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절두산: 당산역에서 바라 본 절두산. 뒤에 보이는 산은 북한산이다.









이승만이 한강 다리를 끊었다고요?

 

- 한강 따라가는 한강역사트레킹

    

 


그게 정말이에요? 저 한강대교가 폭파됐었다고요? 그게 언젠데요?”

 

어느 가을날, 한강 역사트레킹을 행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참가자 중 한 분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저런 질문을 던지더군요. 다른 분들의 표정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한강대교와 한강철교가 폭발해서 폭삭 주저앉았다는 제 설명에 대한 반응들이었습니다.


그때 마침 KTX 한 대가 미끄러지듯 한강철교 위로 속도를 내고 지나가고 있더군요. 강제적(?)으로 묶인 침묵의 시간이 흘렀고, 저는 입을 뗐습니다.

 

한국전쟁 때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폭발시킨 주체가 인민군이 아닌 우리 국군이었다는 점입니다. 인민군의 남하를 막겠다고 다리를 폭파시킨 거죠. 전쟁 때는 일부러 시설물을 파괴해서 적군의 행군 속도를 늦추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강대교 폭파는 문제가 아주 많았어요. 다리 폭파로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거든요.”

 

무슨 피해가 있었는데요?”

 

사전 예고 없이 폭파가 실시돼서 당시 다리를 건너던 피난민들이 많이 죽었어요. 수 백명의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물에 빠져버렸습니다. 더 황당한 일은 다리가 끊기기 몇 시간 전까지, 수도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힘찬 목소리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는 겁니다.”

 




* 노들텃밭: 노들섬, 노들텃밭에서 바라 본 한강대교 아치형 교각.






그럼 대통령이 서울에 남아 있었는데 다리를 끊었다는 건가요?”


아닙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에 없었어요.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정권 수뇌부들은 멀리 대전까지 피난을 간 상태였습니다. 미리 녹음했던 음성으로 계속 돌려 됐던 거죠. 그래서 실제로 그 방송 내용을 믿고 피난을 안 간 사람도 있었다고 하네요. 웃기는 거죠. 자신들만 살겠다고 도망을 간 건 그렇다 쳐도 왜 거짓말을 합니까? 서울에 있지도 않으면서 서울에 있다고 구라쳐서 국민들을 바보로 만들고...”

 

마지막 설명을 할 때는 저도 비속어를 써가며 좀 흥분을 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침도 튀기면서... 마지막 설명이 끝나자 분위기가 좀 가라앉는 듯 보이더군요. 그래서 영화이야기로 방향을 좀 틀어봤습니다.

 

“<웰컴투 동막골>이라는 영화 기억나시죠? 그 영화에서 신하균이 육군 소위로 나오잖아요. 영화에서 신하균은 탈영을 하고 자살까지 시도를 했는데 그게 다 죄책감 때문에 그랬더라고요. 피란민들이 몰려든 다리를 폭파시켰는데 담당자가 신하균이었던 거죠. 그래서 신하균은 죄책감에 시달렸던 거고요. 그 부분은 한강대교 폭파에서 모티브를 따온 게 아닌가 하네요.”

 

그때 다시 한강철교 위로 무궁화호가 한 대 지나가더군요. 무궁화호가 느린 걸음을 하는 동안 트레킹 팀은 또 한 번 침묵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소풍 같은 역사트레킹이라는 리딩 원칙이 어긋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순간 누군가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이야기 하더군요.

 

아픈 우리 현대사네요.”

 









 * 샛강생태공원: 여의도에 숨어 있는 보물인 샛강생태공원.

 







 

# 선유도가 되어버린 선유봉?

 

한강. 매일 보는 한강인데. 매일 같이 출근하러 다리를 넘고, 퇴근하면 복실이랑 같이 산책하는 그런 곳인데. 그런 한강에도 역사트레킹을 할 곳이 있는 걸까요? , 그렇습니다. 있습니다.


한강역사트레킹의 첫 번째 도착지는 절두산 성지지만 그 반대편에 있는 선유도부터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사실 선유도와 절두산은 하나의 권역으로 묶일 수 있기에 선유도부터 이야기하는 전개 방식이 틀린 것만은 아니죠.


