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1월 22일부터27일까지, 6일간 경상남도 서부권을 탐방했다. 잘 간직하기 위해 기록한다. 디테일한 것보다는 스케치 정도 수준이다. 탐방 순서는 이렇다.

함양 ☞ 거창 ☞ 남해 ☞ 삼천포(사천)

 

 

11월 23일. 예전부터 꼭 보고 싶었던 거창 양평동 석조여래입상을 보러갔다. 거창군 거창읍 양평마을에 있는 석조여래입상은 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사실 경남 거창은 내게 친숙한 곳이다. 거창군 고제면에 거창 귀농학교가 있는데 그 귀농학교 교장선생님과 친분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몇해 전에는 귀농학교에서 한동안 기거를 한 적도 있었다.

 

그렇듯 거창에 많은 발걸음을 해왔지만 정작 문화재 답사는 제대로 하지 못했다. 양평동 석불도 전에 한 번 답사하려고 갔다가 정확한 위치를 몰라 되돌아 온 적이 있었다.

 

석불이 있는 양평마을은 거창 읍내에서 가깝다. 직선거리로 약 2~3km 정도 된다. 거창시외버스터미널에서도 걸어서 약 3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다. 나도 읍내에서 걸어서 갔다. 이번에는 제대로

찾아가려고 지도를 계속 주시하고 걸었다.

 

사진에서보듯 양평동 석불은 뛰어난 면모를 과시하고 있다. 아주 잘 표현된 얼굴 부분, 옷주름까지 신경 쓴 신체부분... 정교한 멋이 살아있는 디테일이 강한 석불이다. 밑받침인 대좌까지 합쳐 총 3.7미터에 이르는 석불은 통돌로 되어 있다. 거대한 조각상이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다니! 그것도 천 년도 훨씬 전인 신라 후기에 만들어졌다니!

 

사실 이 양평동 석불은 1970년대에 복원을 하였다. 그 전에는 하반신이 땅 속에 묻혀있었다는 것이다. 그때 머리 위에 있는 천개도 같이 올렸다고 한다. 원래부터 천개가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실수에 의해 올려진 것인지... 의견이 분분했다고 한다. 참고로 석불 머리 위에 얹혀진 둥근 모자 같은 걸 천개 혹은 보개라고도 부른다.

 

솜씨 좋은 석공이 만든 석불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흐믓해진다. 섬세하게 잘 표현된, 거기에 보존 상태까지 좋은 석불을 보니 자연스럽게 합장을 하게 됐다. 더군다나 아주 가까이까지 가서 볼 수 있으니 그 감동이 두 배가 되더라. 마치 한 편의 완벽한 예술 작품을 보고 온 느낌이었다.

 

이렇듯 우리 문화재는 후손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해준다. 정말 눈이 호강한 날이었다.

 

 

 

 

 

 

 

 

 

 

 

 

 

 

 

 





















외롭게 서 있던 석탑에 부처님이 임하셨네!



이제 곧 석가탄신일입니다. 오랜만에 거창 읍내에 나왔더니 군청 앞 공원과 로터리가 연등으로 장식됐네요.

거창군청 로터리 중앙에는 아림사지5층석탑이 서 있습니다 . 차들이 쉴세없이 뱅글거리며 도는 로터리에 귀중한 문화재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석탑을 볼 때마다 마음이 좀 무거웠습니다.

고찰이었던 아림사는 몽고와 왜구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졌고, 5층석탑 마져 뱅글거리는 자동차들에 의해 찬밥처럼 섞여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짠할 수밖에요.

그래도 석탄일은 석탄일입니다. 외롭게 서 있는 석탑에 조형물이나마 석가모니께서 함께 해주시니 고마운 일이죠. 코끼리도 있어서 더 다채로워 보이기도 하네요. 한지로 만든 조형물들이었지만 그래도 석탄일을 나타내주는데 부족함이 없어보입니다.

한가지 덧붙이자면 거창의 옛 명칭은 아림이었습니다. 아림사의 명칭도 그것에 연유한 것이죠.












 

신을 부르짖었던 공포의 시간들

 

지리산 성삼재에서 맞은 거짓말 같았던 순간

 

15.03.20 18:01   최종 업데이트 15.03.20 18:01

 

 

 

 

 

 

 

2013년 여름, 경남 거창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하느님 살려주세요!"

