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진미륵: 은진미륵을 옆에서 본 모습이다. 뒤쪽으로 보이는 곳은 황산벌이다.

 

 

 

 

* 관촉사 5층 석탑: 관촉사 석등과 함께 은진미륵 앞에 병렬에 서 있다. 필자가 방문했을 당시는 그 앞으로 무언가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무려 36년 동안 제작된 은진미륵

우리나라에서 최대이고 긴 세월 동안 제작된 터라, 관촉사 석불에는 흥미로운 설화가 스며있었다. 어느날 반야산에 큰 바위가 불쑥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에 고려 조정은 그 바위로 불상을 만들 것을 결정하고 당대 최고 고승이던 혜명 스님에게 그 일을 맡겼다. 고려 광종 19년(968)에 시작된 석불 건립은 목종 9년(1006)에 가서야 완성이 됐다. 석불 제작은 다리, 몸통, 머리 세 부분으로 나뉘어서 제작이 됐는데 각 부분이 다 완성된 후 큰 문제가 발생했다. 각 부분들이 엄청나게 크고 무거운 터라 인력으로는 석불을 세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당시에 타워크레인이 있었겠는가?

혜명 스님의 고민은 깊어 갔다. 그러던 차에 스님은 아이들이 진흙 불상 놀이를 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거기서 힌트를 얻어 석불을 세웠다고 한다. 아이들도 다리, 몸통, 머리를 따로따로 제작하여 불상을 만들었는데 나중에 그것을 독특한 방법으로 합체를 했던 것이다. 먼저 다리를 세우고 그 주위를 모래로 채우고는 물을 뿌려 주위를 단단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비탈을 만들어 몸통을 굴려서 올렸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래비탈을 이용해서 진흙 석불을 3단 합체했다는 것이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혜명스님은 '옳거니'했고, 결국 18m가 넘는 엄청난 규모의 석불이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이렇듯 은진 미륵불은 제작시기와 제작자가 명확한 석불이다.  

 

 

 

 

 

 

 

 

 

▲ 은진미륵 필자 대신 등장한 나의 배낭. 이제 저 배낭을 메고 계속 해서 '모험'을 떠날 생각이다. 은진미륵의 큰 손을 붙잡고 함께 모험을 떠나고 싶다!

 

 

 

 

 

▲ 은진미륵 은진미륵이 워낙 거대해서, 그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남성이 무척 작아보인다.

 

 

 

 

# 고려 전기시대에 제작된 대형석불들

한편, 은진 미륵불이 제작된 고려 전기시대는 거석 석불이 유행한 시기였다. 고려왕조 창건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호족들의 독특한 지방문화가 불교문화제에 투영된 시기였던 것이다. 활기차고 강건한 지방문화가 석불 건립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거대한 돌미륵을 탄생시켰다.

고려 전기에 제작된 대형 석불들은 여러 개가 있다. 부여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일명 파주 쌍미륵), 안동 이천동 석불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이 시기에 세워진 석불들은 하나 같이 다 엄청난 크기들을 자랑하고 있다. 신체비례에 맞춰 정교함을 구현하는 방식이 아닌 특정 부위를 부각시킨 거대한 석불을 제작하였다. 그런 탓인지 관촉사 석불은 3등신에 가깝고, 얼굴은 '얼큰이'다. 또 손은 마치 야구글로브를 낀 것처럼 아주 크다.

은진미륵을 가까이에서 마주하니, 당장이라도 내게 그 큰 손을 내밀고 이렇게 말하는 듯싶었다.

'어이 곽 작가, 지금 당장 나랑 같이 모험을 떠나자고!'

그럼 왜 그 당시 사람들은 그렇게 큰 석불들을 제작했을까?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보다 세공기술이 덜해서 그랬던 것일까?

고려 전기 시대에는 고을의 평안에서부터 각 개인의 기복까지 다 받아주는 수호신 같은 거대한 석불이 제작되었다. 이런 대형 석불은 해당지역의 민간신앙까지 접목되어, 마치 돌로 큰 장승을 세운 것처럼 형상화됐다. 거인 같은 미륵불이 마을입구나 왕래가 잦은 곳에 떡하니 서 있으니 해당지역 사람들은 얼마나 든든했겠는가? 방범용 CCTV가 없었더라도 아주 든든했을 것 같다. 은진미륵이 서 있는 반야산도 황산벌이 보이는 곳으로 인편의 왕래가 잦은 곳이다.

 

 

 

 

▲ 대조사 석조관음보살입상 고려 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생김새와 조각기법 등이 논산 관촉사 석조관음보살입상과 유사성을 띄고 있다.

대조사는 충남 부여에 있는 사찰이다. 부여의 옆동네가 논산으로 두 지역은 무척 가까이에 있다.