원래 선유도는 섬이 아니었습니다. 선유봉(仙遊峰)이라고 불렸던 봉우리였습니다. 높이는 해발 40미터 정도였습니다. 해발 40미터면 썩 높은 편은 아니지요. 하지만 푸른 나무들을 품고 있는 봉우리가 강가 가까운 쪽에 우뚝 서 있었으니, 그 모습이 무척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은 것이죠. 그래서일까요? 중국 사신들도 조선에 오면 꼭 선유봉이 있는 양화 일대를 유람하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겸재 정선도 선유봉을 사랑한 사람 중에 한 명이었습니다. 진경산수화로 유명한 겸재 선생도 한 풍류하시지 않습니까? 그런 겸재 선생이 선유봉이 자리잡고 있는 양천현의 현령으로 부임을 하게 됩니다. 그때가 1740, 조선 영조 때였죠

 

겸재 선생은 1741년에 <양화환도>, <금성평사>, <소악후월>3편의 진경산수화를 화폭에 담았답니다. 지금의 선유도 일대의 한강 유역을 사실감 넘치는 필치로 담아낸 것이죠. 특히 <양화환도>에서는 선유봉과 함께 잠두봉이라고 불렸던 지금의 절두산이 등장합니다. 또한 그 잠두봉 아래에는 양화진(지금의 합정동)의 모습도 그려져 있습니다.


선유봉과 잠두봉 사이의 물길을 느긋하게 노를 저으며 건너가는 뱃사공의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양화환도>를 보고 있노라면, 그림 속에 뛰어들어 신선놀음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렇습니다. 선유봉(仙遊峰)은 한자 풀이대로 신선이 노닌다는 봉우리입니다. 만약 진짜 그림 속으로 뛰어들 수 있다면 선유봉 꼭대기에 서 있는 노송 아래에서 차를 한 잔 마시고 싶네요. 막걸리 말고.


그렇다면 왜 선유봉은 졸지에 선유도로 내려앉았을까요? 누가 파먹었나요?

일제에 의해 여의도에 비행장이 들어설 무렵이었습니다. 일제는 활주로를 닦고 제방을 쌓는다며 명목으로 선유봉을 깎아냈습니다. 채석을 한 것이죠. 그렇게 선유봉은 채석장이 되어버렸고 봉우리는 점점 더 깎여나갔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선유봉은 계속해서 채석장으로 이용되었는데 선유봉에서 캔 돌들은 지금의 강변북로 공사 등에 이용됐다고 합니다. 그렇게 깎이다보니 선유봉은 납작하게 되어버렸고, 이후 한강이 개발되어 강폭이 넓어졌을 때 영등포쪽과 분리되어 결국 섬이 되고 맙니다.


그러고보면 선유도는 참 사연이 많은 섬이네요. 깎이고, 부서지고, 졸지에 섬이 되고... 그렇게 섬이 된 선유도는 지금 서울 시민들이 가장 많이 찾는 휴식처 중에 한 곳이 되었습니다. 누구나 와서 신선놀음을 할 수 있게 된 것이죠.

 

 

 


*척화비: 절두산 성지에 있다.







 

# 절두산으로 개명한 잠두봉

 

이제 절두산 이야기를 해보죠. 앞서 언급한 <양화환도>에서 절두산, 즉 잠두봉은 선유봉과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뽕나무가 많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잠두봉은 그 머리가 불쑥 튀어나왔다고 하여 용두봉이라고도 불렸습니다.


중국 사신들이 조선에 왔을 때 꼭 들렀다는 잠두봉이, 겸제 정선이 화폭으로 담아낼 정도로 비경을 자랑하던 잠두봉이 왜 절두산으로 이름이 바뀌었을까요? 그것도 머리가 잘린다는 의미의 절두산(切頭山)이라는 살벌한 이름으로

   

1866.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이루어진 병인박해 때문에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죽음을 당합니다. 이때 주교인 베르뇌를 포함한 9명의 프랑스인들이 처형을 당했는데 그들은 절두산이 아닌 새남터(현재의 용산구 이촌동)와 충남 보령 갈매못 등지에서 죽었습니다.


이 병인박해가 원인이 되어 병인양요가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자국의 선교사가 처형됐다는 소식에 중국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의 로즈 제독은 함대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습니다. 프랑스 함대는 본격적인 공세에 앞서 정찰선을 파견하는데 그 정찰선이 한강 깊숙이까지 올라온 것이죠. 양화진을 넘어 서강까지 침범하고 돌아간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대원군이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대원군은 아주 격분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사악한 서양 세력의 흔적들을 천주교도들의 피로 씻어내겠다며 잠두봉에 새로운 처형지를 만든 것입니다. 잠두봉이 양화진이나 서강과 가깝다는 이유로 그렇게 된 것이죠. 그렇게 하여 뽕나무들이 우거졌던 잠두봉은 머리가 떨어져 나간다는 뜻의 절두산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150년 전, 그렇게 절두산은 수 천 명의 천주교인들의 목이 잘려나간 비극의 땅이었습니다. 또한 흥선대원군이 세운 척화비가 감시견처럼 서 있던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은 강물처럼 끊임없이 흘러갔습니다. 그런 흐름은 흥선대원군도 막을 수는 없었겠지요.