 


2013년 8월의 어느 날. 필자는 경남 거창군 웅양면에서 고제면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에서 저렇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아니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당시 필자는 자전거여행 중이었는데 고갯길에서 그만 브레이크가 제 기능을 못하는 상황을 맞이하고 만 것이다.

 


짐을 주렁주렁 매단 고물자전거가 '빛의 속도'로 고갯길을 내달리는데 정말 아찔했다. 회전을 할 때는 반대편 중앙선을 크게 넘어갈 정도였다. 오죽했으면 신을 찾으며 살려달라고 애원을 했겠는가? 한편으로는 '자전거에서 뛰어내려 타박상 정도로 마무리를 지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여간 참 많은 것들이 스쳐지나갔던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런데 문득 도로 끝단에 피어나 있던 잡초들이 눈에 들어 왔다.

 


'저 잡초들 위로 바퀴를 굴리면 속도가 죽을 수도 있겠지. 흙들도 깔려 있으니 그냥 아스팔트보다는 노면이 거칠 거야'

 


신께서 가호를 베풀었던 것일까? 그렇게 잡초 더미와 거친 노면을 질주하다보니 예상대로 속도가 확 감속되었다. 또 다행이었던 것은 양편 모두 차가 한 대도 다니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찔한 순간을 운 좋게 넘긴 셈이었다.

그렇다면 필자는 왜 그렇게 무모한 행위를 했던 것일까? 도대체 무엇을 믿고 자전거도 제대로 점검하지 않고 급경사를 내려왔단 말인가?

 

 

 



 
▲ 지리산 정렴치에서 촬영했다. 주렁주렁 짐을 많이 실었는데도 바람이 거세게 불어 자전거가 중심을 못 잡고 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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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 진입하니 태풍이


2011년 8월. 그때도 필자는 자전거여행을 하고 있었다. 일명 제2차 국토종단여행. 그해 여름은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렸었다. 당시를 기록한 여행수첩에는 거의 매일 비가 왔다고 적혀있었다.

비만 맞으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문제는 태풍(무위파)을 맞았다는 것이다. 그것도 지리산 성삼재에서 맞았다. 분명 전북 남원에서 지리산 관통도로로 진입했을 때는 해가 쨍쨍했었다. 하지만 고도가 높아질수록 기상이 나빠졌던 것이다. 비는 그렇게 많이 내리지 않았지만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태풍이 지리산을 빗겨가거나 소멸된다는 예보를 믿고 지리산으로 방향을 잡았는데 낭패를 당했던 것이다.

이미 너무 높이 올라왔기 때문에 다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래서 애초 계획했던 대로 성삼재를 찍고 전남 구례로 내려가기로 했다. 필자의 애 타는 마음도 몰라주고 더 거센 빗줄기와 더 강력한 바람이 성삼재 일대를 강타했다. 침낭은 물론  모든 옷가지는 싹 다 젖었고, 휴대하던 전자기기들도 모두 침수 피해를 입어 작동에 큰 이상이 생겼다. 몸 상태도 문제였다. 계속 거센 비바람에 노출되다 보니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다. 빨리 쉴 곳을 찾아 떠나야 했다.

그러나 구례 방면으로 내려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자전거의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시작한 여행이라 그랬는지 지리산 성삼재에 이르렀을 때는 자전거도 거의 망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싸구려 고물자전거가 한계치에 다다랐던 것이다. 더군다나 계속된 비로 인해 관통도로의 노면은 무척 미끄러웠다. 그 길을 내려간다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지리산 관통도로는 한계령 관통도로보다 훨씬 더 험하다.

 






 
▲ 만해 한용운 충남 홍성에 있는 만해 한용운 선생 기념관 앞에서 한 컷. 2011년 여름.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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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으로 갈 수도 저쪽으로 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태풍이 물러갈 때까지 성삼재에 머물 수는 더더욱 없었다. 그냥 그 상황을 회피하고 싶었다. 눈을 감고 싶었다. 눈앞에서 펼쳐진 상황이 그냥 다 거짓말 같았다.