 

 

 

 

# 은진미륵의 디테일은 선이 굵은 디테일

한편 디테일(detail)적인 관점으로 은진미륵을 바라본다면 어떤 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충남 서산시 가야산 자락 절벽에는 6세기 말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서산마애삼존불상이 새겨져 있다. '백제의 미소'라고 불리는 서산마애삼존불은 섬세한 백제 불교 미술의 정수라고 할 만하다. 마치 한 땀 한 땀 수를 놓은 듯이 바위에 새겨진 마애삼존불은 정교성을 강조한 '세밀한 디테일'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손도 크고, 얼굴도 큰 은진미륵은 '선이 굵은 디테일'로 불릴 수 있을 것 같다. 얼굴과 손을 강조했고, 더군다나 발가락까지 크게 부각시킨 은진미륵을 두고 기계적인 관점에서 디테일이 떨어진다고 하면 그거 정말 곤란한 일이다. 세밀한 디테일이 있는가 하면 선이 굵은 디테일도 있지 않겠는가?

 

 

 

▲ 서산삼존마애석불 6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서산 삼존마애석불. 일명 백제의 미소로 불린다. 세밀한 디테일이 두드러진 정교한 석불이다.

 

 

 

 

 

 

은진미륵께 삼배를 올린 후, 필자는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자리를 계속 옮겨가며 열심히 사진을 찍다 카메라 LCD창에 비친 내 얼굴을 보게 되었다. 내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그것도 그냥 웃음이 아니라 함박웃음이었다. 그냥 은진미륵 앞에 서 있으니 좋았던 것이다. 필자는 그냥 복을 넝쿨째 받은 느낌이었다.

은진미륵께서 복을 내려주셨으니 필자의 새로운 비즈니스가 번창할 것 같다. 새로운 비즈니스? 필자는 현재 outdoor와 tour를 접목한 일명 '아웃투어'를 아이템 삼아 사업을 시작할 예정이다. 거창한 일은 아니고, 그저 예전부터 해왔던 여행을 나름대로 특화시켜볼 생각이다. 기회가 된다면 <오마이뉴스>에도 아웃투어와 관련된 기사를 송고할 생각이다.

논산 관촉사에 가서 은진미륵께서 주신 '기복'을 받아왔으니 앞으로는 좋은 일들만 가득할 것 같다. 독자여러분들도 좋은 일들이 가득하시길 기원해본다.

 

 

 

 

 

▲ 국제탈춤공연장: 안동 시내에 국제탈춤공연장이 있다. 그 입구에 하회탈 석상이 방문객들을 환영해 주고 있었다.

 

 

 

 

▲ 안동 이천동 석불: 망토를 두르고 수풀 속에서 그 앞을 지나는 중생들을 굽어 보시는 것 같다

 

 

 

 

 

안동 이천동 석불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만든 석불이다. 몸통 부분과 머리 부분이 별개의 암석으로 제작된 독특한 형상을 갖고 있는 것이 이 석불의 특징이다. 몸통 부분, 즉 필자가 망토를 둘렀다고 지칭한 큰 바위 상단 중앙에 머리 부분을 조각한 별개의 돌을 얹었다는 것이다. 단지 머리 부분만 조각하여 올렸을 뿐인데도 자연석인 몸통 부분이 서로 어우러져 일체형의 거대한 석불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석불 제작자의 지혜와 구성 감각에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대목이다.

안동 이천동 석불은 고려 전기 작품이다. 파주 용미리마애이불입상(일명 파주 쌍미륵 석불)이나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부여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등이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석상들이다. 이 시기에 세워진 석불들은 하나 같이 다 엄청난 크기들을 자랑하고 있다. 신체비례에 맞춰 정교함을 구현하는 방식이 아닌, 선이 굵은 방식으로 '키다리 아저씨' 같은 큰 석불을 조각했던 것이다. 일례로 대조사 석불은 인체비례로 따지면 4등신에 가깝고, 얼굴은 '얼큰이'다. 정교성보다는 투박함이, 조화미보다는 개성이 넘치는 석불들이 탄생했던 시기가 바로 고려 전기였던 것이다.

그럼 왜 고려 사람들은 선이 굵으면서 개성이 넘치는 큰 석불들을 제작했을까?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의 사람들보다 세공기술이 덜 해서 그런 식으로 석불을 제작했단 말인가? 고려 전기 시대에는 마을의 안녕에서부터 개인적 기복까지 다 받아주는 수호신과 같은 '키다리 아저씨'가 대표적인 석불로 자리 잡게 된다. 이런 대형 석불들은 해당 지역의 민간 신앙이 접목된 형태라고 한다. 마치 큰 장승을 세운 것처럼 거인 같은 수호신이 마을 입구나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으니 해당 지역 사람들은 얼마나 든든했겠는가?

 

 

 

 

 

▲ 안동 이천동 석불: 멀리서 보면 이천동 석불은 망토를 두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천동 석불은 몸통에 따로 제작한 머리를 올린 형상이다.

 

 

 

 

 

▲ 파주 용미리마애이불입상: 일명 파주용미리석불입상 또는 쌍미륵석불이라고도 불린다.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쌍둥 석불 형식을 띄고 있다. 왼쪽에 원립불을 쓰고 있는 상은 손에 연꽃을 들었는데 남성을 뜻한다고 한다. 오른쪽 방립불을 쓰고, 손을 합장한 상은 여성을 뜻한다고 한다. 원립불은 말그대로 둥근 모자 형태이고, 방립모는 그에 비해 각이 진 모자 형태라고 한다. 용미리마애이불입상은 보물 93호로 등록되어 있다.