현재 흥선대원군이 세운 척화비는 절두산 한쪽에 꿔다둔 보릿자루 마냥 껑뚱하게 서있지만 절두산은 그 자체가 우리 천주교에서 가장 중시하는 성지 중에 성지가 됐습니다. 절두산은 천주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한 번 쯤은 가볼만한 곳입니다. ‘피의 역사가 서린 근현대사의 중요한 장소인 만큼 직접 탐방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척화비를 직접 확인해 보는 것도 좋고요

 

그러고 보면 절두산이나 선유도나 공통점이 많네요. 예전에 사랑을 많이 받은 것도 똑같고, 본의 아니게 이름이 바뀐 것도 똑같고.

 






* 한강철교: 63빌딩 쪽에서 바라본 한강철교. KTX가 지나고 있다.







 

 

# 이승만이 끊은 한강대교

 

다시 한강대교 이야기.

한강대교 폭파로 인해 군사적인 피해도 엄청났습니다. 한강 북부에 남아 있던 국군의 퇴각로가 봉쇄됐기 때문입니다. 만약 순차적인 퇴각이 이루어졌다면 국군은 한강 이남에서 전열을 정비하여 인민군의 남하를 저지할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1950714일에 전격적으로 이양된 전시작전통제권도 그렇게 쉽게 이양되지 않았을 겁니다. 아직까지도 우리에게는 전시작전권이 없습니다.


분명 한강대교 폭파는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사실들을 모르고 있더군요. 대다수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나마 다리가 끊겼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도 절단한 주체를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미군의 공중폭격으로 교량이 폭파되지 않았냐고 물었던 참가자도 있었으니까요.


좋은 역사든 아픈 역사든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름이 바뀌었으면 왜 바뀌었는지, 다리가 끊어졌다면 왜 끊어졌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반면교사를 삼을 수 있으니까요. 그래야지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게 막을 수 있겠죠. 그런 의미에서 저는 한강역사트레킹을 마칠 때 항상 이런 말로 마무리를 짓습니다.

 

인민군의 남침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한강대교 폭파에 대한 면죄부가 부여될 수 없지요. 자기는 안전하게 대전에 내려가 있으면서 서울을 사수하겠다고 거짓말이나 해대고... 그게 바로 이승만입니다.”

 





 

한강역사트레킹

 

1. 코스: 절두산성지 양화대교 선유도 여의도 샛강생태공원 63빌딩 한강철교 노들텃밭(한강대교)


2. 이동거리: 10km


3. 예상시간: 4시간 정도(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5. 교통편: IN - 지하철 2호선 합정역 / OUT - 노들텃밭 노들텃밭에서 노량진역으로 가는 버스를 탑승할 수 있음.

 

 

 

 

 


 

 

창의문 천장에 '닭' 그려넣은 이유, 오호라

 

[서촌의 뒷산, 인왕산역사트레킹 ②]

 

15.06.09 20:06    최종 업데이트 15.06.09 20:06

 

 

 

 

 

 

 

 

 

▲ 수성동계곡 사진 왼쪽 부분에 돌다리가 보인다. 기린교다. 뒤에 보이는 산은 인왕산이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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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 [서촌의 뒷산, 인왕산역사트레킹 ①] '낭만'과 '비낭만'이 교차하는 서울성곽길

 

인왕산의 숨겨진 보물, 수성동계곡


수성동 계곡은 인왕산의 또 다른 볼거리다. 열을 갖춰 늘어서 있는 소나무들 사이로 암반이 드러난 인왕산을 바라보다보면 여기가 서울이 맞나 싶을 정도다. 아랫동네 서촌의 번잡함은 싹 사라지고, 계곡이 주는 청량감이 주위를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계곡치고는 유량이 거의 없어서 안타깝기는 하지만. 