고심 끝에 결단을 내렸다. 내려가기로. 그런데 그때 어떻게 내려왔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상황에서 하강을 했으니 그냥 공포스러웠다는 느낌만 남아 있다. 그래도 한 가지 기억나는 건 그나마 성삼재로 올라오는 차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정말 다행이었다. 그때 차들이 반대편에서 많이 올라왔다면 필자는 지금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

2013년에는 하느님의 은혜(?)를 입었다면 그 당시에는 부처님의 자비(?)를 입었었다. 공포에 떨며 겨우겨우 도로 하단인 천은사에 도착했는데 그곳 인근에 텐트를 칠 수 있었다. 주차장 앞쪽에 빈 건물들이 있었는데 그곳이 필자에게 쉴 곳이 되어 준 것이다. 덕분에 몸을 좀 추스를수 있었던 것이다. 그 뒤로도 비바람이 거셌는데 맑은 날은 본 건 3일 후였다.

지리산에서 태풍을 맞으며 하강을 한 경험이 있었기에 그렇게 거창에서 무모하게 페달을 굴렸던 것이다. 앞선 경험이 독이 될 뻔한 경우였다.

필자의 거짓말 같았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글을 마치기 전에 한 가지 당부의 말씀을 드린다. 도보여행이든 자전거여행이든 안전이 최우선이다. 목숨 걸고 여행을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필자와 같이 거짓말 같은 상황을 맞이하지 않으려면 철저한 준비와 대비가 필요할 것이다. 안전제일!


 


 

사설.칼럼

렌즈세상

[렌즈세상] 죽방울놀이

등록 : 2013.08.26 18:12수정 : 2013.08.26 18:12

 

 

 

 

 

 

 

 

 

 

 

 

 

 

 

 

 

 

 

 

 

 

 

 

 

 

 

우리문화연구소 이원하 소장이 아이들 앞에서 죽방울놀이 시범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 소장은 충남 공주에서

 

우리의 전통 놀이문화에 대한 연구와 보존에 힘쓰고 있는데요. 죽방울놀이는 보부상단의 볼거리 문화에서

 

전해 내려왔다고 합니다.

 

8월2일 ‘거창아시아1인극제’에서 찍었습니다.

 

곽동운/ 여행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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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8월 27일자 <한겨레신문> 오피니언란에 필자가 찍은 사진이 게재됐다. 죽방울놀이라고,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놀이에 대한 사진이 게재된 것이다. 이 사진에 등장한 이원하 소장은 우리나라 전통 민속놀이에 대한 애정이 강한 분이다. 이 소장과 잠깐 인터뷰를 했을때 필자는 그에게서 강한 인상을 받았었다.

 

"우리나라 전통놀이 문화를 통해 제 삶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사실 제 얼굴이 많이 험상 궂잖아요. 그런데 우리 놀이문화를 알고, 접하고, 연구하다보니 어느새 제 얼굴이 부드러워졌다고 하더군요~"

 

이 소장의 얼굴에서 부드러움이 묻어 나오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확실한 건, 전통놀이 문화에 대한 이 소장의 신념은 확실하다는 것이다.

 

'제가 충남 공주의 한 아파트에서 사는데 우리 아파트 놀이터에도 흙이 없어요. 아이들이 다친다고 놀이터에 우레탄을 깔아 놓은 겁니다. 공주시에 사는 아이들이 이 정도인데 다른 대도시의 아이들은 어떻겠습니까? 도대체 유년기에 흙이나 땅을 만지고 놀 기회가 없는 거에요. 아이들이 흙장난을 하면서 얻는 정서적인 느낌들이 애초부터 박탈 당하는 것이죠.'

 

그렇다. 이 소장의 말처럼 흙 장난을 하면서 얻는 정서적인 감흥이 얼마나 소중한가? 그 유년시절의 경험과 느낌들은 소리소문 없이 우리의 유전자 속에 크게 각인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런 경험과 느낌들은 하나하나가 다 소중한 것들이다. 황혼에 잠긴 어르신들이 50~60년도 더 지난 자신의 유년기 시절을 미소를 띄우며, 바로 엊그제 이야기처럼 떠올리는 것을 보면 그 유년시절의 기억들은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귀하고 귀한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학원에 쫓겨, 스마트폰에 쫓겨 어른들보다 더 정신없이 살아가는 우리 아이들에게 흙을 되돌려주자. 흙에서 놀다 무릎팍이 좀 까진다고 너무 속상해 하지 말고... 상처나면 소독연고 좀 발라주면 되지 뭐. 자신의 아이가 어떠한 상처도 받지 않고 자라기를 원하시나? 왠만한 부모들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실 것이다. 그럼 아이들에게 숨 쉴 공간을, 또한 정서의 공간을 내주시라. 그냥 흙에서 재밌게 놀 수 있게 짬을 주시라~!    

