주위에 세워둔 석물들은 쓰러진다. 그 중 잘 생긴 문인석은 누군가의 손에 들려 나가기도 한다. 한마디로 도둑을 맞는 것이다.

 

이런 사실만으로도 서러운데 더 서러운 일도 있다. 2010년을 전후로 해서 이말산 부근에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다. 유명한 은평 뉴타운이 들어선 것이다. 그런데 아파트 입주민들이 이곳에 있는 무덤들을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민원을 넣은 것이다. 아파트 창문을 열면 바로 무덤들이 보이니 무섭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들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뉴타운보다 무덤이 더 오래됐다. 그 무덤들이 먼저 들어섰고, 몇 백 년 후에 아파트가 들어섰다. 뉴타운이 굴러온 돌인 것이다. 그리고 이말산에 있는 궁인들의 무덤은 그자체로 학술적인 가치가 있다.

 

 

 

 

 

 

 

* 문인석: 머리가 잘려나간 문인석. 누군가 일부러 머리 부분을 자른 것처럼 절단면이 반듯해보인다. 주인이 없는 무덤가라 그런지 문인석들도 크게 훼손됐다.

 

 

 

 

 

 

 

● 북한산의 고봉들이 반겨주는 삼천사

 

이제 트레킹팀은 삼천사로 향한다. 삼천사는 661년(문무왕1)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절이다. 이웃한 진관사가 천년고찰이면서 서울의 4대 명찰로 불리지만 창건연대에서는 삼천사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진관사는 1010년, 고려 현종 때 건립됐으니 삼천사가 그보다 400년이나 앞서 세워진 것이다.

 

삼천사는 한때 3000명의 수도자가 불도를 닦았을 정도로 크게 융성했다고 한다. 하지만 수많은 전란을 겪으면서 크게 손상을 입는다. 한국전쟁 때도 크게 불에 타는데 지금의 전각들은 1960년대 이후에 세워진 것들이다. 그때 복원을 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터를 잡은 것이다. 오리지널 삼천사 터는 계곡을 따라 약 30분 정도 올라가야 만날 수 있다.

 

현재의 삼천사에 들어서면 북한산 서쪽편의 고봉들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계곡을 따라 장군봉, 나한봉, 나월봉, 보현봉... 그 다음에 뭐였더라? 그렇게 우뚝우뚝 서있는 고봉들을 보고 있노라면 도심지 빌딩숲에 펼쳐진 인공의 스카이라인이 밋밋하게 여겨진다.

 

봉우리들을 바라보며 눈을 정화했다면 이제 부처님을 향해 갈 차례다. 삼천사에는 고려시대에 제작된 마애불이 있는데 그 부처님을 만나 뵈러 가는 것이다. 보물 657호로 지정된 ‘서울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을 뵈러 가는 것이다.

 

고려 전기시대에는 개성미가 넘치는 석불들이 많이 등장한다. 논산 관촉사 은진미륵, 안동 제비원 석불, 파주 용미리 쌍미륵 등등... 이 시기에 등장한 석불들은 거대한 사이즈를 자랑하는데 은진미륵 같은 경우는 약 18미터에 달할 정도다. 그렇게 어마어마하니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석불로 자리매김했다. 1등이라는 말이다.

 

돌장승같이 석불들이 큼직큼직하니 균형미나 비례미는 떨어졌다. 신체비율에 안 맞게 얼굴을 크게 부각하여 3~4등신으로 만들어진 석불도 있을 정도였다. 이렇게 개성미가 넘치게 된 건 그 당시 정치상황과 연관이 있다. 고려 전기시대에는 호족세력들이 지방에서 위세를 떨쳤는데 그런 사회상황이 석불 제작에도 반영됐다고 할 수 있다.

 

 

 

 

 

 

 

* 삼천사: 뒤쪽으로 북한산의 고봉들이 펼쳐져 있다.