수성동(水聲洞)의 명성은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더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수성동을 두고 조선시대 역사지리서인 <동국여지비고>와 <한경지략>에는 명승지로 소개하고 있다. 겸재 정선은 <수성동>을 그려 이곳의 아름다움을 수묵으로 옮겨놓았다. 또한 이곳은 중인들이 모여 시를 짓고 노닐던 곳이다. 조선후기 중인들의 중심으로 발달된 위항문학(委巷文學)의 본거지였던 셈이다. 그러니 문학사적인 측면에서도 무척 중요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수성동 계곡은 2012년 7월에 복원한 것이다. 복원 전에는 1971년에 지어진 시민아파트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후 안전문제로 아파트는 철거가 됐고, 그 위치를 옛 모습으로 돌려놨던 것이다. 복원 과정에 겸재 정선의 <수성동>이 큰 역할을 해주었다. <수성동>에 나오는 것처럼 '기린교'라는 통돌다리도 그대로 복원이 됐다. 어쩌면 겸재의 그림이 없었다면 지금의 수성동 계곡은 평범한 도시 공원의 모습을 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수성동에 '동(洞)'자가 붙어 있는데 이것은 행정구역명을 뜻하는 게 아니다. 골짜기를 뜻한다. 백사실계곡으로 유명한 백석동천(白石洞天)도 같은 한자어를 쓰고 있다. 수성동계곡이든 백사실계곡이든 참으로 소중한 존재다. 시내중심가와 멀지 않은 곳에 그렇게 청량감을 주는 계곡이 있다는 게 그저 정말 고마울 따름이다.

 


▲ 수성동계곡 인왕산 수성동계곡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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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성동계곡

 

 

 

 

 

시인의 언덕과 윤동주문학관


수성동계곡을 벗어난 트레킹팀은 윤동주 문학관을 향해 갔다. 2012년 7월에 개관한  문학관은 윤동주 시인의 친필 원고와 시집 등이 전시되어 있다. 흥미롭게도 문학관은 수도가압장과 물탱크 시설을 개조하여 만든 전시관이다. 그런 탓인지 전시관에는 옛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위쪽으로는 시인의 언덕이라는 작은 공원도 마련되어 있다. 시인의 언덕에서 바라보는 주변 풍광이 상당히 낭만적이라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열심히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문학관에 가기 전에 누상동에 있는 윤동주의 하숙방을 먼저 탐방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누상동 하숙방은 수성동계곡 아래쪽에 위치해 있다. 

 


▲ 시인의 언덕 윤동주 시인의 언덕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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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문의 역할을 했던 창의문


윤동주 문학관을 넘어 마지막 목적지인 창의문으로 향했다. 창의문(彰義門)은 사소문 중 하나로 자하문(紫霞門)으로 더 많이 알려진 문이다. 북대문인 숙정문이 있었음에도 실질적으로 북문(北門) 역할을 했던 건 바로 창의문이었다. 북악산의 험한 지형 위에 세워진 숙정문은 사람의 발길이 뜸했을뿐더러 1413년부터는 그마저도 폐쇄를 시켰다. 숙정문이 오른팔이 되어 경복궁을 내리누른다는 풍수학적인 의미 때문에 그런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그때 창의문도 폐쇄가 되는데 왼팔의 역할을 하여 경복궁의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죄명' 때문이었다. 하지만 숙정문과 달리 교통의 요충지 위에 놓여 있던 창의문은 1506년(중종 1년)에 다시 통행이 재개된다. 그래서 소문(小門)인, 창의문이 '북문 역할'이라는 중책을 맡게 된 것이다. 

사람들의 통행이 빈번했다는 것은 그 문 아래로 수많은 역사적 발걸음이 오갔다는 뜻도 된다. 실제로 인조반정 때 능양군(인조)을 옹립하던 세력들은 이 문을 통해 도성을 점령했고, 광해군을 쫓아낸 후 권력을 잡게 된다. 현재의 문루는 조일전쟁(임진왜란)때 불 타 사라진 것을 영조 때(1740) 건립한 것이다. 현재 창의문은 일반인에게 개방이 되어 있어 문루까지 직접 올라갈 수 있다. 내부에는 인조반정 때 공을 세운 인사들의 이름을 적은 나무판이 걸려 있다. 이 판은 문루를 세울 때 같이 만들어진 것이다.

 



 
▲ 창의문 북문의 역할을 했던 창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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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문의 천장벽화는 닭


트레킹팀은 창의문을 통과할 때 천장화를 바라보면서 이동했다. 광화문이든 창의문이든 문을 통과할 때 천장화를 보면서 관찰해보자. 각 문마다 그려진 수호동물이 다르다. 막간을 이용한 퀴즈시간.