 

 

 

 

 

 

 

 

 

 

 

 

 

 

 

* 거창귀농학교: 거창귀농학교를 배경으로 한 컷

 

 

 

 


 

* 앤젤리: 홍콩에서 온 앤젤리. 귀농학교 황토방을 혼자 차지하는 호사(?)를 누렸습니다.









안녕하세요?emoticon

저는 자칭 거창귀농학교의 미디어 담당인 곽작가라고 합니다.

가을비 치고는 상당히 많은 양의 비가 내리는 9월 14일 오전에,
흥미로운 소식이 하나 있어 이렇게 홈페이지에 글을 남겨봅니다.

우프코리아라를 통해 홍콩에서 온 젊은 처자가 거창귀농학교에
약 4일간 머무르고 갔기에 그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 보려고 합니다.

아참 우프가 무엇이냐고 반문하시는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우프(WWOOF: Willing Workers on Organic Farms) 는 세계 각국의
유기농 농가들이 가입되어 있는 전세계적인 모임입니다.

한국 유기농 농가나 서구의 유기농 농가나 일손이 딸리기는 매 한가지입니다.
사람의 손발이 많이 필요하다는 뜻이지요. 그런 부분을 우프가 채워주는 것입니다.
우프 지원자들은 4~6시간 정도의 노동력을 투여하고, 그에 대한 댓가로
농가들은 지원자들에게 숙소와 식사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노동의 댓가로 임금을 받는 워킹홀리데이하고는 다른게 우프는 원칙적으로
임금을 받지 못한답니다.  뭐 일을 잘한다면 농장주가 차비 같은 거마금 정도는 주지 않을까요???ㅋ

지금까지 많은 세계 각국의 젊은이들이 거창귀농학교를 다녀갔답니다.
우프를 통해서요. 가까운 아시아 뿐아니라 미국에서 온 친구들도 있었고,
심지어 동유럽인 불가리아에서 온 친구들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 친구들은 우프를 통해 한국의 문화를 이해하고 싶어하더군요.
지금 소개하는 앤젤리도 한국의 문화와 농촌에 대한 관심 때문에
한국에 왔고, 이곳 거창 귀농학교까지 찾아 왔다고 하더군요.



* 앤젤리: 귀농학교에 와서 앤젤리는 다양한 농촌 체험을 하고 갔답니다. 효소 담기 작업, 풀베기 작업 등을 잘 해주더군요.



* 사과작업: 앤젤리가 귀농학교를 방문했을 때는 한참 홍로 사과 수확 작업으로 바쁠 때였습니다.
한편 앤젤리는 고제 사과가 맛있다고 '아삭아삭' 거리며 맛있게 잘 먹더군요



 


더불어 거창귀농학교와 관련된 소식이 하나 더 있어 이 자리에서 소개하고자 합니다.

 

추석을 코 앞에 앞 둔 9월 14일 오전 9시,
거창귀농학교에서는 경사스러운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모둠반 14기 수료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곳 거창군 고제면은
홍로 사과로 유명한 고장입니다. 홍로는 붉은 빛깔이
일품인 품종으로 추석 차례상에 올려 지는 좋은 사과입니다.

그 홍로를 추석을 앞두고 수확하는 터라 9월 초순이 되면
고제면은 전체가 정신이 없을 정도가 됩니다.
오죽하면 '전쟁'이라는 표현까지 나올 정도입니다.

이렇게 바쁠 시기에 모집된 기수라서 그런지
14기분들은 매일같이 사과농장에 출근(?)을 해야 했습니다.
사과를 따고, 선별을 하고, 포장을 하고...

이번 기수들은 이론적인 면보다는 과수 농가에서 실전 경험을
쌓고 수료를 한 셈입니다. 한마디로 현장 교육을 제대로 수행한 셈입니다.

이번 모둠반 14기는 총6명이 입교하여 아무러 사고 없이 6명 전부가
수료를 했답니다. 이제는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셔서 구체적인 귀농에 대한
설계도를 그리실 겁니다. 그 설계도가 잘 그려져서 성공적인 귀농, 귀촌을
이루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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