 

 

 

 

 

# 파주 쌍미륵과 안동 이천동 석불

더불어 파주 쌍미륵은 잉태까지 '책임'져 준다고 하지 않던가? 파주 쌍미륵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든 남녀 쌍미륵 형상이라 잉태와 관련된 기도들이 많이 올려진다는 것이다. 즉 아이를 낳고 싶어 하는 부부들이 많이 와서 기원을 드리고 간다고 한다. 실제로 이 쌍미륵과 관련된 설화도 잉태와 관련이 있었다.

파주 쌍미륵도 안동 이천동 석불처럼 자연석을 몸통으로 이용하였고, 얼굴 부위도 따로 제작하여 올렸다고 한다. 쌍미륵이 있는 용미사를 방문했을 때, 필자는 쌍미륵을 보면서 '깔깔'거리며 웃었다. 경내에서 그것도 석불 앞에서 큰 소리를 내며 웃는다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 짓이다.

"뭐가 그렇게 좋아요?"

스님이었다. 누가 뒤에 있는 줄도 모르고 한참을 웃었던 것이다.

"쌍석불을 보니까 좋네요. 그냥 보기만 해도 복이 오는 것 같아서 좋습니다."

 

불경한 짓을 했지만 웃음소리가 나쁘지 않게 들렸는지, 스님은 필자를 꾸짖지 않고 그냥 거처로 돌아가셨다. 필자는 그런 큰 웃음을 안동 이천동 석불 앞에서도 터뜨리고 만 것이다. 망토를 두른 듯한 모습이 재밌었고, 수풀 사이로 몸을 쑤욱 내민 듯한 모습도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을 하느라 심신이 다 지쳐있었지만 석불을 보고 있을 때만큼은 근심 걱정을 다 내려놓고 크게 웃었다.

그런 '불경'한 모습을 보고 어떤 불심이 깊은 분이 손가락질을 해댔지만 필자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지나가는 나그네가 마을의 수호신에게 안녕을 기원하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물론 석불 앞에서 경망스럽게 '깔깔'거리며 웃었던 것은 예의에 어긋난 일이었지만 말이다.

그런 안동 이천동 석불이 준 큰 기쁨 덕택에 나는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을 계속 해서 이어나갈 수 있었다. 이천동 석불을 보기 위해 거의 20Km 이상을 돌아갔지만 200Km 이상을 갈 수 있는 에너지를 자연스럽게 충전시킨 느낌이었다.

 

 

 

 

# 인공적인 4대강 VS 자연적인 석불

 


글을 마치기 전에 4대강과 관련된 이야기를 잠깐 언급해 보겠다. 이미 실패한 정책임이 만천하에 드러난 4대강에 대해서, 필자까지 나서서 왈가불가 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필자가 스스로 느낀 감상 정도만 언급해 보겠다.

필자는 경북 안동에서부터 구미까지 낙동강 자전거도로를 타고 이동을 했다. 필자는 예전부터 국토를 종단하는 자전거 도로가 하나 개설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자전거도로든 도보여행길이든 무동력 여행을 하는 여행자들이 안전하게 이동을 할 수 있는 길이 개설됐으면 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4대강의 부속시설로 만들어진 현재의 4대강 자전거도로 방식은 반대한다. 필자가 직접 주행을 한 결과 4대강 자전거도로는 안전성이 결여된 구간이 상당히 많았다. 4대강을 중심축에 두고 억지로 설계를 해서 그랬는지 급경사가 다반사였다. 기존의 산길과 농로길을 끌어 와서 4대강 자전거도로 탈바꿈을 시키느라 그런 무리수가 나왔던 것으로 판단된다. 급경사가 진 농로길은 굴곡이 심한 일반국도 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도로폭이 좁을뿐더러 안전시설물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자를 가장 당혹시켰던 것은 강 중간에 떡하니 버티고 서있는 보였다. 그런 보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아름다운 이곳에 이런 시설물이 있어야 하지? 굳이 이런 시설물이 여기 있을 필요가 있을까?'

자연석을 이용하여 석불을 제작함으로써 주위사물들과 혼연일체가 된 안동 이천동 석불을 보다 '쌩뚱맞게' 낙동강 한가운데 떡하니 버티고 서있는 보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입맛이 무척 씁쓸했다.

 

 ▲ 낙단보 경북 군위군에 위치한 낙단보다.

 

 

 

 

▲ 낙단보 경북 군위군에 위치한 낙단보다.

 

 

 

▲ 낙동강 낙동강 상류의 사진이다. 자연은 있는 그대로 두었을 때 가장 아름다운 법이다.

보를 쌓고, 콘크리트를 바르면서 4대강이 친환경적이라고 하면 그걸 누가 믿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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