"저 그림이 뭘로 보이세요? 딱 봐도 용은 아니고."
"봉황 아니에요? 좀 모습이 우습긴 한데..."
"맞아요. 봉황 같은데요."


거의 다 '봉황'으로 답으로 말했다. 하지만 틀린 답이다. '닭'이다. 특이하게도 창의문의 천장화에는 닭이 그려져 있다. 이 일대가 풍수적으로 지네의 기운을 가졌다하여 천적인 닭을 창의문에 그려 넣었던 것이다. 관악산의 화기를 누른다고 광화문 앞에 해태상을 만든 것과 같은 이치다.

"설명을 들으니까 치킨이 생각나요. 저기가 부암동 아닌가요? 저쪽에 유명한 통닭집이 있다고 하던데요."

부암동을 잘 아는 참가자 한 분이 이런 말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어디선가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몰려왔다. 통닭 냄새였다. 마늘통닭인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어쨌든 창의문 밖 치킨집에서 풍겨오는 치킨 냄새에 트레킹팀은 모두 한마음이 되었다. 모두 다 군침을 흘렸다.

 
▲ 창의문 천장화. 닭이 그려져 있다. 봉황이 아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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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유익하고, 또한 맛집 탐방도 할 수 있는 인왕산 역사트레킹은 종료가 됐다. 글을 마치기 전에 1편에 언급된 사직단으로 돌아가 보자.


국가의 대소사가 있을 때 조선의 왕들은 직접 제단에 나가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 자신의 부덕함을 하늘에 고하면서 제를 올렸던 것이다. 그런데 메르스 사태라는 중차대한 일을 직면하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의 모습은 어떤가? 사태가 일어난 지 12일이 지난 후에야 '초기 대응이 잘못됐다'고 짧은 멘트를 남겼을 뿐이다. 이후 발표에서는 발병 환자의 수도 틀리게 언급을 했다. 또한 주말(6월 6~7일)에는 특별한 외부활동 없이 조용히 보내셨다고 한다.

지금이 그렇게 한가할 때인가? 시급을 다투며 행정력을 총결집해도 모자를 판에 그렇게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는 게 맞는 일인가? 차라리 화끈하게 사직단에서 제사라도 올려주셨으면 좋겠다. 대한민국의 안녕을 위해서. 너무 답답해서 하는 말이니 오해는 없으셨으면 한다. 오죽 답답하면 여행기사를 이런 식으로 끝을 맺겠는가!   

 
▲ 창의문 창의문 문루는 개방되어 있다. 문루를 탐방중인 트레킹팀.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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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움말

1. 인왕산역사트레킹 코스: 광화문→사직단→단군성전→수성동계곡→윤동주문학관→창의문
2. 약 5km 정도 밖에 되지 않지만 탐방할 것들이 많아 3시간 이상 소요될 것으로 보임.
3. 시작점: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에서 하차. / 종료점: 종로구 부암동. 경복궁역행 버스 탑승 가능함.
4. 5월 25일에 트레킹을 행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http://blog.daum.net/artpunk

 

 

선유도가 원래 섬이 아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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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작가

 

 

 

 

 

 

본문내용

양화대교

 

한강은 서울 한복판을 유유히 흘러가며 사람들에게 많은 것들을 나누어 주었다. 지금이야 모습이 많이 바뀌었지만 여름에는 강수욕장으로 변해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았고, 겨울에는 얼음을 채취할 수 있는 일등 장소로 이용됐다. 그렇듯 한강은 예로부터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아왔다.

 

진경산수화로 유명한 겸재 정선(1676~1759)도 한강을 무척이나 사랑한 인물이었다. 진경산수화란 우리 산천을 우리의 필치로 담아낸 것을 말한다. 진경산수화 이전에는 중국 남방 화풍으로 우리 산천을 담아냈었다.

 

겸재는 65세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양천 현감으로 봉직된다. 현감 시절 겸재는 ‘선유봉’, ‘양화환도’ 같은 진경산수화를 그렸는데 그 배경이 됐던 장소가 지금의 선유도와 절두산 일대이다.

 

 

 

 

신선이 노닐던 봉우리, 선유봉

 

선유도-양화대교: 뒤로 당산철교와 여의도가 보임.