 

 

 

 

 

 

 

● 같은 고려 전기에 제작됐지만 삼천사 마애불은 다르다

 

11세기경에 제작됐으니 삼천사 마애불도 고려 전기에 만들어졌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된 고려 전기에 제작된 석불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세련미와 균형미가 잘 갖추어졌다는 뜻이다. 격식을 파괴한 듯 자유분방한 모습을 보이는 거대한 석불과는 차이가 분명하다는 것이다.

 

대웅전을 돌아 위쪽으로 올라가면 마애불을 만날 수 있다. 마애불(磨崖佛)은 벼랑애(崖) 자에서 보듯 바위에 새긴 불상을 말한다. 위에서 언급한 은진미륵 같은 경우는 환조(丸彫) 형식의 석상으로 되어 있다. 좀 어렵다. 학창시절에나 배웠던 미술용어도 나오고, 그보다 더 어려운 한자도 나왔으니까. 트레킹팀도 어려워하셨다. 그래서 이렇게 설명을 했다. 해설을 질을 떨어뜨렸다고 하지 마시라. 오죽하면 그랬겠는가!

 

“마애불은 벽에다 그리는 그래피티라고 생각하시고요, 환조는 이순신 장군 동상 생각하세요. 물론 동상은 금은동 할 때 그 동으로 만들었어요. 석상은 돌, 그러니까 스톤이고요. 오케이?”

 

삼천사 마애불은 신체의 비례가 잘 표현됐고, 승각기 등의 법복이 잘 그려졌다. 약 3미터 정도인 삼천사 마애불은 양각, 음각, 부조까지 다양한 기법들이 조화롭게 잘 스며들어 있다. 양각과 음각은 아실 것이다. 그럼 부조는? 부조(浮彫)는 돋을새김이라고도 하는데 평면에 형상이 도드라지게 만든 것을 말한다. 삼천사 마애불의 얼굴 부분을 보시면 부조로 잘 조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애불 앞에는 대리석이 깔려 있는 넓은 공간이 있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치성을 드린다. 이곳 아래로는 삼천사계곡이 흐르고 있는데 다리 형식으로 복개를 하여 부처님에게 더 가깝게 다가설 수 있게 됐다.

 

제작된 지 거의 천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삼천사 마애불은 별로 마모가 되지 않고 뚜렷하게 자신의 자태를 뽐내고 있다. 석불 좌우에 뚫린 가구공(架構孔)에 당장이라고 목재를 끼워 지붕을 달 수 있을 정도로 가구공도 그 빤듯함을 유지하고 있다.

트레킹팀도 공손하게 합장을 하고 기원을 드렸다.

 

“여러분 무슨 기원을 올리셨나요? 어쨌든 소중한 기원이 잘 성취됐으면 좋겠네요.”

 

글 서두에도 언급했듯이 역사트레킹은 테마를 따라가는 느림보트레킹이다. 쭉쭉 치고 나가는 걸 좋아하시는 분들은 역사트레킹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 의미로 삼천사 역사트레킹과 진관사 역사트레킹은 따로따로 행하셨으면 좋겠다. 느긋하게 따로따로 행하는 게 더 기억에 남을 테니까.

 

 

 

 

 

 

* 삼천사 마애불: 고려 전기시대 작품

 

 

 

 

 

 

 

* 삼천사 마애불: 천 년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음.

 

 

 

 

 

 


 

 

 

 

■ 삼천사 역사트레킹

1. 코스: 이말산 ▶ 진관근린공원 ▶ 삼천사 ▶ 삼천사계곡

2. 이동거리: 약 7km

3. 예상시간: 약 3시간 30분(휴식시간 포함)

4. IN: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 2번 출구 / OUT: 진관한옥마을 ☞ 삼천사계곡까지 탐방한 후 은평한옥마을에서 버스편을 이용하여 다시 구파발역으로 이동할 수 있다.

 

 

 

 

* 삼천사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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