 

 

 

 

선유도는 원래 섬이 아니었다. 선유봉(仙遊峰)이라고 불린 해발 40m 정도의 봉우리였다. ‘신선들이 노니는 곳’이라고 불릴 정도로 선유봉은 그 형상이 오묘하였다고 한다. 지대가 얕은 강변 부근에 소나무가 군집해 있는 기암괴석의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으니, 예로부터 이곳은 많은 이들이 즐겨 찾은 명승지였다. 그렇게 선유봉을 찾아 ‘신선놀음’을 했던 이들은 우리나라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중국의 사신들도 이곳을 찾아 조선의 풍광에 감탄을 했다고 한다.

 

 

 

 

당산철교 아래 초미니섬

 

 

 

그렇다면 ‘신선들의 봉우리’였던 선유봉은 왜 지금처럼 섬이 되었을까? 선유봉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자신을 깎아내렸다. 그렇게 깎인 돌은 일제 강점기에는 여의도 비행장의 활주로와 제방을 쌓는데 사용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강변북로 공사에 이용되었다. 그렇게 깎이고 깎이다가 원형을 잃게 되었고, 이후 한강의 강폭이 넓어졌을 때는 주변으로 강물이 채워져 섬으로 고립되게 된다.

 

선유도의 변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78년에 서울 서남부권의 식수를 공급하는 정수장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선유도 정수장은 폭발적으로 늘어난 서남부권의 주민들에게 식수를 공급했던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고 보면 어린 시절 서울 서남부권에 거주했던 필자도 선유도 정수장에서 공급된 물을 마시고 자랐던 셈이다. 선유도 정수장은 2000년도 까지 운영됐고, 그 이후에는 공원으로 꾸며졌다.

 

 

 

 

* 척화비: 절두산 성지

 

 

 

 

 

지금은 무시무시한 이름으로 개명한 잠두봉

 

선유도의 반대편에는 절두산이 있다. 이 절두산(切頭山)도 사연이 많은 산이다. 절두산의 원래 명칭은 잠두봉이었다. 뽕나무가 많이 자란다고 하여 잠두봉(蠶頭峰)이라고 불렸던 것이다. 그런데 1866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병인박해가 일어났고 이곳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대거 붙잡혀 와 머리가 잘리는 참수형을 당하게 된다. 무려 8천 명에 달하는 천주교 신자들이 참수를 당했는데 그 이후로 이 곳은 ‘절두산’으로 불리게 됐다. 흥선대원군은 이곳에 척화비를 세워 쇄국정책의 고삐를 죄게 된다.

 

 

 

 

 

절두산 성지

 

 

 

 

한강을 사이에 두고 한 곳은 깎이고 깎여 섬이 되었고, 또 한 곳은 ‘머리가 잘린다는’ 무시무시한 이름으로 개명을 하게 됐다. 두 봉우리가 동시에 비운을 겪게 된 셈이다.

 

300여 년 전 겸재 정선이 양화진 일대를 그린 ‘양화환도’에는 선유봉과 잠두봉이 풍치있게 그려져 있다. 두 봉우리 사이로 한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고, 그 위를 나룻배가 느긋하게 물길을 가르고 있다. 유심히 보고 있노라면, 마치 화폭에 들어가 겸재 선생과 함께 뱃놀이를 하는 느낌이 들 정도다.

 

지금은 겸재 선생도, 나룻배도 없다. 또한 선유봉은 원형을 잃었다. 하지만 너무 슬퍼하지 말자. 양화대교가 있으니까. 절두산 성지를 탐방한 후 양화대교를 건너 선유도에 갈 수 있다. 양화대교와 선유도는 연결되어 있다.

 

양화대교에는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면서 한강을 조망할 수 있는 커피전문점도 있다. 양화대교 양 옆에 있는 절두산 성지와 선유도를 탐방한 후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시는 것도 운치가 있을 것이다. 아, 그렇다면 한강 근현대사 탐방 후에 마시는 커피 한 잔이 되는 건가?

 

 

 

* 선유도 공원: 옛 정수장 시설물을 전시하고 있다.

 

 

 

 

 

 

 

■ 도움말
1. 코스: 합정역 ▶ 절두산성지 ▶ 양화대교 ▶ 선유도 ▶ 당산역
 * 코스 종료 후 여의도에 위치한 샛강생태공원까지 탐방하는 것도 추천함.
2. 교통편: 시작 – 합정역(2,6호선) 7번 출구 / 종료 – 당산역(2,9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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